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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동 호서비 Mar 07. 2024

안동내방가사이야기 3. 김우락 ‘해도교거사海島僑居辭’

석주 이상룡 부인 김우락 만주망명기

3. 석주 이상룡의 아내 김우락 ‘해도교거사海島僑居辭’     


‘해도교거사’는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의 부인 김우락(1854~1933) 여사가 쓴 내방가사이다. 석주 이상룡을 따라 고향 안동에서 만주로 가는 여정과 만주에서의 고단한 삶, 남성들 못지않게 독립투쟁에 힘쓰고 물자 지원 등에 몸담았던 여성들의 독립운동을 엿볼 수 있다.     

 

내방가사 '해도교거사'(이재업 소장) @이호영

김우락 여사는 현 안동시 임하면 내앞 마을에서 4남 3녀 가운데 맏딸로 태어났다. 오라버니 김대락 선생은 만주로 망명한 뒤 석주 이상룡과 함께 경학사 등을 조직하고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김우락은 19살에 석주 이상룡과 혼인해 종부가 됐지만 1911년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며 만주로 망명한 남편을 뒤따라 만주로 떠났다. 김우락은 만주 망명 후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찾아온 청년과 애국지사들의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황무지를 개척하는 등 뒷바라지에 힘썼다. 김우락과 당시 만주 망명 여성들의 삶은 피폐하기 그지없었다. 많은 재산을 두고 고향을 떠나온 망명객으로 낯선 땅에 정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가족을 건사하기도 힘든 여건 속에서도 독립투사들의 먹을거리와 입을 거리, 잠잘 곳 등을 챙겼고 특히 중국인들의 괄시와 만주의 강추위를 견디며 고단한 이방인의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김우락 남편 석주 이상룡(경북독립운동기념관 전시 사진)@이호영

이때 고단한 삶이 내방가사 ‘해도교거사’에 담겼다. 석주와 함께 독립운동의 최전선에 뛰면서도 김우락은 ‘해도교거사’와 ‘정화가’, ‘정화답가’, ‘조손별서’, ‘간운사’ 등 다양한 내방가사를 지었다. 안동 양반 가문 출신답게 김우락은 자신이 겪은 만주 생활과 고된 심정 등을 가사에 담았다. 당시 만주에서 생활했던 독립투사들의 삶은 남겨진 기록이 별로 없었지만 ‘해도교거사’ 등 내방가사 발견되면서 베일에 가렸던 독립운동가들의 만주 생활이 낱낱이 밝혀졌다.     


사당에 통곡하고 산천에 눈물 뿌려

고향땅 뒤로하고 먼길을 떠나자니

푸른솔이 검어지고 바른나무 굽어지네

일가의 슬픈곡성 먼산을 넘어오네

일색이 참담하여 희던 바위 검어지네

눈물은 비 내리듯 간장은 끊어지네

슬프다 우리나라 이좋은 호강산에

헌신같이 버리고서 그 어디로 가잔말고

강산아 잘 있거라 다시와서 반기리라     


  내방가사 ‘해도교거사’는 독립운동사를 담고 있으면서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연구가 시작된 것은 불과 몇 년 전이다. 고성 이 씨 후손 이재업(현 성균관유도회 경상북도본부 회장)은 자신의 소장 자료 가운데 2016년 이 가사를 발굴해 『향토 사랑방 안동』 통권 162호(2016 5·6월호)에 발표했다. 제목 ‘해도ㅁ거사’ 가운데 훼손된 글자는 국어학자 정연정·천명희의 연구를 통해 「해도교거사」로 추정되었다. ‘바다 건너 임시로 몸을 붙여 사는 삶’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1911년 10월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해 1월 고향 안동을 떠나 추풍령을 넘어 압록강을 건너는 망명 경로를 비롯해 중국 환인현과 항도촌, 유하현 영춘원에 이르는 정착 과정이 상세히 실려있다. 특히 가사 말미에는 영웅 열사를 모으면 독립 국권이 쉽다며 여자이지만 조국 독립을 위해 한 몸을 바치겠다는 결연한 의지도 보인다.      


어와 이내 몸이 청춘소년이 어제였는데

육십의 나이 늦었구나. 이 몸 어찌 다시 젊어

영웅열사 모으면 독립국권 쉬울 것이니, 

아무리 여자라도 이때 한 번 쾌설하고자 하니,

백수노인 우리 주군 만세만세 만만세야

이름이 하늘을 덥고 만인지상 되시며

복국의 공신이 되셔서 천만세 무궁하도록 

만대의 영웅이 되지어라...   

  

내방가사 '해도교거사'를 공개한 이재업 회장@이호영

개인소장품인 ‘해도교거사’는 현 성균관유도회 경북도본부 회장인 이재업 씨가 50년 전 20대 초반에 친척이던 이웃으로부터 구입했다고 한다. 그냥 옛 서류 뭉치로 알았고 집안 어르신 것이라는 이웃의 설명에 아무 생각 없이 샀다. 그 뒤 존재 자체를 잊고 있다가 집안 유물을 정리하던 도중 가사를 발견하고 작자와 내용을 알고 싶어 불과 몇 년 전에서야 국어학 전공자에게 연구를 맡겼다. 그 결과 이 내방가사가 석주 선생의 부인인 김우락 여사가 썼고 그 내용 또한 나라를 잃고 망명을 떠난 일가족의 고단한 삶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한국독립운동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참, 거지도 그런 거지가 없었대요. 1932년 석주 선생이 서거하자 김우락 여사가 귀국길에 올랐는데, 망명 갈 때도 갖은 고초 끝에 만주 땅을 밟았는데 돌아올 때는 더 비참했다고 해요. 집안 어르신들께서 말씀하시기를 김우락 여사 일행이 석주 위패를 들고 예천역에 도착했는데, 몰골이 말이 아니었답니다. 옷은 남루하기 짝이 없고 일행 모두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고 해요... 예천역 근처에서 목욕을 시키고 옷을 갈아입히고 해서 고향 안동으로 들어왔답니다.”     


이 회장은 집안 어르신으로부터 김우락 여사의 귀국 모습을 이렇게 전해 들었다고 말한다. 김우락 여사는 수많은 재산을 가진 임청각 종부로 만년을 보낼 수 있었지만 57세에 남편 석주를 따라 독립된 조국을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만주로 망명했다. 하지만 석주의 서거로 21년 만인 78세에 고향 안동으로 돌아왔지만 조국 광복은 고사하고 석주의 주검마저 남의 땅에 두고 귀국해야 하는 처지였다. 고달프고 한 많은 인생 역정 탓인지 김우락 여사는 귀국 후 1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재업 회장의 전통문화연구소 효원재@이호영

이재업 회장은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에 전통문화연구소 효원재曉元齋를 마련하고 고서와 서화, 골동품 등을 수집하고 있으며 특히 고성 이 씨 집안의 유물이라면 무엇이든 찾아서 보존하고 있다. 특히 훈민정음 발굴에도 노력을 많이 들여 『훈민정음해례본』 목판 복간과 『훈민정음해례본 안동본』 발행, 『훈민정음 언해본』 발행 등 우리 문화 살리기에도 앞장서고 있다.    


 출처:한국국학진흥원 기획 '안동문화 100선'.  이호영. 『어와 벗님네들』. 안동내방가사이야기. 민속원.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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