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인 이야기 - 1
지난 여름 방학, 나는 친구의 제안을 받아 한국장학재단이 주관하고 NH농협은행이 후원한 대학생 재능봉사 캠프에 지원했다. 농어촌 지역에 위치한 학교에 나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봉사 프로그램이었다. 평소 교육 활동에 관심이 많은데다 장학금까지 지급해준다고 하여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순으로 진행되는 캠프였다. 교내 캠프는 멘토들이 직접 학교에 방문해서 멘토들만의 수업을 진행하는 시간, 교외 캠프는 멘토들과 멘티들이 함께 떠나는 수학 여행(?), 사후 멘토링은 줌 등을 통해 진행하는 시간이었다.
최초로 나와 내 친구 2명이 모였다. 최소 멘토 수는 8인. 우선 멤버를 꾸려야 했기에, 데려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모두 연락을 돌렸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멤버들.
멤버(이하 멘토)를 구했으니 이제 기획서를 작성할 시간. 보통 재능봉사 캠프는 학교 측에서 원하는 프로그램을 미리 제작해두고, 이에 알맞는 학생들을 뽑는 시스템이지만 이 캠프는 조금 달랐다. 우리가 직접 교내캠프 프로그램 기획 단계부터 시작을 해야했다. 재단 측에서 우리에게 제시한 것은
1. 환경 문제, 첨단 산업 등에 대해 다루는 프로그램을 3개 이상 포함할 것.
2. 팀만의 차별화된 특별 프로그램을 1개 포함할 것.
이렇게 두 가지 뿐이었다.
단톡방을 만들고, 안내 사항들을 안내한 뒤 회의 날짜를 정했다. 회의 날짜까지 멘토들에게 자신이 진행하고 싶은 프로그램을 한 개씩 짜오라고 했다.
처음에 3명이서 멤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우리는 최대한 다양한 전공의 사람들을 모집하고자 했다. 다양한 전공의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시너지를 기대하고 팀을 구성했는데, 운이 좋게도 그 시너지가 기획 단계에서 제대로 발휘되었다. 각자가 구성해온 프로그램에 대해 간략하게 적어보겠다.
1. 팀장(철학과)-철학적으로 생각해보기
후술하겠지만, 우리의 메인 프로그램들은 공학/건축 계열이었다. 필연적으로 기술 등에 대해 다룰 수 밖에 없는 만큼, 기술에 대해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윤리적/철학적으로 생각해봐야할 문제들을 제시하는 수업이었다.
2. 나(기계공학부) - 자율주행 자동차(특별 프로그램)
말 그대로 자율주행 자동차에 대한 수업이다. 자율주행을 100% 구현하는 수업은 어렵기에 적외선 센서/초음파 센서/모터 등을 활용해 선을 쫓아가는 라인 트레이서(Line tracer)를 만들어보는 수업을 계획했다.
3. J(건축과) - 친환경 건축
다양한 재료를 활용해 친환경 건축 모형을 제작해보는 수업이었다.
4. 여친(원자력공학과) - 블록 코딩
블록 코딩을 통해 계산기를 만들어보는 수업이었다.
5. D(노어노문학과) - 업사이클링 풍력자동차(+ESG)
원래 기획은 업사이클링의 개념 이해와 재활용품을 활용하여 풍력 자동차를 만들어보는 수업이었는데… 이후 설명할 재단의 횡포로 인해 강제로 ESG 수업과 합쳐진다.
6. Y(공학 계열, 건축공학 희망) - 메타버스 건축
메타버스 공간 상에서 건축물을 지어보는 수업이었다.
7. W(한국음악과) - 민요 산책
민요에 대해 알아보고, 노래와 악기를 통해 이를 직접 체험해보는 수업이었다.
8. S(동양화과) - Ai를 활용한 노래 및 뮤직비디오 제작
Ai를 통해 자신만의 노래와 짧은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는 수업이었다.
딱히 수업끼리 연계될 필요성이 있다고 설명하지도 않았는데, 묘하게도 수업 간의 연결고리가 보였다. 가령, 메타버스 건축과 업사이클링 부분의 내용과 연계되는 친환경 건축, 블록코딩과 ai 툴 활용과 연계되는 자율주행 자동차 등이 그것이었다. 희망을 느낀 팀장은 곧바로 기획서 작성을 시작했고, 나는 이외의 기타 프로그램들(아이스 브레이킹, 운동회 등)을 기획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류를 제출했고, 이 이상하게 모인 8인의 동행이 시작되었다.
운이 좋게도 20:1이 넘는 경쟁률을 뚫고 선발되었다.
