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누구에게나 소설이다
N여중 2학년 7반의 담임은 노총각 미술 선생님이셨다.
미술과 총각, 사춘기 여학생들과 달콤한 케미가 기대되는 조합이지만, 그와 우리는 1년 동안 전쟁을 방불케 할 만큼 서로를 향해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우리는 여학생 치고 유별난 장난을 많이 했고, 그는 신경 쇠약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담임은 단체 생활에서 눈에 띄는 행동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단체가 개인을 삼켜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학창 생활에서 엉뚱 발랄함을 제거하고 무미, 무향, 무취의 건조한 교실을 만들고자 했던 담임의 큰 그림에 우리는 훼방꾼이었다. 웃고 넘어갈 일도 파헤치고 물어뜯어 문제로 둔갑시킨 후 결국 학생을 향한 조롱과 억압으로 마무리한다. 그때부터 이마가 넓고 입이 크며 마른 남자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담임은 나를 유난히 찍어 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썼는데 내가 무리의 리더라고 단정 짓기도 했지만 결코 꺾이지 않는, 한마디로 기 센 아이였기 때문이다. 어느 날, 담임이 교실로 나를 부르더니 이런 말을 했다.
“네 말은 그래도 애들이 잘 듣지 않나? 네가 내 말을 잘 들으면 애들도 따라 할 거 아냐!”
“애들이 선생님 말도 안 듣는데 친구 말을 왜 듣죠?”
몽둥이로 팔뚝 한 대 맞을 각오로 대답했는데 세 대가 돌아왔다. 어른이자 선생이라는 자의 안달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고 미웠다. 때로는 붙잡고 회유를 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너 인마, 너는 머리도 좋고 하잖아, 쟤네랑 그만 어울리고 착실하게 공부나 좀 해. 네 어머니가 불쌍하지도 않니?”
“너는 왜 그렇게 송곳 같니? 내가 너 잘 되라고 이런다. 너네 중 몇 명은 가망이 없어”
담임과의 기싸움에서 절대 지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아무리 철없는 어린아이였어도 수긍이 되는 꾸지람과 비난은 인정하며 고개 숙이는 정도의 인성은 갖추고 있었다.
9월의 어느 날 저녁, 담임은 7명 모두의 집에 전화를 걸었고 부모님께 친구들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자녀와 어울리는 친구들을 지금 떼어 놓지 않으면 후회할 거라는 졸렬한 모함이었다. 엄마는 담임과의 통화를 끓고 대소하며 그의 모략을 전해 주셨다.
“경혜는 직업 훈련원이나 구로 공단밖에 갈 데가 없다는데? 너랑 현경이는 성격 더러워서 단체 생활 못할 거 같고, 미선이는 너네 뒤 꽁무니 따라다니다 학교에서 찍혔데!”
“수현이는 집에서도 내놔서 벌써부터 아르바이트하러 다닌다는데, 진짜냐?”
“아냐~ 걔네 집 지금 공사 중이어서 이모랑 잠깐 사는데 이모일 대신 해주고 용돈 버는 거야. 선주랑 도진이 얘기는 안 해? “
“걔네는 공부만 잘하는 문제아라 오히려 더 골치가 아프시단다.”
우리 집에만 전화한 게 아니었다. 친구 어머니들 모두 같은 내용의 전화를 받으셨다. 평화로운 저녁시간에 말이다.
부모님들께서 그런 전화를 받고도 염려 없이 웃어넘긴 데에는 이유가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서로의 집을 오갔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아이들인지 엄마들은 너무 잘 알고 계셨다. 먹고살기 힘든 시절이고, 부자가 드문 서울 외곽의 가난한 동네였지만 사람 냄새나는 동네였다. 놀다 보면 밥 때 됐으니 먹고 가라며 한 상 차려 주시던 분들이었기에 우리는 서로의 엄마를 잘 따르고 친숙하게 대했다. 놀다가 늦어지면 자고 가는 날도 허다했다.
