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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상 Aug 12. 2024

그해 여름

나의 소녀시대

1992년. 하늘에서 갑자기 뚝하고 떨어지듯 세상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혜성처럼 등장한다.


그 해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은 그들이 피리 부는 사나이라도 되는 냥 그들의 노래와 무대에 사로잡혀 맹목적인 추앙자들이 된다.


벙거지와 금테 안경을 쓰고 다니는 아이들이 보이는 가 싶더니, 어느 순간에는 택을 떼지 않은 모자와 옷을 입고 다닌다. 거리마다 머리나 목 언저리에 택을 덜렁거리며 자랑스럽게 걸어 다니는 아이들이 넘쳐난다.


모두가 마법에 걸린 것처럼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음악을 듣고, 똑같은 춤을 추면서도 서로 비교를 하고 모자란 부분을 채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매일매일 그들을 더 사랑하고 그들을 더 따라 하는 아이들의 노력이 가상하면서 신기했다. 저토록 누군가를 향한 맹목적 애정의 근원이 궁금했다.


예나 지금이나 자기애가 건방지리만큼 넘치던 나에게 ‘서태지는 멋진 가수’였을 뿐이라, 나는 그 집단마법에서 한 발치 물러나 있었지만 그 시절 우리에게는 그처럼 쉽게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마법 같은 일들이 일상이긴 했다.


부모님의 잔소리 하나하나에는 온갖 논리를 붙이며 이성적이다가, 갖고 싶은 물건을 조를 때는 아이로 돌아가 돌연 떼를 쓴다.


이제 막 눈뜨게 된 세상의 부조리에 쉽게 끓어오른 청춘의 분노는 이내 이 세상을 내 손으로 모조리 바꿔놓고 말겠다는 시대의 혁명가를 꿈꾸는 것으로 이어진다.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그런 사랑으로 인한 아픔을 동경한다.(이때는 해피엔딩처럼 시시한 건 없다. 그런 건 어린애나 좋아하는 얘기 아닌가!)


한 번쯤 폐병이 걸려 창백하고 파리한 얼굴로 눈부시게 푸른 하늘을 찡긋하며 올려보다 이내 나지도 않은 땀을 훔치며 그 자리에 스르르 쓰러지고 싶다.(이때, 흰색 원피스는 필수다!)


쏴아하고 내리치는 굵은 빗방울을 보고 있노라면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그 비를 흠뻑 맞으며 미친 듯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싶다.


아침에는 희망이 가득한 세상을 만나 기운이 넘쳤고, 점심에는 갑자기 사는 게 고난의 연속이라는 생각에 절망감에 사로잡히다가 밤에는 별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사랑하기로 결심한다.


천재적인 집중력으로 단숨에 읽어버린 할리퀸 로맨스소설은 밤마다 꿈속에서 현실이 되어 나의 연애세포에 생명력을 불어넣었고, 꿈을 깨면 언제나 끝내 물방울이 되어버린 인어공주처럼 실연의 상처가 가득한 슬픈 표정으로 얼굴에 난 여드름을 씁쓸하게 터트려 본다.


행복과 불행이 수만 번 교차하고, 웃음과 눈물이 정말 느닷없이 제멋대로 나던 그 시절.

그렇게 평생을 살면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던 그 시절은 막 꽃이 피는 봄을 닮았으면서도,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 여름을 닮기도 했다.


어쨌든 존재 자체가 변덕이고 변화이고 성장이던 그 해 여름, 나는 폭풍의 언덕에서 그렇게 또 자라고 있었다.


그 아이를 처음 본 건 아직은 겨울이 가시지 않은 3월이었다. 이제 막 중학생이 된 우리는 처음 보는 얼굴과 국민학교 6년 동안 알고 지냈던 얼굴들이 뒤섞여 수줍은 설렘과 긴장 어린 탐색이 가득한 교실에서 딱하고 눈이 마주쳤다.


키가 컸던 그 아이는 뒤쪽 자리에 앉아서 앞에 앉은 남자아이의 이야기를 끄덕끄덕하며 듣다가 교실을 한 번씩 쓱 둘러보기도 하면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


친한 친구무리에서 나만 떨어져 나와 다른 반이 된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교실에 들어섰다가 때마침 교실을 둘러보며 친구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 아이와 눈치 딱 마주친 것이다.


진짜 0.1초였다.

‘쿵’, ‘번쩍’ 이런 말이 드라마에 나오면 나는 진짜 믿는다. 왜냐면 그날 내가 직접 겪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두발규제가 있었던 당시 수많은 밤송이들이 둥둥 떠 있는 것 같은 교실의 한 무리에서 그 아이는 무척 특별해 보였다.