기획서를 제출할 당시, 우리는 10여개의 초등학교 중 1-3지망을 골라 제출하였었다. 그 중에서 학교 측의 희망 캠프 내용과 우리의 기획 내용이 얼추 맞는 학교를 추리고, 모두가 서울에 거주 중이었기에 비교적 가까운 편이었던 강릉/여주/충북 어딘가를 지원했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전남 끝자락에 위치한 초등학교로 배정을 했다네? 누군가는 반드시 가야하지만, 그 누군가가 우리일 줄이야.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이럴거면 지망을 받질 말던가'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멘토 사전 교육을 진행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사전 교육의 내용은 멘토로서의 마음가짐, 멘티들과 벽을 허무는 법 등등.. 이런 종류의 이야기만 가득한줄 알았으나, 사전에 안내받지 못한 내용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교내 캠프에서 필수적으로 해야하는 교육이 존재했던 것이다. 진로/로봇/ESG 이렇게 세 개를 반드시 프로그램에 추가해야한다고 했다.
진로 교육은 PPT 자체는 괜찮은 내용이었지만, 활용하라고 제공해준 보드게임이 매우 난해했다.
이 제품이었는데... 난해한 규칙, 직관적이지 않은 말판, 그리고 무엇보다 '정말 이런 직업이 앞으로 생길거라고?' 싶은 내용들(ex.행성 대변인). 이
로봇 교육은 PPT에 오류가 조금 있었지만, 나중에 수정하면 되겠다 싶어 넘어갔다. 뭐, 아이들에겐 타임머신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것도 동심을 위해 나쁘지 않을 것 같기도 했고.
그런데 분명 멘티들은 초등학교 4-6학년 아이들이라고 했는데, 14세 이상 권장인 키트를 제공해줬다. 멘토들도 조립하는데 꽤나 시간이 걸렸었다. 그렇지만 '멘티들이 언제 또 이런걸 해보겠어. 우리가 열심히 도와주면 되겠지.'라는 마음가짐으로 넘어갔었다. 그 연락을 받기 전까진....
ESG는 정말 총체적 난국이었다. 내용적으로도 문제가 많았지만, 전부 다 넘어가도 이 스마트팜 키트만은 꼭 짚고 넘어가야겠다.
가격이야 뭐, 아두이노 보드에다가 쉴드, 각종 센서들까지 들어가 있으니까 이해한다. 그런데 ESG와 스마트팜 실습이 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걸까. 기업의 지속 가능한 경영에 대한 ESG와 농업을 더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스마트팜. ESG 얘기하다가 갑자기 식량 위기 언급하고, 그러니까 스마트팜을 만들어보자! 라고 하는 것이 무슨... 게다가 구동 코드를 미리 작성해서 제공해줬는데, 계속 오동작이 일어나서 검토해보니 코드에 오류가 있었다. 재단 측에 이를 알렸으나 형식적인 감사 인사만 할 뿐 다른 팀들에게 이를 공지해주지는 않았다.
결정적으로 초등학생들이 이 활동을 하며 무언가 느끼기엔 너무 뜬구름 잡는 활동이 아니었나 싶다. 나중에 다른 팀들에게 들어보니 그냥 멘토가 다 조립해서 제공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우리 아이들은 말이 좋아 스마트팜 키트지 그냥 아두이노 전선 연결하기 챌린지 정도로 느낀 것 같았다.
잠시 사적인 감정을 담아서 얘기를 하자면, 필수 교육을 정말로 진행해야한다면 다같이 모이는 교외캠프때 진행하면 되지 왜 교내 캠프에 끼워서 팔려고 하는건지 이해가 안 됐다. 심지어 교외 캠프는 재단 측에서 기획하였는데, 대체 뭘 한건지 기억에 남지도 않고 의미도 없는 프로그램 투성이었다. 차라리 그 때 이 프로그램들을 진행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더불어 캠프 이용간 자동차 이용을 자제해달라는 안내를 받았다. 서울에서 그 도시까지 환승 2번에 4시간, 숙소에서 학교까지 배차간격 40분인 버스로 1시간 소요되는 동네를 자동차를 사용하지 말라고..? 당연히 안전 문제 때문에 그러는 것쯤은 알겠지만, 과연 이 사람들이 정말 답사라도 가본건지 의심되는 순간이었다. 현장직과 사무직의 갈등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자차 및 렌터카를 이용해 교내캠프를 진행하긴 했다)
이런 사소한 부분들이 점점 쌓여나가면서 재단에 대한 반발 심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건 아까 로봇 부분에서 언급한 그 연락 때문이었다. 캠프 진행 이후 팀별로 학교 사전 답사를 진행했어야 하는데, 사전 답사 일정 조율 중 담당 선생님께서 의미심장한 말씀을 남기셨다.
'오시면 아이들의 인지 수준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는데...'
사전 답사를 다녀온 친구들이 답사 후 그 내용을 확인해서 보고해주었다. 우리의 멘티들이 인지 능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친구들이라는 것. 이 대목에서 나는 정말로 화가 났다.
아이들이 인지 능력은 문제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에 대한 어떠한 사전 안내도 받지 못 했고 프로그램 기획 또한 이를 상정하지 않고 짜놓았다. 합격 이후 최종 기획서를 다시 제출했어야하는데, 이를 확인한 시점으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남은 상황. 나는 재단 측에 이에 대해 미리 알고 있었냐고 물어봤지만, 재단 측으로부터 멘티들의 관한 정보를 학교 측으로부터 제공은 받았으나, 해당 내용은 파악하지 못했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러나 담당 선생님께서는 관련 정보를 모두 재단 측에 제공했다고 말씀하셨다. 자료 확인을 안 했거나, 일부러 함구했거나, 애초에 정보를 제공한 적이 없거나...
