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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동 호서비 Mar 14. 2024

안동내방가사이야기 4. ‘눈물 뿌린 이별가’ 김우모

서럽도다 서럽도다 망국백성 서럽도다

4. 만주망명가사 ‘눈물 뿌린 이별가’ 김우모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은 고려 개국 공신인 권행 선생의 후손 가운데 복야공파가 세거를 이뤄 500여 년간 살아온 유서 깊은 마을이다. 세종 때 권항權恒(1403~1461) 선생이 정착한 이후 동성마을로 지금까지 내려온다. 이 마을은 일제 강점기 때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수많은 인재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우암 권준화 선생을 비롯해 권오헌, 권영식, 권오상 등 14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고 특히 6.10 만세 운동을 준비하다 체포돼 옥중에서 순국한 권오설(1897~1930) 선생이 이 마을 출신이다. 권오설은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 운동가로 그의 영향으로 가일마을에서 사회주의 운동가가 많이 배출됐다. ‘안동의 모스크바’라고 불렀다.     

안동 가일마을 출신 독립운동가 권오설 선생(경북 독립운동기념관 전시 사진)@이호영


내방가사 ‘눈물 뿌린 이별가’는 1940년 독립투사 권오헌 선생의 어머니 김우모 여사가 고향 안동 가일마을을 떠나며 지었다.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 전경@이호영

 

“자여손이 선행하야 다려가려 함이로다

 만주길 몃철리를 속졀업시 가난고나

 가일아 잘잇거라 다시볼수 잇겟나냐

 졍산이 둘너잇고 낙낙쟝송 욱어진대

 동구에 못이잇서 팔대지에 하나로다

 조상님이 혁혁하고 오백년 살았도다

 이조흔 명기에서 나는엇디 떠나가나” 

       <눈물 뿌린 이별가 中에서. 경북 독립운동기념관 소장>     


내방가사 '눈물 뿌린 이별가' @경북 독립운동기념관 제공

나라와 부모 산소를 두고 고향을 떠나는 노모의 안타까운 심정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자녀들이 먼저 가서 만주로 오라고 부모를 부르니 아니 갈 수 없는 심정과 몇천 리 머나먼 길을 떠나면 고향으로 다시 올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정든 이웃과 조상을 두고 떠나는 심정이 가사에 담겨있다.     

김우모(1874~1965) 여사는 의성 김 씨 학봉 선생 후손으로 가일 마을 권동만과 혼인해 1899년 첫아들인 권오윤을, 1905년에 둘째 아들 권오헌을 보았다.      


안동 가일마을 수곡 고택(독립운동가 권오헌은 이 집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호영 

권오헌은 1929년 8월 신간회 안동지회 임시대회를 앞두고 ‘압제와 박해를 헤쳐나갈 투사가 필요하며, 필사적으로 싸울 작전계획을 수립하자’는 내용을 담은 글을 임시대회에 보냈는데, 일제는 이 글이 대단히 선동적인 불온문서라는 이유로 그를 구속했다. 이 사건으로 권오헌은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 형을 받았다. (김희곤, 『가일마을과 민족운동』 한국국학진흥원. 2009)      

권오헌은 그 후 1935~1936년경 만주 유하현 삼원포로 망명했고, 안동의 가족을 만주로 불러서 1940년 부모(권동만, 김우모)도 만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때 부친 권동만은 68세, 김우모는 67세였다. 이른 나이도 아니고 환갑을 넘어 칠순을 앞둔 김우모 여사로서는 아들을 찾아 몸은 만주로 가지만 떨어지지 않은 발길을 어찌할 수 없었다.     

내방가사 '눈물 뿌린 이별가' 앞부분 @경북 독립운동기념관 제공

“어와 벗님내야 내말삼 들어보소

장장춘일 긴긴날에 십오야 달발글때

윳놀고 손벽칠때 여러분이 질기실 때 

나도함게 생각하오 이가사 지은뜻슨

잇지말자 지엇스니 날본다시 보압소서

환우하는 꾀고리가 봄동산에 울그덜랑

고향계신 동무들을 나도생각 할줄아소

귀향하는 기러기가 추천에 울그덜랑

말리이역 먼아먼데 소식이나 전해주소  

                    <눈물 뿌린 이별가 中에서. 경북 독립운동기념관 소장>     


내방가사 ‘눈물 뿌린 이별가’에는 자신들이 고향을 떠나는 이유를 나라 안의 당파 싸움과 문란한 정치상에 따라 나라를 잃었고 망국의 백성으로 아무리 살려고 해도 살 수 없는 현실을 개탄하는 내용을 담았다.     