1cm로 바짝 깎은 밤송이머리와 중3까지 입어야 하기에 넉넉한 사이즈로 구입해 헐렁하게 입은 교복으로 신입생들은 하나같이 다들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아빠 양복을 훔쳐 입은 것 같아 보이는 밤송이들과는 다르게, 조금 넉넉한 그 교복을 적당히 접거나 올려서 멋지게 소화했으며, 특히 흰색셔츠를 살짝 걷고는 그 긴 손가락으로 책장을 넘기며 독서를 하는 모습은 순정만화 남자주인공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밤송이들에게는 없는 까맣게 반짝이는 눈동자가 있었고, 그 눈동자는 그 아이의 희고 깨끗한 피부에서 유독 빛났다.


소녀들을 두근거리게 할 모습이었지만 그 아이는 여자아이들에게 쉽게 곁을 내주는 타입이 아니었고 나에게는 그 점이 몹시 매력적이었다.


완벽하지 않은가! 쉽지 않은 남자라니!

그 나이 때 까불거리는 밤송이들과 달리 그 아이는 그때 이미 책과 음악을 좋아했고 요란하게 떠들기보다는 조용히 할 말만 하는 아이였고, 특별히 여자아이들에게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관심 있는 여자아이들이 말을 걸어도 예의를 갖춘 단답형 대답만 돌아왔으며, 오로지 공부와 운동에만 집중하는 ‘재미없는 모범생’이라 결론 내려지자 여자아이들의 뜨거운 관심도 차차 식어갔다.


그 아이의 멋진 눈동자에 반해 나 역시 그 아이에게 큰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이제 사춘기가 막 시작된 내 세상에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했고,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너무 많았다.


그렇게 그 아이와 그럭저럭 ‘같은 반 아이’라는 타이틀 이외에 서로에게 어떤 의미도 없이 데면데면 지냈고, 그렇게 그해 봄은 조금씩 조금씩 지나가고 있었다.

중간고사로 서로의 바닥까지 보게 된 아이들은 이제 정말  친구가 돼가고 있었고, 드디어 5월이 되자 체육행사 준비로 학교는 한껏 상기된 분주함이 가득했다.


반별로 대항종목 대표선수를 선발하고, 응원단을 꾸리고, 대진표에 따라 승리전략을 짜는 등 올림픽을 준비하는 국가대표가 이럴까 싶을 정도로 다들 엄청난 집중력과 열성으로 몰입했다.


체육행사는 5월 중에서도 햇빛이 눈부시도록 아름답고, 살짝 더웠지만 쾌청하고, 나무들은 더없이 싱싱한 멋진 날이었다.


아침부터 운동장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줄넘기도 하고, 응원가도 부르던 나와 소녀들은 그 어느 때보다 배가 고팠다. 학교 앞 돈가스 집은 이미 아이들로 꽉 차 있었다. 조급해진 우리는 이리저리 훑어보며 빈자리를 찾았고, 운 좋게  먼저 와서 식사를 마친 무리들의 움직임을 감지했다.


지금은 수줍은 소녀가 아니라 한 무리의 굶주린 야수가 된 우리들은 자리를 뺏길까 100m 달리기를 하듯이 최선을 다해 목적지점을 향해 내달렸고, 쇼트트랙 국가대표가 스케이트 날을 뻗듯, 손을 뻗어 그 자리에 영역표시를 재빠르게 했다.


친구의 민첩함을 칭찬하며 우리는 기분 좋게 둘러앉아 돈가스를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기까지 아이들은 오전에 있었던 경기 리뷰를 한다. 농구경기에서 슛을 많이 넣었던 3학년 오빠에 대한 찬사, 달리기를 잘하던 옆반 남자아이의 재발견, 벤치에 앉아서 땡땡이를 치고 있던 학교 킹카의 체육복 패션감상평 등등 누가 들으면 시시하다고 할 그 이야기를 반짝반짝 물방울을 튕겨내는 물고기처럼 뻐끔거리며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었다.


그때 자꾸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고소한 돈가스 냄새와 수많은 밤송이와 발랄한 단발들로 넘쳐나는 가게 안을 찬찬히 둘러본다. 5월의 햇볕이 미국식 간이레스토랑처럼 꾸며놓은 인테리어 만나 가게 안은 마치 스노우볼을 들여다보듯 뿌옇고 몽환적으로 보인다.


반짝.

뭔가 반짝이는 것과 마주친다. 그 아이다!

