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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로 Jul 11. 2024

도피

즐거움은 판타지

십대 시절 우리 집은 가난했다. 아빠는 일도 없고 건강도 좋지 않으셨다. 엄마는 항상 가족의 식사를 걱정하셨다. 방학 때는 점심으로 같은 음식을 몇 주씩 먹었다. 주로 먹던 음식은 멸치 국물에 만 고명없는 국수였다. 하루는 엄마가 평소처럼 국수를 끓여 점심을 차리시다가 흐느끼면서 집을 뛰쳐나가셨다. 식사를 하시려던 아빠는 깜짝 놀라 엄마를 따라 바깥으로 나갔다.


그 시절 나는 생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어떻게 해야 모두가 행복해질까? 나는 그냥 공부를 열심히 했다. 전교 1등을 해보지 못했어도, 전교 십 등 안에 든 적은 몇번인가 있었다. 학원은 다니지 않았고, 도움을 받은 것이라곤 수학 인터넷 강의가 전부였다. 시험기간에는 교과서와 참고서의 페이지를 통째로 외웠다. 아는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성적표를 받아오는 날이면 부모님의 표정이 밝아졌고 집안 분위기도 좋아졌다. 사실 나는 애니메이션을 보고 만화 그리는 것을 공부하는 것보다 좋아했지만, 공부를 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당시 내가 살던 지역은 비평준화였다. 성적이 좋고 입학 시험을 잘 보면 좋은 고등학교에 갈 수 있었다. 부모님은 내게 많은 기대를 거셨따. 나는 부모님의 기대 반, 스스로의 의지 반으로 지역에서 가장 좋은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역설적이게도 가족의 기대에 부합하고자 한 그 행동 때문에 내 인생이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모의고사'라는 것을 봤다. 인생처음으로 충격적인 점수를 받았다. 과목별로 점수가 나왔는데, 수학은 거의 전교 바닥권이었고, 영어도 마찬가지였다. 수업시간에 아무리 노력해도 선생님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선생님들이 이건 너무 쉬운 것이니 넘어가도 된다면서 책장을 몇 장씩 그냥 넘기기 일쑤셨다. 한국어로 된 수업이 외계어로 들렸다. 성적은 바닥으로만 급강하했다.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공부해야 하는지도 수가 없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 안 것이지만, 성적을 잘 받는 친구들은 고등학교에 들어오기 전부터 선행을 끝내고 온 경우가 대다수였다. 늦어도 겨울 방학때 학원을 몇 개씩 다니거나 고액 과외를 하면서 내신을 준비했다. 학교에 들어와서도 몇십만원짜리 과외를 과목별로 받으며 내신과 수능을 준비했다. 그것도 모르고 방학을 평범하게 보낸 나는 당연히 그들을 쉽사리 따라갈 수 없었다.

 

더욱 좋지 않은 것은 부모님과 떨어져 살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부모님이 직장때문에 지방으로 내려가셨기에 내 힘든 마음을 토로할 곳이 없었다.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고 집에 전화를 걸면 나와 마찬가지로 피곤에 지친 부모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부를 어떻게 할지도 모르겠고 수업 내용이나 친구들을 따라갈 수 없다는 고민을 털어놓으면 너만 힘드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럴 시간에 한 자라도 더 공부하겠다는 질책도 자주 들었다.


나는 죄인이 된 것 같았다. 공부로 부모님을 기쁘게 해야하고 가족의 희망이 되어야 하는데. 매번 힘들다는 토로나 하고, 성적은 밑바닥이고. 학교에서는 중학교때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열등생 취급을 받고. 부모님이든 선생님이든 친구들이든 말이 통하는 대상이 없었다. 의지할 곳이 없었다. 그런데 겁이 많아서 제대로된 일탈을 하지도 못했고, 자퇴를 바랐으면서도 미래가 두려워 고등학교를 그만두지 못했다.


썩어가는 것은 마음 뿐이었다. 도피할 곳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나는 도서관으로 갔다.


그때 내 눈에 토마스 불핀치의 <아서왕 이야기>가 눈에 띄었다. 어릴적 보던 만화나 영화, 반지의 제왕 등의 영향이었을까? 나는 기사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무작정 책을 꺼내 읽었다. 새로 접하게 된 기사들의 세계는 오묘하고도 신비했다. 책이 소설형식이 아니라 엄청나게 재미있는 않았지만, 볼수록 탐구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다시 도서관에 갔다. 이번에는 장 마르칼의 <아발론 연대기>가 눈에 띄었다. 무려 여덟 권이었다. 1권부터 빌려서 읽다가 다음 권이 없으면 부모님이 문제집을 사라고 주신 돈으로 책을 사서 읽었다.


이야기 속 기사들은 대개가 허구의 인물이었고, 나와는 동떨어진 어느 과거의 삶을 살고 있었다. 책에는 마음을 어루만져주거나 달래주는 내용 같은 건 없었다. 기사들의 삶과 신비한 모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 있었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한 인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 인물의 이야기가 뒤죽박죽으로 나와서 명확한 주인공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여덟권의 책을 다 보고 책장을 덮었다.


그 후로도 기사가 등장하는 책이라면 최대한 찾아 읽었다. 다른 친구들이 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국영수를 공부할때, 홀로 머나먼 기사들의 세계로 여행을 떠난 것이다. 그렇게 보낸 3년의 결과는 뻔했다. 대학 입시 결과로만 본다면, 나는 처참하게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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