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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동 호서비 Apr 13. 2024

안동내방가사이야기 7. 만주망명 안동인 내방가사

혁신 유림과 만주 망명

혁신 유림과 만주 망명 안동인 내방가사     

 

1910년 경술국치 후 나라를 걱정하던 이 땅의 지식인들은 두 갈래로 나눠진다. 한 갈래는 자진 순국, 즉 단식 등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 강한 절개를 드러낸다. 다른 한 갈래는 만주나 중국 땅으로 망명해 결사 항전을 다진다.      

안동을 비롯한 경북 북부권 지식인들 상당수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가산을 정리하고 만주로 망명한다. 이른바 ‘혁신 유림’, 유학의 전통을 지키면서도 자주적인 민족주의 사상과 근대 국가 이념을 지닌 이들은 무장 투쟁으로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결심을 실천한다.    

 

안동 출신으로 만주에 망명한 혁신 유림은 김대락金大洛(1845~1914), 김동삼金東三(1878~1973), 이상룡李相龍(1858~1932), 이원일李源一(1886~1961), 김원식金元植(1888~1940), 류인식柳寅植(1865~1928) 등으로 이들은 가산을 정리하고 고향을 떠나, 만주에서 신 한인촌을 만들어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는 등 독립 투쟁에 나섰다.     


1911년 무렵에 안동과 주변 지역에서 만주 망명길에 오른 사람은 100여 가구 천여 명에 가까울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이들이 만주로 망명할 때 혼자만 간 것이 아니라 가족을 데리고 갔다. 부인은 물론 아들과 며느리, 딸과 사위, 손자 손녀까지도 함께 갔다. 남자들과 함께 여자들도 망명길에 동참했다. 만주로 동반 망명한 여성들은 처음에는 신 한인촌에서 가사에 종사하거나, 만주 각지의 독립운동 현장에서 남성의 독립운동을 내조했다. 직접 독립운동에도 뛰어들었다.     


경북에서 망명한 여성들 상당수가 고향에서 내방가사를 즐기고 창작하는 계층이었다. 혁신 유림의 부인이나 가족으로 만주에서도 내방가사를 직접 창작하거나 함께 암송하고 낭송했다. 내방가사를 쓰고 읽으면서 떠나온 고향과 일가친척을 그리워했고 힘든 만주 생활을 이겨나간 것이다. ‘만주 망명 내방가사’가 탄생한 이유다.     

또 경북 고향에는 함께 망명하지 못한 가족이 남아있었다. 아버지, 남편, 아들, 딸 등이 만주로 망명했으나 고향에 남아 떠나간 가족과 친척을 그리워한 여성들도 내방가사를 썼다. 이들의 내방가사는 ‘만주 망명인을 둔 고국인의 내방가사’로 분류된다.     


안동을 중심으로 하는 경북 지역 출신의 여성이 지은 ‘만주 망명 내방가사’로는 <해도교거사>, <정화가>, <간운사>, <조손별서>, <정화답가>, <위모사>, <원별 가라>, <눈물 뿌린 이별가> 등 8편이 있다.      

이 가운데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부인 김우락이 쓰거나 받은 내방가사는 5편이다. <해도교거사>, <정화가>, <간운사>, <조손별서>, <정화답가> 등이 그러하다.    

 

<해도교거사>는 김우락이 만주에 도착하여 처음 쓴 내방가사로 1911년 작품이다. 경술국치와 이상룡에 대한 경무청의 조사, 만주 망명 노정, 만주 도착과 생활 등 그녀의 나이 57세에 아들 내외와 손자 등과 함께 고향을 떠나야만 하는 비통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해도교거사>는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궁핍하고 처참한 생활상을 잘 알려준다. 독립운동가들은 발각될 수 있다는 위험성 때문에 대부분 글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독립운동가에 대한 개인 생활기록은 제대로 찾을 수 없다. 내방가사 <해도교거사>가 늦게나마 발견되면서 독립운동가의 만주 망명 생활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됐다.      