그 아이의 까만 눈동자와 마주친다. 한동안 잊고 있던 그 눈동자와 조우하자 심장이 쿵쾅하는 소리가 귀까지 울리는 것 같다. 목덜미 부분부터 열기가 올라 금방이라도 홍당무가 될 것 같아 나는 얼른 시선을 피해 물고기들의 수다에 집중하는 듯 연기한다.


그러나 나는 30대의 차도녀가 아니라, 그냥 순수하고 열기 가득한 사춘기 소녀였다.

그 눈동자가 너무도 궁금해진다. 설레는 궁금증에 인내심은 힘이 없다.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려 그 아이 쪽을 슬쩍 쳐다본다. 그 아이와 다시 눈이 마주친다.

그 아이는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계속 나를 쳐다본다. 미소를 짓거나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하고 봐도 그냥 나를 그 까만 눈동자로 계속 쳐다볼 뿐이다.


돈가스가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바삭한 돈가스와 케첩과 마요네즈가 적당히 뿌려진 촉촉한 양배추, 포실포실한 감자를 노릇하게 튀겨낸 프렌치포테이토까지… 그 좋아하는 돈가스가 얼마나 맛있는 나는 그날 전혀 느끼지 못했다.


가게 안을 가득 채운 아이들 사이로 그 까만 눈동자가 계속 나를 향했고, 나는 배고프다는 사실을 잊은 채 바짝 긴장하여 그 맛있는 돈가스를 심지어 깨작거렸다.

이윽고 그 아이 무리들이 식사를 마치고 우리 테이블을 옆을 지나간다. 밤송이들과 물고기들은 가볍게 인사를 나눈다. 그 아이는 나와 물고기들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건네고 나서는 내 눈에 도장을 찍듯 작은 미소를 보내고 유유히 사라진다.


이제는 식어버린 돈가스를 보니 나는 심란하다. 알 수 없는 이 조화와 내 마음속에 뭉글뭉글 피어나는 봄기운이 좋으면서 싫고, 설레면서 부담스러워 나는 무척 혼란스러웠다.


그날 오후부터 나는 의식적으로 그 아이를 피했다. 눈을 잘 맞추지도 못했고, 그 아이 주변에는 최대한 얼씬거리지 않기 위해 무척 노력했다.


그 덕분인지 나에게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그렇게 봄은 지나 여름을 향하고 있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는 여름방학 직전에 전교생이 2박 3일로 야영을 하는 행사가 있었다.

학교에서 벗어나 야외에서 텐트를 치고 직접 식사를 조리해 먹으면서 호연지기를 기르고, 부모님의 은혜와 친구 간의 우정을 배우는 것이 목적인 전통 있는 행사였다.


사춘기 소년소녀의 여름캠프라니.. 말로만 들어도 설레지 않은가!

역시 학교는 2~3주 전부터 다시 들뜬 분위기가 스멀스멀 차올랐고, 적극적인 일부 아이는 멤버영입에 벌써부터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성 간의 관심이 유별난 시기기도 했지만, 선후배 간의 날 선 대립도 유별난 시기였다.

불필요한 마찰을 줄이기 위해 야영장소는 학년별로 구분하여 텐트를 꾸리고, 마지막 캠프파이어만 같이 하는 걸로 정리가 됐다.


학년 위의 선배오빠를 좋아하던 친구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야영장에 비밀 데이트코스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아이들은 각자 그날의 이벤트를 소리 없이 준비하는 낌새였다.


여름이라고 하지만 야영을 하는 것은 녹록지 않았다. 나무 그늘 아래서도 땀을 뚝뚝 떨어졌다.

뱀이나 벌레가 들어올 수 있고 갑자기 비가 쏟아질 수도 있기에 텐트 담당인 나는 주변에 배수로의 깊이를 충분히 내고, 벌레약을 넉넉히 뿌려둔다.


한여름의 노동으로 땀범벅이 된 나는 샤워를 하기로 하고, 나머지 친구들은 저녁식사를 준비하기로 한다. 흘깃 그 아이 쪽을 보니 땀을 뻘뻘 흘리며 텐트에 방수천막을 씌우고 있었다.

엉망이 된 몰골을 들키지 않기 위해 수건을 뒤집어쓰고 종종걸음으로 샤워장을 향한다. 야영장의 모든 시설은 한결같이 불편하고 낯설었다. 찬물에 이가 딱딱 부딪히지만 따뜻한 물은 없다. 입술이 새파래진 채로 머리카락에 물을 뚝뚝 흘리며 나오니 샤워장 밖에 그 아이가 서 있었다.


이런.. 민망함에 얼른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아낸다.