엄마들은 자식들을 믿으셨고 친구들을 편견 없이 대하셨다. 엄마들은 서로 통화도 하시기 때문에 누구보다 서로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공부를 못 하거나 때로는 엉뚱한 장난을 치고 뺀질거리더라도 15살은 예쁘게 봐줄 나이 아니던가. 진짜 삶을 채 알기 전, 꼴통 짓 조금은 해도 괜찮은 나이 15살에 우리는 적수를 만난 것이다. 여하튼 9월 어느 날 저녁에 쏘아 올린 담임의 일격은 무력했고 우리는 살아남았다.
2학년이 끝나고 3학년으로 올라가기 전, 반 배정표를 본 순간 담임과 우리의 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7명 모두 뿔뿔이 흩어진 것이다. 아홉 개의 반이건만 차례로 1반부터 7반에 넣어버린 것이다.
나는 요즘도 딸에게 종종 습관처럼 내뱉는다. 농이 아닌 진심으로 딸을 위한 당부의 말 이기도하다.
“이마 넓고 거기다 빼빼 마르고 입 큰 놈들은 절대 만나지 마. 밴댕이보다 속이 좁아. 진짜야”
회심의 반격을 가할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우리에게 와주었다. 담임의 결혼 소식이 들리는 순간 우리 7명은 약속이라도 한 듯 복도로 뛰어나가 환희의 비명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작전에 돌입했다. 눈치 빠른 전 담임은 학교 전체에 마치 우리 들으라는 듯이 학생들의 결혼식 참석 불허 통보를 했지만 그럴수록 꼭 가야만 하는 목적이 명확해졌다. 극비였지만 체육선생님과 친하게 지낸 덕에 장소와 시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예상대로 결혼식장 입구부터 학생들의 출입을 막고 있었다. 구세주는 의외로 전 담임의 아버님이셨다. 축하해 주기 위해 멀리서 온 어린 학생들을 어떻게 돌려보내나 하시며 우리를 식장 안으로 안내하셨다. 우리를 발견한 담임의 표정은 그야말로 똥 씹은 표정이었다. 말쑥한 자태로 우리를 향해 뿜어대는 경멸의 눈빛을 마주하며 나 또한 지지 않고 순진무구한 미소를 가장한 채 똑같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예식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그의 성스런 결혼식에 동참하는 것만으로도 그에게는 모욕이었을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이벤트가 있었다. 예식 사진사가 담임의 속도 모르고 제자들과 사진을 찍자는 권유를 한 것이다. 그는 단 칼에 거절했지만 하객들도 따라서 청하자 더 거절 하지도 못 하는 처지가 되었다. 한 프레임에 그와 우리가 들어가 있는 자체가 코미디였다. 담임과 우리 사이의 불협화음이 그날의 사진 한 장으로 봉인되는 기분이었다. 예식장을 나와 우리는 자주 가던 경복궁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어찌나 가볍던지 경복궁을 다 돌고 중앙박물관까지 돌아다니는 내내 나는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그간의 수모를 한 번에 되갚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10여 년이 흐르고 가수로 성공한 경혜 때문에 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mc와 친구가 함께 연예인의 학창 시절을 되돌아보는 코너였기에 오랜만에 M여중을 방문하게 되었다. 촬영 전 작가들과 인터뷰를 하는데 한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보통 연예인이 된 제자 때문에 인터뷰를 부탁하면 대부분 다 응해 주시는데 이 선생님은 끝끝내 거절하시더라고요”
단번에 누구를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역시!
딸에게 하는 당부가 그저 편협한 외모 비하가 아니다.
명심할 지어다! 큰 입과 퍼런 심줄이 올라 선 콧대, 마른 체형, 툭 티어 나온 눈, 넓은 이마, 가는 머리카락. 이중 3개 이상 이면 곤란하다.
그분이 내게 주신 큰 가르침이자 지금의 남편과 맺어진 이유다. 적당한 크기의 입, 우람한 풍채, 파인 눈, 좁은 이마의 남편은 예민함이라고 찾아볼 수 없는 두리뭉실한 사람이다.
혹시 모를 일이다. 담임도 그의 2세가 부디 우리 같은 아이가 되지 않길 간절히 바랐을 수도.
Youth Gone Wild … Skid Row
Love Shake … The B-52's
Suicide Blonde … INXS
Mad World … Tears for Fea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