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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겁쟁이 선비 Jan 06. 2023

서른 비망록

서른은 안녕하신가요?



1. 서른

세는 나이 서른에서 만 나이 서른으로 매년 기록된 나의 삶의 역사가 어느새 계란 한 판을 가득 채웠다. 나에게는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았던 서른, 진짜 어른으로만 여겨져서 나와는 상관없을 듯싶어 멀찍이 관망했던 그런 서른이 찾아왔다. 피할 수 없음에도 피하고 싶었던, 진지하게 마주할 용기가 부족해서 마냥 잊어버리려 노력했던, 그런 서른이 찾아왔다. 그럭저럭 이리저리 흘러가는 대로만 살다가 나는 너무나도 낯설게, 사뭇 어색하게, 자신의 서른과 마주하게 되었다.


주저리 주저리 서른을 묘사한 이유는,

그다지 안녕(安寧)하지 못한 서른이 맘에 썩 들지 않아서다.






2. 사례 (1)

1여 년 전부터 체력과 체형관리의 필요성을 느끼고 퇴근 후 매일같이 다니고 있던 복싱 체육관에 같이 운동하며 친하게 지내는 초등학생 어린이 친구가 있다. 오가며 꾸벅꾸벅 모든 관원들에게 허리 숙여 최대한 예의 바르게, 정말 반갑게 인사하는 체육관의 귀염둥이. 내년에 드디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는 그 아이에게 운동하다가 나는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OO이에겐 나는 삼촌이에요? 아저씨예요?"


"혀....ㅇ"이라고 말하려다 입술을 앙다물고 잠시 고민에 잠긴 그는

"삼촌과 아저씨 그 중간 어디인 거 같아요"라고 답했다.


그러자 옆에서 그 대답을 듣던 관장님이 덧붙였다.

"남자들은 군대 갔다 오면 다 아저씨야~.

군인 오빠, 군인 삼촌이라고 안 부르고, 다 군인 아저씨라고 하잖아~."


나는 아저씨가 된 걸까?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나는 어렴풋이 '아저씨'가 보편적으로 기혼 남성을 의미하는 단어인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찾아봤다.


표준국어대사전이 정의하는 아저씨는

1. 부모와 같은 항렬에 있는, 아버지의 친형제를 제외한 남자를 이르는 말.
2. 결혼하지 않은, 아버지의 남동생을 이르는 말.
3. 남남끼리에서 성인 남자를 예사롭게 이르거나 부르는 말.
4. 고모부나 이모부를 이르는 말.


성인 남자를 예사롭게 이르는 말이니 나는 3번의 정의에 해당되겠지.

반드시 기혼 남성을 아저씨라고만 부르는 건 아닌 셈이다.






3. 사례 (2)

얼마 전 있었던 사촌 여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부모님과 걸어가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도중,

나는 위에 있던 체육관에서의 일화를 꺼냈다.


"나는 내가 아저씨인 거 인정해."

내가 전혀 쿨 해 보이지 못한 뉘앙스였는지 엄마와 아빠는 냉소를 보내왔다.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하는데 마음은 그렇지 못한 것을 보면, 여전히 내가 아저씨인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적 자아의 갈등이 은연중에 얼굴에 드러나는 것 같다.)


"그래서 엄마랑 아빠도 할머니, 할아버지야. 엄마 친구들이랑 아빠 친구들은 다 손주를 보았으니 연배로도 할머니, 할아버지고 아빠는 국민연금을 받는 나이에 지하철도 공짜로 타니까 할아버지지."


"그리고 아들이 이제 아저씨라 엄마랑 아빠는 할머니, 할아버지야."

그 말에 횡단보도를 건너던 부모님은 큰 웃음을 터뜨렸다.






4. 배경

서두에 명시했던 '그다지 안녕(安寧)하지 못한 서른'은 딱히 위의 사례 때문은 아니다. 성숙하지 못한 나의 자아가 신체나이와 주변의 환경변화를 따라잡지 못해서 오는, 그 괴리에서 비롯된 뒤숭숭한 감정에 기인한 것이다. 이를 좀 더 상세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전반에 대한 배경설명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2022년 연초에 유튜브 '슈카월드' 채널에 '늙어가는 사회, 늙어가는 문화'라는 제목의 영상이 업로드되었다. 2020년 기준 대한민국의 중위연령은 43.7세. 실제로 2010년대에 들어서 각종 플랫폼 다수의 콘텐츠들이 향수에 젖은 레트로와 과거를 소재로 했던 바 있고, 오프라인 공간 역시 힙의 성지로 꼽히던 대부분의 플레이스가 레트로를 테마로 삼았다. 심지어 4세대 주요 걸그룹 중 하나인 뉴진스의 브랜딩은 Y2K가 메인 컨셉이다. 여전히 식지 않는 인기를 자랑하는 포켓몬빵과 띠부띠부씰 역시 이를 뒷받침하는 문화적 근거다. 최근 2~3년 사이의 트로트 열풍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방송 콘텐츠가 전 세대의 공감을 샀다는 부분에서.)