몸에 느껴지는 한기로 봐서는 아직 입술은 새파랄 것이고, 팔과 다리에는 닭살이 돋아있다.


그 아이도 막 샤워를 마쳤는지 머리가 젖어있다.

나와 거리가 가까워지자 작은 미소를 띠며 말을 건다

“추워? 엄청 추워 보인다. 아까 텐트칠 때는 땀을 뻘뻘 흘리더니.. 하하”

“추워 죽을 것 같다. 여기서 뭐 해?”

그 아이가 웃는다.

“그냥… 이거 줄까? 안 입은 옷이야.”

그 아이는 자기의 셔츠를 건넨다. 섬유유연제 냄새가 바람에 실려온다. 그 아이처럼 부드럽고 깨끗한 향이다. 잠깐을 망설인 나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셔츠를 받아 어깨에 걸친다.


그 아이와 나란히 걷는다. 할 말이 많을 것 같지만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조용한 숲길에 저벅저벅 우리들의 젖은 슬리퍼의 찰진 마찰음이 조심스럽게 퍼져나간다.


“애들이 이따가 저녁에 너네 조랑 같이 밥 먹고 놀기로 했다더라.”

그 아이는 나를 쳐다보며 말을 건넨다. 옆얼굴로 그 까만 눈동자가 느껴져서 나는 또 얼굴이 빨개질 것 같다.


“그래? 맛있는 거 많이 갖고 와라.” 나는 앞만 바라보며 씩씩하게 대답한다.

피식. 그 아이가 웃는 소리가 들리지만 모른 척한다.


그 아이와 내가 나란히 샤워를 마치고 오자, 예민한 사춘기 소년소녀들은 얼레리꼴레리 일발장전을 취한다. 이럴 때는 무심하게 대처하는 게 수줍어하는 것보다 사태진정에 빠르다는 걸 알기에 나는 무표정으로 눈을 내리깔고 얼른 텐트 안으로 피한다.


이미 나는 제정신이 아니다. 텐트 안에서 주저앉아 심호흡을 한다. 어깨에 걸쳐진 그 아이의 셔츠에서 섬유유연제 냄새가 기분 좋게 내게 스며든다. 심장은 심하게 요동치고, 도통 진정이 되지 않는다.


쓰윽하고 텐트 지퍼 여는 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니 친한 친구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살핀다.

“묻지 마. 아무것도 아무 일도 없음! 배고프다. 밥은 멀었어?”


친구는 그래봤자 소용없다는 표정으로 날 한번 노려보더니 밖으로 다시 나가려고 텐트문을 향하다 다시 돌아서서 내게 묻는다.


“너도 좋아하는 거 아냐? 쟤는 확실한 거 같은데..”


나는 귀찮은 표정을 지으며 짜증을 낸다. “배고프다고!”

친구는 웃으며 밖으로 나가고 이윽고 방음이라고는 1도 안 되는 텐트 밖에서 소녀들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와 탄성이 흘러들어온다.


지난번 돈가스 가게에서처럼 나는 저녁밥의 맛을 느낄 수 없었다.

돗자리를 깔고 둘러앉아 먹는 저녁은 진수성찬은 아니었지만 제법 그럴싸했고, 소년소녀의 핑크빛 설렘이 여름밤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러나 내 신경은 오로지 오른쪽 대각선에 앉아있는 그 아이에게 쏠렸고, 의식하지 않는 척 몹시 의식하며 연기했다.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되며 내가 걱정하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샤워장 사건을 계기로 소녀들은 그 아이를, 소년들은 내게 초반 질문공세를 펼쳤다.

좋아하는 아이가 이 자리에 있냐, 이상형이 어떻게 되냐 따위의 질문을 퍼붓더니 끝내 그 아이 이름에 들어가는 영문 이니셜에 ‘H’가 있냐는 빤한 질문을 내뱉고야 만다.


나는 이제 심장이 머리까지 올라온 것처럼 뇌까지 쿵쾅거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마에서는 열이 나는지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이다.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지만, 그런 마음보다 더 큰 크기의 마음으로 나는 그 아이의 대답이 궁금해진다.


소년소녀의 기대에 찬 눈동자들이 그 아이를 향하고 있다.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이윽고 그 아이는 큰 결심을 한 듯 단답으로 대답한다.


“YES..” 그와 함께 그 아이 얼굴도 빨개진다.


“와아~” 아이들의 탄성이 터져 나온다. 다음은 뻔하다. 이제는 아이들은 나한테 시선을 모으고 같은 질문을 던진다.


