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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로 Jul 15. 2024

봄과 꽃과 도서관

즐거움은 판타지

스무 살, 나는 대학에 입학했다.


가고싶던 대학도 아니고 특별히 흥미있던 학과도 아니었다. 그저 성적에 맞추어 들어간 학교였다. 학교는 언덕 높은 곳에 있었다. 길이 가팔라서 비가 많이 오는 날이나 눈이 심하게 내리면 등교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다. 나는 그 길을 묵묵히 오르며 스스로를 실패자라고 생각했다.


많은 동창들이 좋은 대학에 갔다. 대학에 가서 아르바이트도 해 보고, 이성친구도 사귀고, 해외여행도 갔다. 동아리에, 모임에, 단체 소개팅에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올 법한 일들은 다 해보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스물을 만끽했다. 반면 나는 수업이 끝나도 하교하지 못하고 좁은 대학 캠퍼스 안을 방랑하는 생활을 계속했다.


마음이 무거웠다. 집안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내게 기대가 크셨던 부모님은 이제 날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창피해 하셨다. 하교하다가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들을 마주치는 것도 싫었다. 중학교때 친구들을 만나면 어느 대학에 갔는가 하는 이야기가 자연스레 나왔는데 그런 상황 자체를 피하고 싶었다.


어디론가 도피하고 싶었는데 차마 갈 곳이 없던 나는 벚꽃이 가장 예쁘게 피었던 스무살의 봄날에 가장 친숙한 도피처로 도망을 갔다.


고등학교때도 그러했듯, 내 도피처는 도서관이었다. 대학 도서관은 확실히 고등학교 도서관보다 몇 배는 컸고, 책도 많았다. 나는 제일 꼭대기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소설과 동화와 세계의 신화와 민담에 관련된 책들이 한가득이었다. 나는 서가를 하나 하나 둘러보며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보았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무엇이 좋을까? 책은 많은데 딱히 마음에 드는 책이 없었다. 수많은 책들을 눈으로 보고 넘기거나 들었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하고 있을 때, 두께가 벽돌만한 어느 책 이 눈에 띄었다. 책의 제목은 <나니아 연대기>였다. 나니아 연대기는 고등학교 때도 도서관에서 기억이 있었다. 다만, 7권 합본으로 나온  너무 두꺼워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기에 항상 그냥 지나치곤 했다. 이전에 지나쳤던 아쉬움 때문일까? 나는 책을 서가에서 꺼내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면서도 부정적인 생각만 잔뜩 떠올랐다. 대학 입시에 성공한 친구들과 달리, 내 생활은 고등학생 때와 별반 다를 바가 없고, 실패했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환상적인 책 속의 세계를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여행하며 작은 위안을 얻으려 노력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마냥 부정적 생각만 하기에는 책이 너무도 다정했다. 옷장을 통해 다른 세계로 간 순수한 루시와 착한 툼누스 씨, 땅에 심긴 채로 불빛을 발하는 가로등을 보면서, 흰 눈이 온 세상을 잔뜩 덮은 모습과 달콤한 터키쉬 딜라이트를 상상하며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는지 모른다.

  

전에는 판타지 소재의 콘텐츠는 그저 재미있는 읽을거리나 흥미거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암울했던 스무살에 나는 도서관에서 홀로 나니아 연대기를 읽으며 판타지에 관한 생각을 달리 하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건 바로 이런것이구나. 평생 하고싶은 일이 어쩌면 이것과 관련되었는지도 모르겠어. 나는 정말 이것을 하고싶어. 그런데 어떻게 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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