즉, 시장과 콘텐츠가 초개인화 사회로의 진입과 더불어 파편화된 것과 별개로 소비자와 함께 나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중위연령이 증가했다는 것은 곧 주력 소비계층의 나이 역시 비례해서 증가했다는 뜻이다. 당연히 마켓은 이에 발맞추기 위해 그들의 눈높이에 맞는 상품들을 내놓을수밖에 없다. 물론 넓은 세대를 아우를수록, 타겟팅이 광범위할수록 수익이 극대화되기 때문에 매출 확보를 위해 나이별로 적합한 매체를 골고루 집행할 수 있겠지만, 정작 핵심 테마나 소재는 연령대가 증가한 주요 고객의 입맛에 맞춘 것들이다. 이것들이 최근 입맛이 다양해진 젊은 세대(Gen. Z와 알파세대 등)에게도 주효했기에 확장성을 가지고 대세가 된 것이지, 실상은 슈카월드가 지적한 것처럼 대한민국 사회가 나이 들어간다는 것(*문화의 중심이 중위연령 중가와 더불어 20~30대 후반으로 옮겨가고 있는 현상)이다.






5. 인과

그렇다면 이런 사회전반의 배경(*나이 들어가는 사회)과 나의 '그다지 안녕(安寧)하지 못한 서른'은 무슨 인과관계가 있을까? 답은 앞서 언급한 배경처럼 신체나이가 증가함에도 사회적 연령의 노령화로 생애주기가 늦춰져 여전히 어린 자아에 머무르고 싶은 '어른이'가 허용되는데, 나의 모든 주변환경이 그 속도에 맞춰주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딱 그 괴리에서 비롯된 뒤숭숭한 감정이 나를 뒤쳐지게 만들고, 그 불안이 나를 안녕(安寧)하지 못하게 한다.


불과 20~30년 전만 하더라도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면 가정을 꾸리고 독립하는 시기였다. 각종 방송사 채널을 포함한 유튜브 등지에서 보이는 과거 아카이브 영상만 봐도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사람들은 번듯하면서 어른스러운, 특유의 중후한 인상을 가지고 있다. 특히 현재와 모든 것이 다른, 이런 과거의 사실과 경험에 기반한 어른들의 판단 잣대가 나에게 드리워졌을 때, 저 심오한 감정이 나를 뒤덮어 어지럽게 만든다. 난 아직도 어린아이 같은데... 전혀 성장하지 않은 것 같은데... 심지어 문득문득 사무실 책상에 앉아서 업무를 하고 있는 나 자신이 낯설게 느껴질 때도 있다.


아무리 개인화된 사회라지만, '나는 나, 너는 너'라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지라 타인으로부터 완벽히 분리될 수 없다. 그렇기에 자신과 관계맺는 가족, 이웃, 친구, 공동체,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어른들의 판단 잣대가 조언이라는 이름으로 간섭할 때, 나를 타자화시키게 되면 어린 자아와 생각은 현재 모습과의 상충으로 심란해지고 만다.


더군다나,

지역에 기반했던, 물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던 학창 시절의 친구들이 하나 둘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나며 멀어지는 관계. 그 익숙함에 안주했다가 눈을 돌려보니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 내 주변, 그리고 나 홀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말하지 못한 여러 업무와 업무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 뒤따라 오는 온갖 회의감. 더불어 '이 일이 정말 내가 잘하는 일이 맞을까? 이걸 계속 생업으로 삼아도 될까?'라는 업무 전문성에 대한 고민과 불투명한 미래상에 대한 뚜렷한 정답이 없는 의문.

'내가 나의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있는 것일까?'라는 자조 섞인 질책과 이를 인정받고 싶은 욕구의 불만족.


으레 그렇듯이 인간관계, 생업, 삶의 방향성 따위와 같은,

술자리에 늘어놓을 수 없는 시시콜콜한 이야기일 뿐인 것들이 상기한 감정을 부추긴다.


답이 정해져 있던 10대 학생에서 벗어나,

어떻게 흘려보냈는지 모를 정신없는 20대를 지나,

30대에 처음으로 답이 없는 질문과 마주한 셈이다.


그것도 자아는 성장하지 않은 채,

급격하게 변화하는 사회상, 시대상과 함께 맞이한 셈이다.

그래서 나의 서른은 '그다지 안녕(安寧)하지 못한 서른'이다.


나는 아직 봄인데 어른들에게 나는 초저녁인가 보다






6. 맺음

과거에 사는 나에겐

모든 것이 너무나 많이 달라졌다.


사회통념의 요구치와 기대치는 날로 높아져만 가는데,

그에 비해 아직 이룬 성취가 없다.


미디어에서는 마냥 괜찮다고 한다.

정말 괜찮은 걸까?


명시적인 기준이 있다고 가정하고, 이를 충족시키면 이런 불안감과 괴리감이 해소될까?

학벌은 어떻고, 재산은 얼마고, 연봉은 얼마고, 차는 어떤 모델을 타고,

서울 및 수도권 시내에 자가를 보유하며, 노후준비는 어떻게 하고 있으며,

배 안 나오는 체형에 꾸준히 운동하면서 건강을 관리하고... 체지방은 몇 %에, 키는 몇 cm이고...

이런 수치화된 정량지표가 불안감과 괴리감 해소를 담보해줄 수 있을까?


나의 서른은 왜 안녕(安寧)하지 못할까?

다른 이의 서른은 안녕(安寧)할까?


꽉 채웠다고 생각한 서른이었는데,

텅 빈 것 같은 서른인 기분은 무엇일까?


원래 서른이란 게 이런 걸까?

머릿속에 안개만 자욱이 낄 뿐이다.


나는 아직도 나의 나이를 실감하지 못한 채

인생에서 방학이 끝나버린 서른에 발을 내딛으면서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들어보지만

공감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것 투성이다.


다만 글을 적는 지금 드는 '안녕(安寧)하지 못한 서른'의 감정은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30을 로마 숫자로 표기하면 XXX가 된다.


그렇다.

나의 서른은 XXX다.


사진으로 자기객관화를 해보면 영락없는 아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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