“너 좋아하는 사람이나 관심 있는 사람 이름에 H가 들어가 있어?”


아마 우리 반 남자아이들 중에 이름 영문이니셜에 H가 들어가는 건 그 아이뿐이었을 것 같다.

나는 대답을 망설인다. 그 아이는 눈을 내리깔고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하다.

나는 계속 대답을 하지 못한다. 아이들이 재촉하지만 나는 끝내 대답을 하지 못한다.


평소 발랄하고 당찬 나였지만, 이제 막 눈뜨기 시작한 이성에 대한 영역은 미지의 세계였고, 이유 없이 수줍었고, 떠벌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어 나는 고집스레 입을 다물었다.


대답하지 않은 벌칙으로 야영장 입구 슈퍼마켓에 다녀오기로 하고 나에 대한 공격은 그쯤에서 멈춘다. 이제 핑크빛 큐피드의 화살은 다른 아이들을 조준하고 있다.


나는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회비를 챙겨 일어선다. 그때 그 아이가 벌떡 일어선다.

“나도 같이 다녀올게.” 그 말을 내뱉고 황급히 일어서서 먼저 가버린다.

아이들은 입을 모아 ‘오우~’라며 놀리기 시작했고, 나도 황급히 운동화를 신고 그 아이 뒤를 따른다.

우리의 뒤를 향해 아이들의 짓궂은 야유가 한참이나 들린다.


차츰 그 놀림에서 멀어지고 한적한 숲길을 그 아이와 걷는다.

우리는 아무 말이 없이 조용히 걷기만 한다. 여름밤 풀벌레 소리가 정적을 깬다.

매우 다행이라 생각하는 순간 벌레 한 마리가 파닥거리며 얼굴을 스친다.

‘으악’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 물러서자, 그 아이가 재빠르게 벌레를 손으로 쫓으며 나를 살핀다.

그 아이가 날 보더니 씨익 웃는다. 이렇게 웃는 건 반칙이 분명하다. 너무 멋있지 않은가. 뭔가 내가 지고 있단 생각이 든다. 이건 불리한 게임이다.


다시 가던 길을 간다. 그 아이의 시선이 느껴진다. 여름밤 그 아이가 음성이 바람을 타고 풀벌레 소리를 넘어 내 귀에 다다른다.


“넌 어떤 음악을 좋아해? 난 요즘에 보이즈투맨 듣는데.. 너무 좋더라.”

보이즈투맨? 뭐 하는 애들인지 나는 모른다. 내가 되묻듯 그 아이를 쳐다보니 다시 미소 짓는다.


“미국 가수야. 흑인 4명인데 R&B라는 노래를 부르는데,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노래를 부를 수 있지 그런 생각이 들어. 넌 그런 노래 들어봤어?”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그 아이는 호기롭게 얘기한다.

“다음에 내가 들려줄게. 그럼 넌 뭘 좋아해?”


그럼 넌 뭘 좋아해.

두고두고 잊지 못할 그 질문에 3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왜 대답을 그 따위로 했는지 모르겠다.


“나? 난 얼룩말.”


“응?”


그 아이는 상상도 못 한 답을 들었다는 듯 날 잠깐 쳐다보더니 풀벌레가 놀라 날아갈 정도로 크게 웃는다. 웃다가 멈추다가 다시 웃는다.


“야, 너 정말 재밌다. 얼룩말이라.. 태어나서 처음 들어봐. 얼룩말이 좋다는 사람.”


나는 부끄럽기도 하고 민망해서 화를 내려고 그 아이 쪽을 홱 돌아본다. 그러나 나는 화를 내지 못한다. 그 아이는 그 까만 눈동자와 마주치자 그 말이 놀림이 아니라 고백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시 심장이 쿵쾅거린다.


“근데, 생각해 보니 얼룩말이 멋있긴 하다. 뭔가 특별해 보이기도 하고.. 이젠 나도 얼룩말이 좋아질 것 같아.”


고백 같은 그 아이 말이.. 내 바보 같은 대답을 이토록 멋있게 받아주는 그 아이의 말이 여름밤의 짙은 나무냄새와 흙냄새와 함께 내게 새겨진다. 그 아이의 섬유유연제 향이 코끝을 스친다.


“난 그래서 줄무의 옷도 좋아해. 얼룩말을 좋아해서 줄무늬가 좋은지, 줄무늬를 좋아해서 얼룩말을 좋아하는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렇게 됐어.”


또다시 그 아이 웃음소리가 들린다. 밤하늘 별이 지금 여기로 내려와 팡 팡 소리를 내며 우리 주변에서 터지는 것 같다. 온 사방이 은빛의 아름다운 별가루로 가득했고, 그 아름다운 한여름 숲길에서 그 아이가 별같이 웃고 있었다.


