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자의 실력_1 >
한 번의 제안서 작업에 석 박사 학위 논문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신의 학회 및 학술지 논문을 최소 이십 개 이상 검색하여 도움이 될 만한 이론적 배경이나 연구 결과를 찾아내어야 한다. 논문을 그대로 인용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 연구자가 선행으로 연구한 방법에서 이론적 준거나 기술, 참고한 서적들을 알아보라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메타버스 관련 IT 학술지 논문에서 스테가노그래피(Steganography)라는 연구를 예로 들었다고 하자. 스테가노그래피는 그리스어로 stegano(감추어져 있다)와 graphos(쓰다, 그리다)가 결합된 단어인데 현대에서는 디지털 파일의 저작권 보호 용도로 쓰여지는 디지털 워터마크(Digital Watermark)등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스테가노그래피(Steganography)’는 숨기기의 예술이자 과학이라 할 수 있으므로 이 고전적 기술을 전시에 응용할 방법을 찾는 것이다. 원하는 전시공간에 스테가노그래피를 활용한 공간적 약호(Spatial codes)를 심어놓고 감춰진 글이나 비밀 메시지를 준다고 가정해 보자. 전시공간에 실제로 가져올 수 없는 콘텐츠가 얼마나 많은가.
다음의 지리산역사문화관에서는 보이는 지리산이 아닌 보이지 않는 지리산, 볼 수 없는 지리산에서 파생되어 발생한 것들을 보이는 비밀로 포장하고자 하였다. 새로운 사실은 아니지만 마치 새로운 신비를 알아나가듯 관람의 만족을 더하는 기법으로 적용하였다. 스테가노그래피처럼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된 학문적 용어이면서 누구나 다 알지는 못하는 기술을 우리가 제안해야 할 주제와 공간 속에서 적용시킬 경우 연구자의 전문성이 느껴진다. 여기서 우리는 1차적으로 스테가노그래피라는 용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그다음 검색을 통해 다양한 활용방법도 찾을 수 있는 것. 이처럼 내가 알지 못했지만 파생력이 큰 힌트 하나를 찾아 그것을 실마리 삼고 일을 진행해 나가다 보면 하는 사람도 재미있고, 듣는 사람도 새롭다.
이번엔 뮤지오그라피아이다.
뮤지올로지(Museology)가 기존의 박물관학이라면 뮤지오그라피(Museographia)는 박물관 기술론에 방법론을 더한 것이다. 사료전시관은 대개 기승전결 하나의 이야기를 일대기, 연표, 사건위주로 전개하는 연대기적 표현방법을 사용한다. 하지만 점점 유물의 역사적, 미적, 물리적, 정신적인 가치를 파악하고 당시 배경과 환경을 분석한 후 가장 적합한 전시환경을 조성하도록 연대기적 전시기법을 탈피하는 추세이다.
박정희대통령역사자료관에서는 대통령의 수많은 유품을 연대기적 전시로 연출하지 않고 독립적인 이야기로 구분해 전시하고자 하였다. 연대기가 아닐 경우에는 주제, 연출, 스토리가 더욱 체계적이어야 관람객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왜 이런 이야기는 없지, 하며 의문을 가지기 쉽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이야기는 테마별로 나누면 문제 될 것이 없으나, 그렇게 해야 더 효과적이라는 분명한 논리와 이론이 필요했다. 하여 뮤지오그라피적 전시의 전제조건인 공간성, 역사적 가치, 자료의 성격, 상황의 재현성을 분석하고 주제별 독립적인 이야기를 옴니버스식으로 구성해 보았다. 주제는 대통령의 일대기를 분석하여 사람, 성과, 시기, 정서, 국민으로 나누고 유품 분류 기준을 재설정하였다. 박정희대통령역사자료관은 일반적인 박물관이 아니라 재임기간 동안의 소품과 기념품, 유품을 총 망라하여 그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중요했다.
물론 뮤지오그라피아 기법을 도입하지 않고 몇 가지 테마를 임의로 정한다 한들 문제 될 것은 없다. 하지만 비슷하면서도 정리 안 된 유품들을 뮤지오그라피아 기법을 적용했더니 더욱 우리가 제시하는 틀 안에서 스토리텔링하기 효과적이었다. 이 결과물에 누구도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시뇨그래피(scenography)는 무대미술의 개념이다. 연극의 공간과 무대구성에 관한 기술을 말한다. 시뇨그래피를 통해 연출된 장면은 영화에서 미장센과 동일한 의미이다. 전시에서 시뇨그래피를 적용할 때 시간과 공간, 극적인 행동이 시각적으로 표현되며 관람객은 한정된 공간에서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특별한 기억을 저장할 수 있다. 디오라마는 배경이 되는 풍경과 축소모형으로 특정한 상황을 연출, 구성하는 대표적인 전통적 전시매체이다.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은 리노베이션 하면서 하이라이트가 되는 킬링전시 제안이 필요했다.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공룡 전시물이 그 대상이었다. 여기서 떠올린 영화는 다름 아닌 쥐라기파크였다. 공룡은 공룡끼리만 있을 때보다 사람이 함께 하면 이야기가 풍부해진다.
이에 공룡을 주인공으로 보고, 고고학자를 조연으로 하여 마치 극적인 발굴의 현장인 듯 극장식 무대를 연출하고 당시 배경을 연상하며 상상할 수 있는 디오라마(Diorama)를 복합 구성해 보았다. 우리는 시뇨그래피의 특성과 디오라마의 소통방식을 융합해 이를 시뇨라마 스테이지(scenorama stage)로 제안하였다. 리노베이션 하면서 가장 큰 미션에 해당하는 하이라이트 공간에 드라마틱한 킬링 전시를 연출하고자 빌려온 이론이었다.
스테가노그래피, 뮤지오그라피아, 시뇨그래피 모두 전시와 인접한 학문에서 오래 언급되던 용어들이다. 우연의 일치지만 어미로 붙은 그래피, 그라피아는 시각적인 표현을 의미한다. 박물관은 상업적 흥행전시 및 비상설 전시와는 다르게 교육적 목적이 우선시 된다. 전시연출 방법 또한 무조건 최첨단 매체만을 활용하지 않고, 유물을 비롯한 전시물 및 전시콘텐츠의 특성에 따라 체계적인 전달이 고려되어야 한다. 전시는 종합예술이지만 산업군의 특성상 인접학문과 경계를 두지 말고 융합적인 연구가 필요한 장르이다. 이미 알려진 이론이지만 우리 공간에 가져와 전략이든 연출이든 적절하게 응용할 수 있는 기획자가 이 시대를 이끌어나가는 하이브리드 실력자 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