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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동 호서비 Mar 22. 2024

안동내방가사이야기 5. 수졸당 윤은숙 종부

윤은숙  <종부가>  “조상부모 받들기난 인간사 당연인데”

윤은숙 <종부가> “조상부모 받들기난 인간사 당연인데”     


안동시 도산면 하계길 동암 종택은 퇴계 이황 선생의 셋째 손자인 동암(東巖) 이영도李詠道(1559~1637) 선생의 종택이다. 동암의 장자 수졸당守拙堂 이기李技(1691~1654) 선생의 당호를 사용하여 수졸당으로 부른다. 수졸당은 퇴계 선생께서 분가하여 처음 터를 잡은 양진암 아래쪽에 있었다. 1975년 안동댐 완공으로 본채와 정자, 사당, 재사 등이 현재 자리로 옮겨졌다. 지방문화재 203호이다.     

안동시 도산면 동암종택 '수졸당'@이호영

현재 수졸당의 종부는 43년생으로 올해 81세인 윤은숙 씨다. 22세에 동암 종가 이재영 종손과 결혼하면서 곧바로 종부가 되었다. 

파평 윤 씨로 경산에서 자란 종부는 대구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로 진학했지만 학교를 다 마치지 못했다. 대구서 함께 살던 오빠가 전근을 가는 바람에 어린 딸 홀로 대구에 남아있을 수 없다는 부모의 방침에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종부는 그 후 어머니로부터 가사를 익히며 책을 읽었다고 한다. 그러다 22세에 동암 종택 수졸당 15대 종손인 이재영과 결혼하고 그해 첫딸을 얻었다. 종부는 옛 풍습대로 어른끼리 혼인을 정해서 서로 얼굴도 못 보고 결혼했다고 한다.     

내방가사를 읽고 있는 수졸당 종부 윤은숙@이호영

종부는 철도청에 근무하는 종손을 따라 이리저리 이사 다녔다. 시어머니가 하계 마을에 남아 수졸당을 지켰다. 하지만 해마다 불천위 제례부터 4대 봉제사는 물론이요, 집안의 다채로운 행사에 이르기까지 종부의 손길이 필요로 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제례 등을 준비하느라 도산 수졸당을 오갔고 근무지 집 살림과 함께 자녀 돌봄과 시동생 공부 등도 모두 종부의 몫이었다.      

종부가 수졸당에 완전히 들어온 것은 1996년이다. 홀로 평생 수졸당을 지켜오던 시어머니가 1995년 돌아가시고 이듬해인 1996년 이재영 종손이 퇴직하고서부터이다. 수졸당 종부가 된 후 처음으로 안동에 완전히 정착하게 됐다.     


수졸당 종부는 내방가사를 처음으로 접한 것은 큰집 신풍의 백모님이 읊으시던 ‘한양가’라고 한다. 백모와 사촌 언니가 편지를 주고받으며 읽는 소리가 늘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어린 시절에 각인된 기억은 종부가 수졸당에 들어오니 이곳에는 일상생활이었다고 한다. 마을 안 어른들이 모이면 내방가사를 짓고 읽는 게 하나의 풍습이었다. 동암 종택이 있던 하계 마을에서는 어느 집에서든지 내방가사를 짓고 읽었다. 시어머니도 그랬다. 남의 가사를 보고 듣고 이야기도 잘하셨다.      


“국호(國號)는 조선(朝鮮)이요 도읍(都邑)은 한양(漢陽)이라

단군(檀君)의 구족(舊族)이요 기자(箕子)의 유풍(遺風)이라

의관(衣冠)도 화려하고 문물(文物)도 거룩하다

여염(閭閻)은 억만(億萬)가(家)요 성첩(城堞)은 사십(四十)리(里)라

동편은 종묘(宗廟)되고 서편은 사직(社稷)이라

                                       <한양가 (漢陽歌) 중에서>    

      