”나라에난 골륙상쟁 죠졍에나 소인만아

치세는 드물엇고 난세는 허다하다

당파싸움 시작해서 한당파 득세하니

타당인재 젯처놋코 상놈인재 빼여놋코

그즁인물 만다한들 얼마나 만을손가 

탐관오리 들석대니 백성이 피페하다

물건너 왜놈들이 그틈타서 건너오네

오력과 칠졋들과 합세하여 나라빼서

정치를 한다는게 백성이 도탄이라 

서럽도다 서럽도다 망국백성 서럽도다

아무리 살여해도 살수가 바이없네

충군애국 다파라도 먹을길 바이없고 

효우를 다파라도 사라날길 바이업서

서간도라 북간도로 가는사람 한량없네

가자가자 나도가자 애국하는 사람따라 

가자가자 너도가자 돈골병든 사람아

고국을 더나가니 그심사 엇더하리

백발노인 두노인도 그즁에 끼엿구나“

            <눈물 뿌린 이별가 中에서. 경북 독립운동기념관 소장>   

  

권오헌 선생은 1929년 불온축문 사건 때 그의 직업이 잡화상이었던 점으로 볼 때 유하현과 하얼빈에서의 회사 생활은 생활과 은신을 위한 방편이었고, 주 활동은 독립운동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해방되자 권오헌과 김우모는 가족과 함께 가일마을로 돌아왔다. 권오헌은 치안유지회 선전부장을 하다 49년 말에서 50년 초에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다. 미결수로 있던 도중 6·25가 발발했고 인민군이 닥쳐오기 전에 대구형무소에서 수형자를 사형시키는 과정에 희생당한 것으로 보인다. (고순희 『만주망명과 가사문학 연구』 제4장 일제강점기 가일마을 안동권 씨 가문의 가사 창작)


안동 가일마을 입구 '항일구국열사 권오설 선생 기적비'@이호영

김우모 여사는 6.25를 전후해 아들 권오헌과 손자를 잃었고 손녀는 월북했다. 남편 권동만은 1951년 사망했다. 대구형무소에서 아들 권오헌은 재판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었지만 사회주의자란 이유로 그동안 이름조차 언급할 수 없었다.


안동 가일마을에서 권오헌 선생의 옛집을 문의했지만 마을 주민들도 잘 모른다는 답변을 받았다. 마을 안내 표지판에는 권오헌, 권오설 선생 등 독립운동을 펼쳤던 투사들의 이름은 있었지만 현재 밭으로 변한 권오설 선생 생가터는 겨우 찾을 수 있었지만 권오헌 선생 옛집은 확인하지 못했다. 

          

안동 가일 전통문화마을 표지판 @이호영

하지만 마을 주민 권대산 씨를 통해 권오헌의 아들 권대근 씨의 연락처를 알게 되었고 그에게서 권오헌 독립투사는 마을 한가운데 있는 수곡고택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권오헌의 아버지 권동만은 결혼 후에도 한동안 이 고택에서 생활했고 권오헌 선생은 여기서 태어났다고 한다.


"첫째 할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둘째였던 우리 할아버지께서 결혼 후에도 큰집인 수곡 고택에 남아있었습니다. 그때 저의 아버지가 태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아버지 호적초본 주소도 '수곡 고려'로 돼 있는 걸로 봐서 수곡 고택이 생가가 아닌가 그렇게 짐작하고 있습니다.  (권오헌 아들 권대근 전화 인터뷰)


수곡 고택(樹谷古宅)은 국가민속문화재 제176호로 수곡 권보 선생을 기리기 위해 후손이 1792년 세웠다.

권보는 일생을 도학에 전념하면서 검소하게 생활하였다. 후손들은 사랑채 지붕을 소박하게 맞배지붕으로 하여 권보의 검소한 정신을 지키고자 하였다. 


 출처:한국국학진흥원 기획 '안동문화 100선'.  이호영. 『어와 벗님네들』. 안동내방가사이야기. 민속원.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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