우선 화는 제쳐두고 당장 닥친 일부터 해결해야했다. 기존 기획을 전부 다 뜯어고쳐야 하는 상황. 우리 팀원들은 대부분이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활동(교육 봉사, 학원 강사, 멘토링 등)을 경험해본 친구들이었지만, 이러한 특성의 아이들과 만나본 적은 없었다. 멘티의 수준 파악에서부터 큰 난항을 겪기 시작했다. 아무리 우리가 좋은 프로그램을 기획해간다고 한들, 아이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면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기타 프로그램 중 일부는 기타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진행이 어려울 것 같다는 담당 선생님의 말씀으로 인해 새로운 수업도 준비해야하는 상황이었다.
지금 반추해보자면 감정이 많이 희석되었지만, 그 당시엔 정말 막막했던 것 같다. 이 당시 팀장과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결론적으로 새롭게 모든 프로그램들을 만들기엔 시간이 부족하다고 판단했고, 결국 모든 프로그램의 난이도를 하향 조정하는 방향으로 결정했다. 또한 체육회 등의 활동은 전부 삭제 후 요리 등 추억을 쌓을 수 있는 활동으로 대체하였다. 멘토들에게 이를 공지하고, 최종 기획서 상에 재단 측의 필수 교육과 학교 측의 의견을 반영하여 수정해 제출했다.
그 후 멘토 모두가 모여 자신의 프로그램을 시연해보며 피드백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이 과정에서 모두가 공통되게 제시한 의견은, 로봇 수업의 교보재는 멘티들의 수준을 고려했을때 진행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활동 지원금 내에서 새로운 교보재를 찾아 구매했어야 했다.
부팀장이기 이전에 기획 총괄을 맡으며 우선 가장 크게 느꼈던 것은 재미였다. 사실 학생회, 전공 알림단 등의 활동을 할때도 기획/아이디어 부문의 일을 계속 맡아왔었는데, 이번 프로젝트의 경우 특히 더 큰 재미를 느꼈었던 것 같다.
우리 팀의 경우 멘토들이 가져온 프로그램들이 다 적절하여 세부적인 수정 사항 외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디테일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주기 보단 멘토들의 아이디어를 적절한 형태로 포장하고 가공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일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가장 큰 재미를 느꼈던 부분은 이 10개 남짓한 프로그램들을 하나로 엮어 의미를 뽑아내는 과정이었다. 우리 캠프에서 학생들이 얻어갈 수 있는게 뭐가 있을까, 어떤 프로그램의 어떤 내용을 추가해야 더 의미있는 활동이 될까, 어떻게 해야 큰 문제없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을까. 이런 종류의 생각을 참 많이 했다.
평소에 하던 기획과는 다르게 대상이 아이들이다 보니 여러 고려사항들이 추가되었다. 아이들의 최대 집중 시간을 고려해 수업 시간을 분배하고, 어떻게 하면 아이들의 마음을 공략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고, 이에 맞춰 수업 자료들을 만들었다. 결론적으로 일종의 상품 기획의 경험을 쌓았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특히 내 프로그램이었던 자율주행 자동차를 설계하면서 이런 점을 가장 크게 느꼈다. 길게 설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느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처음에 자율주행 테마를 생각해내는 것이 꽤나 어려웠다. 아이들이 흥미를 느낄 수 있되 기술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고, 기계공학 전공이 자세하게 다룰 수 있는 수업을 적절한 난이도로 구성한다는 것은 내 생각보다도 더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아마 다른 멘토들도 비슷한 생각을 많이 했을 것이다.
큰 테마를 확정한 이후에 세부적인 내용-즉 어떤 형태로 수업을 진행할지, 자동차는 어느 수준부터 조립해야할지, 어느 정도 수준의 자율주행까지 구현해낼지, 코딩은 어떻게 할지 등-을 기획하면서도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이상하게 재미를 느끼고, 일상 생활 중에도 이에 몰입해 종종 생각난 것들을 메모하곤 했다. 진로 고민이 많았던 시기에 이러한 경험들을 겪으며 상품 기획 쪽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또한, 일을 하면서 유연한 사고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업 내용, 수업 환경, 학교가 지원 가능한 부분 등 수업에 관련된 요소들 뿐만 아니라 숙소, 학교 위치, 점심 식사, 멘토들끼리의 친목 등 더 많은 요소들을 고려하여 프로그램, 나아가 우리의 5박 6일을 계획했지만 모든 일에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끼어들었다. 2편의 내용은 주로 그것과 관련된 부분들일텐데, 후술하겠지만 정말 이것까지 내가 고려했어야 한다고? 싶은 요소들이 대다수였다. 모든 변수를 고려해 일을 계획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적절한 주요 변수들을 고려해 일을 계획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닥쳐왔을 때에도 평정심을 잃지 말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