“내방가사는 따로 배우지 안 했어요. 저가 파평 윤인데요. 신풍이란 동네에 파평 윤가만 600세대 살았어요. 타성이 한 집도 없었어요. 그러면 딸네들하고 옛날에는 한 집에 7~8남매씩 되니까 동네 또래 또래가 많았어요. 그러면 맨날 뉘 집 이야기, 얘기를 많이 듣지요. 그리고 백모님이나 숙모님이나 반가에서 오셔서 얘기를 많이 하셔서 듣곤 했지요. 제가 어릴 때 가사를 안 써도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참아야 하고 어른께 순종하고 효성 있어야 하고 귀 아프도록 들었지요. 어릴 때는 다 싫었어요. 그런데 이 집에 와서 살아보니까 여러모로 그래야 했었고, 이 동네 어르신들은 붓만 던져 주면 다 가사를 써요. 붓을 주면 누구든지 문장을 다 쓸 수 있었어요. 하계 마을에는, 수몰되고 하계가 없어졌잖아요. 우리 어른(시어머니)도 글을 잘하셨어요. 우리 어른은 문장력이 한문 토로 굉장히 수준이 높았어요. 어른이 글을 못하게 하셨어요. ‘내만 해도 된다. 니는 집이 어설프고 그러면 안 되니까, 집이나 잘 간수하고 아이들을 잘 키우고 글은 안 해도 된다.’ 그래서 어른 계실 때는 글을 못했어요. 그런데 힘들잖아요. 없는 집에 수졸당 없다는 소리 정말로 대문밖에 나가지 않도록, 우리 어른은 굶다시피 했어요. 대문밖에는 절대 그 말씀을 안 하시고 그랬어요”

                                             <수졸당 종부 윤은숙 인터뷰 중에서>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어른이 남긴 가사나 편지를 정리하려고 시작한 것이 바로 글쓰기와 내방가사이다. 글쓰기, 서예로 2009년에 제9회 경상북도 서예 전람회에서 흘림체 작품인 ‘해동만화가’로 대상을 받았다. 서예 작가도 되었다.     

수졸당 종부 윤은숙과 마을 어르신들@이호영

수졸당 종부는 집 안에 있거나 이웃 어르신들이 갖고 있던 가사를 다시 적어서 보관하면서 내방가사의 명맥을 그대로 이었다. 옛날 양반가에서 자신이 짓거나 이웃의 가사를 빌려와 필사하고 그 필사본이 다시 이웃에게 전승되던 전통이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이다. 지금도 이웃 어르신들이 쓴 ‘은사가’와 ‘하계마을 화전가’ 등을 필사해 갖고 있다.     


“어느 세월 지나고 나니까 하계에 글이 사라졌어요. 그래서 글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에, 시어머니, 동네 어른분들 글을... 어른 돌아가시고 상례를 치르면서 한 자 두 자 쓰다고 도저히 안 돼서 서실에 가서 글씨를 좀 배우고 일 년, 이 년, 십 년 지나다 보니까, 공모전도 하고 해서 경북 작가 되고, 휘호 대회 작가 되고 등 하다 보니까, 제가 쓴 건 일기라요. 가사도 아니고 일기를 쓰다 보니까 밖으로는 가사가 됐어요.”

                                <수졸당 종부 윤은숙 인터뷰 중에서>


윤은숙 내방가사 '종부'@이호영

”사시절후 쉬임엄서

구월상풍 소슬흔대

자연속에 저벌래는

어이그리 설어우노

일생일사ᆞ 인간사ᆞ

그누가 쉬우리요

조상부모 받들기난

인간사 당연인데

살아온길 돌아보니

아리고도 설러워라

동방아ᆡ 공자ᆞ라고

만인들에 추앙받는 

조상님 성덕에

누가될ᄭ가 기거도부동

부모육훈 못지킬ᄭ가

숨죽여 살아온길

청빈한 가장ᄯ가라

고생을 낙을삼고

가난을 양식삼아

맨발로 달려온길

높고깊은 기왓골

상설찬 빈방안에

외롭고 설은마음

어이라 형용하리

종부도 사람인데

이무슨 죄벌이고

조상님 혼령이여

굽어살펴 주옵소서

                 <윤은숙 내방가사 ‘종부’>          


필력이 좋은 종부가 내방가사를 붓으로 직접 쓴다. 종부로서의 소회를 쓴 ‘종부’를 비롯해 ‘전통주 찬양가’, ‘송년가’ 등과 함께 시어머니가 즐겨 읽으시던 ‘청량산가’ 등이 있다. ‘전통주 찬가’와 ‘청량산가’는 2021년 한글 박물관 내방가사 전시회 ‘이내말삼 들러보소, 내방가사‘에 전시됐다.

