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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쿰오기 Nov 17. 2024

독자의 암송과 작가의 낭독,  공간을 채우는 소리들

책방 <글 헤는 밤>에서 한정원 시인을 만나다

한정원 시인을 만났다. 양평 동네책방 <글 헤는 밤>에서였다. 양평 시내에서도 먼 양동면에 위치한 책방은 강원도 원주와 더 가깝다고 한다. 시인과의 만남은 <글 헤는 밤>의 두 책방지기의 애정과 열정으로 마련된 자리였을 것이다. 지난해 책방지기의 추천 프로그램으로 함께 한정원 시인의 《시와 산책》(2020)을 필사했다. 책을 사 두고 잊고 있던 터라 이참에 읽어야겠구나, 다짐하고 합류하게 된 기억이 난다. 실은 작년인지 재작년인지 헷갈렸는데 작년이라고 한다. 그때 아마도 여름 즈음이었을까? 날마다 산책하며 시를 읽듯 책을 더듬어가던 시간이었다.     

 

한정원 시인을 알지 못했다. 책꽂이에 이 책이 있는 까닭은 아마도 누군가의 추천이었을 텐데 그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산문은 일상의 나지막한 소리를 따라 걷듯 익숙하면서도 편안했다. 일상 속에서 시와 마주하는 시인의 혼잣말 같은 산문들은 안온했고, 그의 사색들은 낯설기도 했지만 왠지 끄덕이게 되었다. 시인은 "대학에서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단편 영화를 연출하고 연기를 했다."(작가소개)고 한다. 산문집 《시와 산책》으로 먼저 알려졌고, 시집 《사랑하는 소년이 얼음 밑에 살아서》(2023)를 출간했다.   

   

지난 8월, 한정원 시인의 산문집《내가 사랑하는 네 번째 계절》(난다, 2024)이 나왔다. 난다출판사의 '시의적절'시리즈 8월호다. 이 시리즈는 1월부터 시인들의 하루하루, 1일에서 31일까지 시와 산문, 그리고 사진으로 사색이 담겨있다. 8월을 맡게 된 한정원 시인은 여름을 '내가 사랑하는 네 번째 계절'이라고 한다. 계절이 네 개인데 네 번째이면 거의 싫어하는 거 아닌가? 갸웃거렸는데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여름은 내게 네 번째로 사랑하는 계절이다. 세 번을 거쳐 온 마음이 미약하다. 그래도 싫다고 말하고 싶지 않은 마음. 한껏 사랑할 수 없다면 조금 사랑하면 되지."(p.42)    

 

이 문장을 읽고 그만 뭉클해서 울먹였다. '아, 조금 사랑하면 되는구나.' 사람을 싫어하는 내가 미워서 한동안 마음이 아팠다. '싫어하는 사람도 소중한 사람인데, 미워하면 안 되는데…… 나도 똑같을 텐데……' 그런데 나를 간섭하는 그가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물론 지금은 그가 나와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그냥 웃는다.   

   

한정원 시인은 그 문장이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꼭 그래야 되나?"라고 자문했다고. 그리고 덧붙였다. "사랑해야 되나요? 사랑하지 않아도 되지요. 대신 예의를 갖추면 되고요." 그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된다."라고 넌지시 말했다. 순간 방긋 웃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90번째로 사랑하면 되겠다. 셈하기 쉬운 100번째 안에는 들잖아.'  

   

동네책방 <글 헤는 밤>에 시인이 오시니 문장 필사를 하자는 제안이 있었고, 시인과의 만남 한 달 전부터 《내가 네 번째로 사랑하는 계절》 필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시인과의 만남. 시인의 태도가 글과 닮았다고 느꼈다. 또, 시인의 말을 메모하려고 하니 말이 곧 글이 되었다. 그래도 온화하지만 거리를 두는 느낌이었는데 그는 모인 사람들의 정서에 물들고 있음을 보았다. 나는 그것을 공간의 힘으로 여긴다.     


