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그린 Feb 04. 2024

소년의 여백

지난여름이었다. 원장님은 난감해하며 새로 등록한 학생을 소개했다. 운동장에서 뛰어놀아 땀으로 범벅되어 있던 그 소년에게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고 오라고 했다. 소년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다. 지난 학기에 지역 뉴스를 발칵 뒤집어 놓은 아이였다. 열 살 남자 어린이가 자신의 성기 사진을 또래 여자 어린이에게 보낸 사건이다.

이 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 몇 개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어린 시절 치마를 들췄던 남자아이, 뒷자리에서 브라끈을 튕기던 남자아이, 중학생 시절 성추행했던 이비인후과 의사, 대학 시절 여자 신입생들의 증명사진을 놓고 외모 순위를 매기던 동기 오빠들… 장난으로 의미 없이 행해졌던 그 폭력들은 나를 서서히 무력하게 했었다.

소년의 아버지가 우리 학원에 상담받으러 온 날, 그는 자신의 가정사와 소년의 성격에 대해서 쉴 새 없이 말했다. 아버지는 사건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가 논란이 커지자 급히 소년을 맡길 곳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나는 아버지가 조금 산만하다고 생각했다. 실내화로 갈아 신지 않고 들어와서는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커피를 타 마셨고, 물어보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떠들어댔다. 그런 아버지와 달리 소년은 조용하고 조심스러웠다. 나는 상상했던 소년의 모습이 아니라서 당황스러웠다. 소년은 또래 아이들보다 두 뼘은 작았다. 내가 말을 걸면 쑥스럽게 웃기도 했다. 나는 며칠 동안 소년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 고민했다. 가장 편한 방법은 사건에 대해 짐짓 모른척하며 지도하는 것이었다.

나는 소년에게 책을 추천하고, 독후활동으로 글을 쓰게 했다. 어느 날은 독서감상문을, 어느 날은 생활문을, 어느 날은 논설문을 쓰게 했다. 소년은 정갈한 글씨로 내가 지도한 내용을 한껏 흡수해서 글을 썼다. 다른 학생들은 늘 ‘모르겠어요’라고 말했는데 소년만은 나의 말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 지점이 묘하게 마음을 복잡하게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소년은 한 편의 시를 썼다.

소년이 쓴 시는 놀라웠다. 대부분의 저학년 학생들이 흉내 내는 말을 사용해 말장난 같은 시를 쓰는 것에 비해, 소년은 자신의 내면을 표현할 줄 알았다. 진심이 담긴 시를 마주하자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러다 문득 기대했다. 우리가 마음을 나눌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소년에게 어떤 생각으로 사건을 저질렀는지, 반성은 하고 있는지 묻고 싶었다. 사실 성인 여성으로 살면서 겪어 온 성폭력에 대한 원인을 소년에게서 찾고 싶었던 것 같다. 이 소년은 그 남자들처럼 자라나지 않게 해야지 다짐했던 것도 같다.

그날 밤 꿈을 꿨다. 소년의 아버지와 키스하는 내용이었다. 잠에서 깨고 나서 부끄러웠다. 나는 소년의 엄마가 되고 싶나. 그것이 아니라면 나는 왜 소년을 돌보고 싶어 지는가. 이것이 모성애인가. 모성애 신화를 부인하던 내가 이런 감정을 느껴도 되는가. 글쓰기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소년의 범죄와 남성들을 용서해도 되는가.


덜컥 찾아와 횡설수설하던 소년의 아버지가, 여전히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는 피해 학생이, 학부모들의 소문을 걱정하던 원장님이,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나의 조카가 자꾸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 질문보다 더 먼저 소년의 글을 읽었던 순간의 감정이 찾아왔다. 모든 질문에 윤리적 딜레마가 따라와 거북했지만 하나의 생각만은 분명했다. 나는 정말로 소년이 글을 잘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글쓰기는 세상과 연결되는 수단이니까. 자신의 이야기를 마주하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미안하고 화나고 미워하고 사랑하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세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살아가기를 바랐다. 너무 큰 욕심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계약직 학원 강사고 그 아이의 삶에 개입해도 된다고 누구도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다 여름방학이 끝나며 소년은 사라졌다. 원장님은 소년의 아버지가 학원비를 내지 않았다고 내게 통보할 뿐이었다. 소년이 그렇게 떠나버린 게 슬펐다. 내 안에는 해결되지 않은 질문들이 남았기 때문이다.

소년의 아버지는 돌봄의 역할을 사교육에 떠넘겼고, 원장님은 교육의 의무를 강사에게 떠넘겼다. 나 역시 잘못된 문제를 바로잡지 않고 다음으로 미뤄두는 어른이다. 떠넘기고 책임지지 않는 어른들 사이에서 어린이는 이리저리 옮겨진다. 어린이의 욕망은 도외시되거나 제어된다. 그리하여 때론 잘못된 방식으로 표출하기도 한다. 소년은 나에게 떠밀려 왔다. 그 살 어린이의 여백을 생각한다. 그가 마저 쓰지 않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무엇을 해야 했을까. 어린이의 여백과 어른의 자리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작가의 이전글 빨간 열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