“합의 잇나ᆞ간 수간토옥 공집이 잇단말가

자ᆞ감시나 견다ᆡ렷고 게를나가 몇날만의

쳥인의게 ᄶ곳겨나니 졀나ᆡ제타ᆡ각 바린죄로

이(뉴)잇나ᆞ간 일이로다 북자ᆞ간셔 십이지(러)

지명은 둘넝거우 슈간토옥 잇다하ᆞ니

어린자ᆞ손 업고안고 자ᆞ란자손 압셔우고

셜즁의 길이업셔 간신이 차ᆞ자ᆞ가니”

                   <김우락 내방가사 ‘해도교거사’>     


김우락 일행은 만주의 혹한을 잠시라도 견디기 위해 빈 집에 들어갔더니, 며칠 만에 중국인에게 쫓겨났다. 김우모는 전래 재택 즉 임청각 안락한 고향 집을 버리고 온 죄라고 자책했다. 어린 자손을 데리고 산길, 눈길을 걸어, 없는 길을 헤매며 겨우 살집을 구한다. 당시 만주 망명인들의 처참하고 궁핍한 삶을 엿볼 수 있다. 

    

<정화가>는 김우락이 <해도교거사>를 쓰고 1년 후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김우락은 70여 이 길을 이틀 동안 걸어서 통화현 합니하에 사는 큰 오빠 김대락 집을 찾아 친정 식구와 만나고, 주변 시댁 식구와 친지, 그리고 딸 강실과 사위를 만났다. 이들과 어렵게 만난 사연과 기쁨을 내방가사 <정화가>로 표현했다. 정화情話는 ‘다정한 대화’로 추측된다.      


<간운사>는 1914년 환갑 때 쓴 것이다. 고향에 있는 본인의 여형제들을 그리워하며 지었다. 어린 시절과 결혼으로 흩어진 자매들, 만주 망명으로 인한 이별, 만주 근황, 자매들에 대한 그리움 등을 담고 있다. 고향의 여동생들에게 오빠 김대락의 근황을 전하고 만주 생활을 말하면서 노구를 이끌고 백여 리씩 걷고 있지만 몸이 튼튼하니 천운이라고 한다. 혹시 고국에서 이 말을 듣고 걱정할 자매들을 안심시키기 위함으로 보인다. 

    

“어와 우습도다 이몸이 엇지하ᆞ여

타국아ᆡ와 구나ᆞ간거시 고이하ᆞ고 이상하ᆞ니

비희상반 하ᆞ계구나 바ᆡ각여리식 보하ᆡ강하ᆞ나 

자ᆞ역이 강강하ᆞ니 이들ᄯ고한 쳔운인가”

                         <김우락 내방가사 ‘간운사’>     


 작가는 타국에 와서 행동하는 것이 괴이하고 이상하니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면서 당시 환갑을 넘긴 노인의 몸으로 백여 리씩이나 걸어야 한 심정을 서술하고 있다.

<조손별서>는 1913년에서 1914년 사이에 안동 하회마을에 사는 맏손녀 유실이에게 보낸 내방가사이다. 유실이는 김우락의 아들 이준형의 딸로 망명 당시 결혼을 한 상태로 함께하지 못했다. 손녀의 성장과 결혼, 신행, 귀령부모, 남편의 망명 결심과 손녀와의 이별, 망명 후 아들 부부가 손녀를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아들 이준형이 고향 안동을 방문한 사연, 손녀를 만나지 못하는 슬픔 등을 쓰고 있다.      


“칠십여간 졀나ᆡ젯타ᆡ각 동운향망 조흔거쳐

헌신갓치 바려두고 통곡으로 ᄯ거날시의 

교자네하ᆡ 만흔소슬 일시의 등자하면

골난니 이슬셰라 좌우로 말니거날

북편의 형노좃차 월옥도망 하ᆞ자하ᆞ니

너를다시 못본거시 층쳔지하ᆞ간 될듯하ᆞ다

구담수쳔 다다르니 난봉갓흔 우리서랑

뭉즁가치 만나보고 뉴슈로 ᄯ것칠젹의

초목금슈 안니어든 자의지졍 업슬소야”

                          <김우락 내방가사 ‘조손별서’>     


<정화답가>는 김우락의 아래 동생 김정락의 아내인 영양 남 씨가 김우락의 <정화가>를 보고 쓴 답가이다. 김우락과의 인연, 통화현에 정착한 과정, 김대락의 방문과 김우락의 만남, <정화가>에 담긴 김우락의 농담 등에 대한 반박과 감회 등을 담고 있다.     


