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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그린 Feb 22. 2024

파랑이의 개성

오늘은 초등학생 2학년 마지막 수업이었다. 새 학기를 맞이하면 아이들은 학년이 바뀔 테고 나는 학원을 떠나게 된다. 원장님과는 한 달 전부터 우리의 헤어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계속해서 함께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았지만, 새롭게 시작할 일과 병행하는 것은 어렵다고 결론지었다. 학생들과 어떻게 작별할 것인가 고민했는데 마땅한 인사말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새로운 선생님을 소개해주는 것으로 갈음했다.


그런데 유독 파랑이가 마음에 걸렸다. 파랑이는 원장님의 딸이다. 파랑이를 처음 봤을 때부터 섬세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아끼는 도장을 유치부 수업에 사용하라고 선물했고, 학생들이 실내화를 아무렇게나 벗어두고 가면 군말 없이 정리했고, 내게 말을 붙이고 싶어도 바빠 보이면 멀찍이 앉아 기다렸기 때문이다. 파랑이는 섬세한 만큼 예민하기도 했다. 한 아이가 수업 시간에 학원 화장실이 더럽다고 항의를 한 적이 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파랑이는 매우 자존심이 상해서 곧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외에도 학원에 간식이 떨어지는 등 아이들이 사소한 문제로 불평을 할 때마다 파랑이는 속상해했다. 나는 파랑이가 원장님 딸로서 느끼는 부담감이 안타까웠다. 그 짐을 내려놓기를 바랐는데 내가 마땅히 노력한 것은 없었다. 그래서 파랑이에게 약간의 부채감을 느꼈다.


마지막이라 그런지 오늘따라 파랑이가 내내 곁을 맴돌았다. 할 말이 있는 듯 보였지만 쉽사리 말을 걸지 않았다. 기껏해야 수업에서 어떤 글쓰기 활동을 할지 물어보는 정도였다. 나는 파랑이에게 따로 작별 인사를 할까 고민하다가 마음을 접었다. 그런데 퇴근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파랑이가 다가왔다. "선생님, 사실은 말이에요." 그러다 갑자기 말을 멈추고 자리를 떴다. 이 모습을 본 원장님이 내게 속삭였다. "어제부터 선생님이 떠난다는 걸 알게 되어서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아쉽다는 말을 달리 표현할 수가 없어서 저래요." 파랑이는 자신의 마음을 전달할 정확한 말을 찾고 있었다. 그 망설임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어른인 나는 말하기를 포기했는데 파랑이는 용기를 냈기 때문이다. 사소함에 진심을 다하는 파랑이의 태도를 응원하고 싶었다.


다행히도 오늘 수업에서 이런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다. <조금 천천히 가도 괜찮아>라는 책을 다뤘다. 이 작품에는 혼자 있기 좋아하고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는 아이가 나온다. 작품 속 부모님은 아이의 사회성을 기르기 위하여 온갖 학원에 보내지만 실패한다. 나는 독서지도를 하며 학생들에게 '개성'에 대해 가르쳤다. 이 책의 주인공은 잘못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혼자 있기 좋아하고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는 것은 그 아이의 개성이라고 말했다. 개성은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특별한 지점이라고도 덧붙였다. 글쓰기 시간에 파랑이는 개성에 대한 멋진 글을 썼다. 파랑이는 자신의 개성을 소개하며 이런 문장으로 마무리했다.


개성은 개성으로 이어집니다.


예민함과 섬세함은 한 끗 차이고, 파랑이는 아마도 이 점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을 글로 표현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선생님으로서 나의 역할을 다 한 기분이었다. 파랑이의 문장을 곱씹으며 나의 개성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불안이 많은 인간이다. 편안해지기 위해 무언가를 믿으며 나아가야 한다. 나는 다정함이 공동체를 건강하게 유지해 준다고 믿는다. 내가 속한 곳에서 안정감을 느끼기 위해서 정겨우려고 노력한다. 파랑이 말대로 개성은 개성으로 이어지고, 불안함은 다정함으로 이어진다.


나는 올해 4월부터 새 일을 시작한다. 어린이를 가르치는 일이 적성에 맞았기에 이 현장을 떠난다는 것이 아쉽다. 어린이들이 그동안 내게 보여준 마음을 기억하며 어린이의 세계와 닮은 다정한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싶다. 사람들의 개성을 존중하며, 나의 개성을 사랑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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