별은 땅으로 내려와 쉴 새 없이 폭죽을 터트리고, 별가루가 된 별들은 그 아이의 주변을 맴돌며 반짝반짝 빛나 나는 이 밤 정신을 차리기 어려운 황홀한 마음이 든다.


“너 만화에 나오는 사람 같다.”


처음 보는 그 아이의 장난스러운 표정이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그 아이는 싱글거리며 나랑 닮았다는 만화캐릭터들을 줄지어 소환했고, 나는 인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으며 화를 내면서도 계속 웃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이유 없이 자꾸 웃으면서 그 여름밤 숲길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었다.


두 번째 밤에는 학교 전체 캠프파이어와 반 장기자랑이 있는 날이었다.

이미 벙거지와 금테안경으로 한껏 꾸민 아이들의 ‘난 알아요’ 커버무대가 팀을 바꿔가며 계속 반복됐지만 서태지 마법에 걸린 우리가 아닌가! 들어도 들어도 그 노래에는 뜨거운 환호가 지치지 않고 계속됐다.

기타 연주를 멋있게 하는 2학년 남자선배에게는 즉석 팬클럽이 생겼고, 브레이크 댄스를 잘 추던 1학년 남학생들은 단숨에 전교생의 스타로 등극하며 누나팬들의 러브콜을 받았다.


계획된 무대 말고 이제는 선생님께서 분위기에 맞춰 그 자리에서 장기자랑 신청을 받았다.


역시나 흥이 많은 사춘기 아이들의 춤, 노래가 이어지며 여름캠프 마지막 밤 즐거운 한때가 무르익고 있었다.

여름밤의 열기와, 청춘의 흥이 더해진 그 시절 우리들은 잘 익은 자두처럼 다들 붉고 물기 가득한 얼굴로 눈부시게 웃고 있었다.


그때 그 아이가 무대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가는 게 보였다. 그 아이는 잠시 속삭이듯 선생님께 설명을 드렸고, 전교생이 그 아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 설명 없이 그 아이는 선생님의 마이크를 건네받았고, 선생님은 기타연주를 하던 2학년 선배에게 기타를 빌려 연주자세를 취했다.


아주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마이크를 통해 이제 막 변성기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듣기 좋은 미성의 그 아이 목소리가 캠프를 채우기 시작한다.


“이 세상 살아가는 이 짧은 순간에도 우린 얼마나 서로를 아쉬워하는지..”


그 아이는 수수한 옥스퍼드 셔츠차림으로 담담하게 서태지가 아닌 신해철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벙거지와 금테안경이 넘쳐나는 시대에 그냥 셔츠를 입고 당당히 무대에 서서 자기 목소리 하나만으로 그 공간을 채우는 그 아이에게서 나는 눈을 뗄 수가 없다.


조용한 모범생이 무대에 서서 그것도 썩 괜찮은 소리를 노래를 부르니 모두들 집중했고, 무대가 끝나기 무섭게 뜨거운 박수가 이어졌다.


그 아이는 수줍어하면서도 정중하게 인사하고 자리로 돌아갔고, 그 아이의 모습을 보며 기타 연주를 해주시던 선생님이 짓궂은 미소로 한 말씀을 거든다.


“좋아하는 친구를 위해 부르는 세레나데라네. 야 그 친구는 좋겠다. 용기 낸 우리 친구를 위해 모두 박수 한번 더 보내주자!”


와아~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아이에게 박수가 한번 더 쏟아졌고.. 내 주변에 있던 친구들은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낸다.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시선을 돌리는 것으로 그들의 호기심에 대답한다.


그 아이와 눈이 마주친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나도 미소를 지으며 그 아이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 아이는 또 별처럼 그렇게 웃고, 그렇게 웃을 때마다 내 주변에는 팡팡 별 폭죽이 터졌다.


이윽고 캠프파이어의 절정, 촛불의식이 있었다. 전교생이 촛불을 하나씩 켜 가면서 미래의 꿈을 다짐하고, 친구들과 우정을 더하는 시간이었다. 모두의 촛불에 불이 켜지면, 오글거리고 간지럽지만 캠프파이어를 하면 그래도 불러야 하는 노래 한두 곡을 떼창 한다. 그리고 각자 이동하면서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과 대화하며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방식이다.


그렇다. 당신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 아이가 촛불 때문에 더 반짝거리는 검은 눈동자를 내게 고정하고 성큼성큼 걸어온다.