     

윤은숙 내방가사 '전통주찬가'@이호영

”남풍이 건들불어

화기라ᆞ갈 실어왓나

산야나ᆞ간 연록이요

각색꽃 만발하ᆞ네

안동댐 절경아래

월영교 얼론지나

당위에도 구름잇네

한자ᆞ마을 들어서니

내빈외객 가득하고

오늘행차 준비느라

야단법석 분주하에

각곳에서 오신근님

반갑고도 감사ᆞ해요

오늘모임 ᄯ긋이깊소

경북의 전통주랄

모두어이 자랑하세

기불ᄯ개도 술한잔

슬플ᄯ개도술한잔

술음식이 으ᄯ금이라“ 

                <윤은숙 내방가사 ’전통주찬가‘>   

  

윤은숙 내방가사 '청량산찬가'@이호영

”청량산 육육봉에

만탑이 왼말인가

안자ᆞ서 하는염불

유리세계 안인럴가

새는날에 하는염불

동방세계 안인런가

이리좋은 이극낙을

안이가고 말거신가

청량산 돌탑밑에

일월성신 계신곳에

약수암에 모욕하ᆞ고

야시당에 불을발켜

전생후생 지은죄을

일시에 소멸하고 

육체는 명산가고

영혼은 극낙가고

여러열성 선조님네

구술같은 염불밧아

극낙으로 인도하ᆞ소

소백산에 술씨받아

태백산에 모중부어

은하수 물을주어

여러보살 매갓꾸어

그나무 장성하ᆞ니

나무마다 불법이요

잎잎이 설법이요

그나무 베어다가

열두칸 배를 모아

앞칸에는 화주실고“

               <윤은숙 내방가사 ’청량산가‘>     


종부의 내방가사 활동은 ’ 안동 내방가사 전승보존회‘ 이선자 회장과 인연이 깊다. 진성 이 씨 이선자 회장이 내방가사를 보존하기 위해 조직을 만들었다며 수졸당 종부에게 연락했고, 그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오면서 보존회 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서예 작가이자 심사위원이기도 한 종부는 내방가사 시연 때 붓글씨로 가사를 쓰는데 봉사한다. 2022년 내방가사가 유네스코 아시아 태평양 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때도 많은 내용을 적고 정리했다.     


수졸당 종부와 건진국수 체험 안내판  @이호영

또 불천위 제례부터 4대 봉사로 음식을 만들고 손님을 대접하면서 익힌 양반가의 음식 솜씨로 

수졸당 건진국수가 대한민국 대표 국수로 세계 국수 대회까지 나갔다. 건진국수는 유월 보름날 유두절에 올리던 제상 음식이다. 수졸당 고택 체험에는 코로나 19 전까지만 해도 관광객이 제법 몰려왔다. 또 종가 음식을 잘한 덕분에 종가 음식 관련 행사도 무수히 나갔다.      


그리고 지난 2022년 종부로서 뜻깊은 일이 있었다. 예안향교에서 수졸당 종부를 제례 때 첫 여성 제관으로 선정했다. 아헌례亞獻禮를 한 것이다. 여성이 제관으로 참석하기 어려운 예법이었지만 수졸당 종부로 살아온 세월을 인정해 준 것 같아 종부도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80을 넘긴 종부는 지금도 수졸당에서 종손과 함께 생활한다. 요즘 종손의 몸이 좋지 않아 걱정이 많으나 종부는 글을 쓰고 건진 국수를 만들고 농사를 짓는다. ’이육사 와인‘ 공장에 납품할 포도 농사에 밭을 일군다. 종부는 ’조상을 받들고 부모를 받드는‘ 우리 어르신의 삶을 여전히 실천하고 있다. 


 출처:한국국학진흥원 기획 '안동문화 100선'.  이호영. 『어와 벗님네들』. 안동내방가사이야기. 민속원.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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