시인과의 만남, 첫 번째 순서는 '독자의 암송'이었다. 시인과의 만남을 위해 참가자들이 미리 좋은 문장을 암송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사실을 미리 알지 못했지만 필사공책을 갖고 있기도 했고. 뭉클했던 그 문장을 품고 있어서 그것을 암송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주저하다가 그만, 다른 분이 같은 문장을 암송하셔서 기회를 놓쳤다. 그래도 나보다 더 긴 문장을 하셔서 더 잘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암송은 서너 분이 하신 것 같다. 한정원 시인은 놀라워했고, '암송'에 대해 생각하던 즈음이라서 더 의미 있다,라고 전했다.    

  

그리고 두 번째 순서. 난다출판사 유성원 편집자의 진행으로 이어졌는데, 돌발 상황이라고 할까. 진행자가 참가자들에게 한정원 시인을 만나러 온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열두 분 정도 되었을까. 모두 한정원 시인과 책과의 인연을 들려주었는데 따뜻했고 뭉클했다. 갱년기인지 눈물이 많은 나는 그만 암송하지 못해 아쉬웠던 부분을 말하고서는 괜히 울컥하고 말았다. 사람을 미워하는 게 얼마나 자신을 할퀴는 일임을 시인도 알아주었다.      


세 번째 순서는 시인의 낭독이었다. 시를 낭독해도 좋았겠다,라는 생각은 나중에 들었는데 아마도 시보다는 산문이 더 독자와의 공감을 나눌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산문 <무거운 기쁨>을 낭독하고 그 글을 쓰게 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주인이 있으나 방치된 개 두 마리를 날마다 산책시키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개들 덕분에 시인은 아파도 일어서서 자신을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고 했다.     

 

낭독 사이로 시인은 글에 담지 않은 자신의 경험과 생각도 들려주었다. 어느 부분에서는 냉소적인 모습도 있었고, 경험자로서 당부하는 말도 있다. 그 말들 속에서 이상하게도 그가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시인은 전업작가로 들어서기 전 보통의 직장인이었지만 왠지 겉도는 사람이었고, 그런 자신이 '루저'같았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도 글을 쓸 때마다 절망스럽고, 울고 싶을 정도로 힘들다,라고 말했다.    

  

그의 글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건 아마도 그런 그의 솔직함 때문인 듯하다. 생각하고 노력하고 고뇌하면서 자신의 말을 끄집어내는 그의 힘은 자신을 믿고 있기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글을 쓰는 것이 아닌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글들. 문득 많이 아팠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우리는 모두 때때로 슬프고 때때로 기쁘지 아니한가. 그가 더 자주 '흡족'하기를 바란다. (시인이 말하는 중 흡족스러웠다, 는 표현을 했는데, 문어체가 참 잘 어울린다고 여겼다.)     


시인과의 질의응답시간 중 책방지기가 물었다. "오늘 우리는 한정원 시인과의 만남, 이라고 적어두었는데 시인과 작가 어느 호칭이 편한가요?" 그는 "산문집을 내고 작가라고 해서 부끄러웠는데, 시집을 내고 시인이라 불리는 것이 또 민망하기도 했다."라고 답했다. 이어서 "이제는 상관없다."라고 웃었다. 시인은 "소설을 쓰고 싶다"라고도 말하며 "안 해 본 것을 해보고 싶다"라고 밝혔다. 시집 《사랑하는 소년이 얼음 밑에 살아서》는 '시극(詩劇)'이라고 하는데, 전방위적 글쓰기를 지향하고 있는 듯 보였다. 조곤조곤 들려준 이야기를 통해 짐작해 보면 그는 아마도 무언가에 얽매이고 싶지 않은 듯하다. 하고 싶은 일을 희망하는 한정원 시인이 더욱 자유로워지기를 함께 응원한다.


2024.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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