주변은 온통 촛불을 든 아이들이 이리저리 자신만의 로맨스를 찾아다니느라  마치 거대한 반딧불이들이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들고 있던 촛불 때문에 그 아이의 눈이 주황빛으로 일렁일렁 거린다. 아마 내 눈빛도 그러리라.

그 아이는 나를 보더니 피식 웃는다. 팡팡 또 별이 터진다.

“줄무늬 입었네. 얼룩말처럼..”

그렇게 말하고 그 아이는 손에 들고 있는 초를 내려다보며 엷게 미소 짓는다.


“너 노래 잘 부르더라. 재능이 많네.”

우리를 감싸고 있는 일렁거리는 공기 때문에 멀미가 날 것 같아 나는 참으로 멋없이 침묵을 깬다.


“잘 들렸구나. 다행이네.”

뜻 모를 엷은 미소와 약간의 실망감이 그 아이의 얼굴을 맴돌다 사라진다.


여름캠프가 지나고 한동안 캠프발 로맨스가 아이들의 주요 가십거리였다. 그 가십에는 그 아이와 나도 종종 오르내렸지만 더 이상의 아무 일도 없었기에 이내 아이들의 관심에서 우리는 잊혀진다.


그렇게 여름방학이 시작됐고, 사춘기의 여름은 참 더디고 더디게 흘러갔다.

제발 시간아 빨리 좀 흘러라 하고 주문을 외워도 소용없었다.

가끔씩 밤하늘에 뜬 별을 보면 그 아이가 생각났지만, 뭐 개학하면 볼 텐데.. 지금쯤 음악 들으며 영어 단어나 외우겠지라며 훠이훠이 그 아이 얼굴을 떨쳐냈다.


아직 여름의 열기가 남아있던 개학날, 나는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그 아이를 눈으로 가장 먼저 찾아본다. 언제나 그렇듯 뒷자리에서 워크맨을 만지작 거리며 이어폰으로 음악을 조용히 듣고 있다. 그 모습이 평화롭고 나른하다.

곧이어 밤송이들이 근처로 몰려와 그 아이를 툭툭 치며 장난을 걸고, 그 아이도 웃음으로 받아치며 이어폰을 빼고 밤송이들과 즐겁게 대화를 나눈다.


그날 그 여름밤에 하늘에서 반짝거렸던 별과 그 아이의 웃는 모습이 오버랩된다.

별처럼 웃는 그 아이에게 나는 자꾸만 눈이 간다.


낮은 이제 점점 짧아져서 학교 남아 학급일을 거들거나 특별활동을 하는 날이면 어둑어둑 노을이 지곤 했다. 그런 날은 여지없이 그 아이를 만났다. 자기도 마침 늦었다면서 자전거를 타지 않고 나와 함께 걸으며 끌고 갔다.


요즘 듣는 음악얘기, 선생님들 얘기, 학교에서 생긴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웃기도 하고 장난도 치면서 나는 그 아이와 점점 친해졌다. 그렇게 가을은 깊어갔다.


가끔씩 내 책상엔 라디오에서 나온 음악을 녹음한 카세트테이프가 놓여 있었고, 나는 처음으로 그 아이 덕분에 보이즈투맨의 노래를 들었으며, 역시 그 아이처럼 그들의 음악을 좋아하게 되었다.


학교를 오가면서, 가끔은 내 방 창문을 열고 밤하늘을 보면서, 그 음악을 듣노라면 여지없이 그 아이의 까만 눈동자와 별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 녀석이 이 노래에 무슨 주문을 걸어놓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아이가 자꾸 생각났다.


그 가을 우리는 좀 더 친해졌고, 좀 더 많은 것을 나눴고, 좀 더 서로를 좋아하게 됐다.


그즈음 학교와 시골마을을 뒤흔드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1학년 여학생이 2학년 남학생들에게 집단 성추행과 성폭행을 당하는 초유의 사건으로 학교에는 경찰차가 자주 보이기도 했고, 학부모들의 불안한 전화가 계속되기도 했다.


피해자 여학생은 나와 한 동네에서 자라고 같은 국민학교를 나온 아이라, 그 동네출신의 딸을 둔 보님들의 충격은 생각보다 더 대단했고, 나는 전학이라는 초강수의 결정을 맞닥뜨린다.


여자중학교라 더 안전하고, 지금 동네보다 큰 도시니 학업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부모님 설득에 나는 ‘역시 사람은 큰 물에서 놀아야지’라고 생각한 스스로를 장하게 생각하며 흔쾌히 동의했다.


