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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그린 Oct 07. 2023

내가 이 카펫 모르는 것 같아?

<조용한 희망> Maid, 2021

며칠 전에 어머니는 스마트 TV를 구매했다. 넷플릭스 서비스가 기본적으로 제공되었다. 내 아이디를 공유하고 어머니께 보고 싶은 작품을 골라보라고 했다. 어머니는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막막해했다. 알고리즘 역시 예순을 앞둔 한국 여성의 취향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리모컨을 대신 들었다. 골똘히 선정 기준을 고민하다가 <조용한 희망>을 골랐다.


이 드라마는 2021년에 넷플릭스에서 공개되었다. 스테파니 랜드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 「MAID」가 원작이다. 남편의 학대로부터 도망친 젊은 엄마 알렉스가 청소부로 일하며 홀로 서는 이야기다.                    

출처 : 넷플릭스

알렉스는 침잠하는 성격이다. 쉴 새 없이 감정 변화를 떠들어대는 자신의 엄마와는 다르다. 사회복지사에게 울며불며 불행을 호소하기보다는 차분하게 실질적인 도움을 요청한다. 알렉스가 그토록 말이 없는 것은 그녀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용한 희망>은 알렉스의 캐릭터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그녀를 묘사한다. 알렉스의 심경을 대사로 설명하는 대신, 화면 연출과 다양한 사물을 통해 보여준다. 문학작품에서 객관적 상관물을 활용하는 것과 유사하다.  

   

구체적인 예시를 살펴보겠다. 1화에서 알렉스는 늦은 밤에 집에서 도망친다. 그때부터 화면 우측에서는 알렉스의 돈이 차감되는 것이 연출된다. 알렉스가 청소용품을 살 때, 주유할 때, 음식을 살 때 등등… 알렉스는 ‘큰일이야. 돈이 없어…’라고 말하지 않는다. 시청자들은 차감되는 숫자를 보면서 그녀의 절박함과 압박감을 짐작할 수 있다.     

출처 : 넷플릭스

2화에서 알렉스는 남편의 고소로 인해 양육권을 빼앗긴다. 딸과 처음으로 헤어진 그녀는 가정폭력피해자 쉼터의 카펫에 웅크려 눕는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물을 참는다. 그때 쉼터 친구인 대니얼이 찾아온다. 대니얼이 꼬치꼬치 캐물어도 알렉스는 그저 멍하니 숨만 내쉴 뿐이다. 그녀는 ‘아이를 잃어서 세상이 무너졌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때 대니얼이 소리친다.    

  

당장 일어나.

내가 이 카펫 모르는 거 같아?

나도 겪었어.

내 인생의 몇 주를 이 카펫에서 잃었어.

알렉스, 싸워야 해. 일어나!     


카펫은 절망의 상징이자, 연대의 장소이자, 이야기의 전환점이 된다. 이후 알렉스는 직장을 구하고 양육권 소송을 하고 정부 지원을 받기 위해 고군분투하기 시작한다. 차감 연출과 카펫 이외에도 이 작품은 ‘말하지 않고 보여주는 방식’으로 캐릭터를 보충한다.      

출처 : 넷플릭스

많은 드라마에서 가정폭력은 극 중 인물이 각성하는 계기로 등장한다. <더 글로리>에서 강현남은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딸을 구해주기 위해 문동은을 돕는다. <하이에나>에서 정금자는 아버지에게 학대당하면서 변호사가 되어 복수하겠다고 결심한다.      


앞의 두 드라마는 가정폭력을 지나치게 묘사한다. 아내와 딸은 남편에게 뺨과 온몸을 맞는다. 피가 튀고 멍이 든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며 자신의 손목을 긋기도 한다. 이러한 묘사는 시청자들에게 작품의 메시지가 아닌 잔혹한 장면만 기억하도록 한다. 일종의 포르노로 전락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조용한 희망>의 가장 빛나는 지점이 나타난다. 이 작품은 물리적 폭력이 아닌 ‘정서적 폭력’을 다룸으로써 주제의 차별성을 가진다. 알렉스의 남편은 그녀를 직접 때리진 않았다. 그녀가 서 있던 벽에 유리컵을 던졌다. 알렉스의 경제적 결정권을 빼앗고 주변 친구 관계로부터 고립시켰다. 알렉스는 그것이 학대라고 인식하지 못했고 그래서 경찰에 신고하지도 않았다. 알렉스는 ‘진짜 학대’는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가정폭력피해자 쉼터에 갈 만한 경우가 아니라고 여겼다.      


이 작품은 알렉스가 싱글맘 청소부로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이기 전에, 한 여성이 자신을 ‘학대 피해자’로 인정해 나가는 이야기다. 알렉스는 자신의 아픈 경험을 정직하게 마주하고 나서야 세상에 도움을 청할 수 있게 된다.     


<조용한 희망>은 폭력의 구조를 단순화하지 않는다. 피해의 사례를 일반화하지도 않으며,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복수하면 끝나는 이야기로 만들지도 않는다. 알렉스는 가정폭력피해자 쉼터에서 많은 힘이 되었던 친구, 대니얼이 집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실제로 가정폭력 피해자들은 가해자를 완전히 떠나기까지 7번의 귀가를 경험한다. 알렉스는 자신을 때린 사람에게 어떻게 돌아갈 수 있느냐며 이해하지 못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며 그녀 역시 남편에게 잠시 돌아간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겪은 알렉스가 홀로서기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드라마는 세상의 모든 피해자를 응원한다.     


 

출처 : 넷플릭스

나의 어머니는 오랫동안 자신과 닮은 주인공을 만나지 못했다. 영화에서 남자들이 영웅이 될 때 느끼는 희열을, 로맨틱 코미디의 어리고 예쁜 연애를, 주말드라마 가족들의 시끌벅적함을 싫어했다.      


유치해서 보지 않는다고 말하던 어머니의 외로움을 나는 안다. <조용한 희망>의 알렉스를 보며 어머니는 내내 눈을 반짝였다. 당신 삶에서 겪은 무수한 문제들을 알렉스가 헤쳐 나갈 때, 어머니는 비로소 자신을 만난 것처럼 보였다.      


<조용한 희망>은 사회적으로 단절된 28살의 백인 여성이자,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청소부를 조명했다. 우리가 ‘미국’에 흔히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는 꽤 다른 이야기다. 그리고 남편 없이 한국에 사는 58세의 교사인 나의 어머니가 이 드라마에 깊게 빠졌다.     


나는 이것이 OTT 시대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역사상 가장 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시대. 변두리에 있던 존재들을 뛰어나고 재밌는 콘텐츠로 탈바꿈하는 시대. 다양함이 추구되는 시대. 이 시대야말로 타인에 대한 공감의 범위를 무한하게 확장할 수 있다.      


OTT 시대의 좋은 글쓰기란 이러하다. ‘나’를 발견하게 할 뿐만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연대하게 하는 것. 그리하여 OTT가 우리 일상에 자리 잡은 단순한 서비스가 아니라, 삶을 보다 풍성하게 하는 사회적 연결망으로서 기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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