그렇게 나의 전학은 일사천리로 진행됐으며, 친한 친구조차 전학을 앞둔 얼마 전에 알 정도로 갑작스럽기도 했다.


나의 전학이 공식화되던 날 나는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그 아이를 만난다.

나를 기다린 듯 그 아이는 학교 앞 버드나무 아래에 자전거 발을 괴어놓고 서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그 까만 눈동자가 동요한다.

 

“너 전학 가는 게 사실이야?”

“응 그렇게 됐어.”

“언제 그렇게 됐는데?”

“한 달 반쯤 됐나..”

그 아이의 검은 눈동자에 살짝 물기가 비치는가 싶더니 이내  단호한 노기가 떠오른다.


“그렇구나. 이미 오래전에 그렇게 된 거구나.”

그 아이는 한 음절 한 음절 힘을 주면 누르듯 말한다.


“그래 알았어. 전학 잘 가라.”

그 아이는 거칠게 자전거 발을 걷고 선채로 힘을 주면서 페달을 꾹꾹 밟아 나에게서 금세 멀어져 버린다. 성난 황소처럼 자전거를 타고 내 시야에서 멀어져 가는 그 아이를 보니 나는 그제야 그 아이와의 이별이 실감 난다.


그렇게 제대로 이야기도 해보지 못하고 나는 마지막 날을 맞이한다.

담임선생님께서 앞으로 나와 작별인사를 하라고 나를 불러낸다.


‘울지 않으리라. 이럴 때 우는 건 정말 촌스럽고 구질구질한 거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아이들 앞에 서서 덤덤하고 씩씩한 목소리로 작별을 고한다.

주절주절 잘도 떠들어대던 나는 의식적으로 피했던 그 아이 자리를 기어코 보고야 만다.

고개를 살짝 수그리고 책상 위 깍지 낀 손을 보던 아이는 곧이어 창밖으로 눈을 돌린다.


주절주절 그 긴 시간 동안 그 아이는 고집스럽게 창밖을 쳐다볼 뿐 나를 보지 않고 나의 얘기를 듣지 않는다. 그렇게 나의 마지막 인사가 끝났고.. 나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부모님과 함께 그 학교를 영영 떠났다.


그 이후에 나는 딱 한번 그 아이를 보았다.

고등학생이 된 그 아이는 여전히 별 같은 눈동자와 품위 있는 태도가 베인 채로 잘 크고 있었다.

그러나 분명히 보았을 나를 그 아이는 끝끝내 눈조차 맞추지 않았고, 그렇게 냉랭한  뒷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그 아이의 마지막 모습이다.


신해철과 보이즈투맨을 들으면 나는 아직도 여름밤 별같이 웃던 그 아이가 생각난다.

이제는 멋진 신사가 됐을 그 아이를 다시 우연히 만난다면 그 아이는 예전처럼 나에게 웃어줄까, 아니면 내게 눈빛조차 보내지 않고 차갑게 외면할까.


그 시절 우리는 매일매일 꿈꾸고, 매일매일 자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어렸다. 적어도 나는 상대의 마음을 충분히 감싸줄 정도로 성숙하지 못했다.


그 아이는 꽤 오랫동안 나를 원망했겠지만, 나 역시 그 아이가 나에게 걸어놓은 마법으로 꽤 오랫동안 미안해하고, 후회하고, 그리워했으니 지나고 보면 나도 역시 아프긴 마찬가지였다.


그해 여름 우리는 촛불처럼 일렁이는 작고 소중한 마음에 설레고 행복했지만, 아직은 서툴렀기에 주저하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했다.


그러나 나의 소녀시대 미완의 로맨스를 안겨준 그 아이에게 이제 나는 고맙다는 말을 제일 먼저 하고 싶다.


너로 인해 내 사춘기가 메마르지 않았다고..

네가 준 테이프가 늘어져 더 들을 수 없을 때까지 나는 계속계속 플레이 버튼을 누르며 때로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서러움에 아이처럼 울며 위로를 얻었고, 세상에 혼자 남겨졌단 생각이 드는 날이면 너를 그리워하며 따뜻해지기도 했었다고..

그렇게 너로 인해 나는 촉촉하게 건강한 습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네 덕분이라고.


나의 소녀시대. 너의 소년시대

그해 여름 우리의 시절은 뭐가 그리 수줍은지 맑은 얼굴에 풋풋한 홍조를 띠며 서로 마주하고 있다.

심장은 터질 듯 쿵쾅거리고, 너와 나는 세상 그 무엇보다 반짝거린다.


그해 여름은 아직도 내게는 생생히 살아있다. 그때의 우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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