임청각 종부 김우락의 내방가사와 함께 만주 망명 안동인의 내방가사로 <위모사>와 <눈물 뿌린 이별가>가 있다.   <위모사>는 김우락 종질인 김문식의 아내 이호성이 지은 내방가사이다. 김문식은 1912년 봄에 고향 안동을 떠나 김대락이 있던 서간도 통화현에 도착한다. <위모사>는 이때 지은 것으로 보인다. 이호성의 나이 22살로 친정어머니가 만주로 떠나는 이호성 딸을 위해 지은 <송교행>의 답가이다. 이호성은 접경지역에 이르러 고국에서 마지막으로 보내는 심정을 가사로 읊었다. 부모에게 만수무강을 기원하고, 동기 친척에게는 자제 교육과 조국 정신 배양을, 동포에게는 개화 문명과 독립운동을 권고하고, 조국의 산과 물, 초목금수 등에게는 환국하는 날에 환영할 것을 부탁한다.  

   

“불사ᆞ강할사ᆞ 우리동포 사라날길 전혀업소

가바ᆡ안예 고기갓고 푸됴ᄭ간예 희성긋치 

살시리고 바ᆡ골파도 셰금독촉 성화갓고

아니하ᆡ도 증녁가고 다하ᆞ자ᆞ니 굴머쥭고

학졍이 니러하ᆞ니 살사ᆞ람  뉘가잇고”

                             <이호성 내방가사 ‘위모사’>     


일제강점기 우리 백성은 푸줏간에 놓인 고기처럼 살아날 길이 전혀 없고 살은 시리고 배는 고파도 세금을 내지 않으면 징역을 살고, 세금 내자니 굶어 죽고, 살아남을 사람이 없다며 일제의 학정을 고발한다.  

   

“하물며 신평심아ᆡ 남녀가 평등다ᆡ니 

심규아ᆡ  부인네도 금을버셔 ᄲ골고

이목구비 남과갓고 지각경뉸 마챵인다ᆡ

자ᆡ분다ᆡ로 사업이야 남녀가  다르가ᆡ소

극분할사 이젼풍속 부인나ᆡ 일평사ᆡ강은

션악을  몰논하ᆞ고 압자ᆡ밧고 구속하ᆞ며

전즁살이 그안이요 사라ᆞ감으로 삼겨나셔”“

                        <이호성 내방가사 ‘위모사’>     


이호성은 남녀평등의 세상이 되었음을 자각한다. 깊은 규방의 부인네들도 쓰개치마나 장옷을 벗어 버리고 이목구비나 지각 경륜이 남자와 다르지 않아 제 분수대로 사업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눈물 뿌린 이별가>는 안동 가일마을의 김우모가 쓴 내방가사이다. 김우모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국내에 돌아와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하다 만주로 망명한 아들 권오헌을 찾아 만주에 들어가서 가사를 지었다. 1940년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안동 가일마을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권오설權五卨(1897~1930)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를 많이 배출했다. 그중 한 명인 권오헌도 만주로 망명하여 1년 뒤에 형의 가족을, 1940년에는 부모를 만주로 불렀다.      


”서럽도다 서럽도다 망국백성 서럽도다

아무리  살려해도 살수가  바이없네

충군애국 다팔아도 먹을길  바이없고

효우를  다팔아도 살아날길 바이없고

서간도나 북간도로 가는사람 한량없네

가자가자 나도가자 애국하는 사람따라

가자가자 너도가자 돈골병든 사람아

고국을 떠나가니 그심사 어떠하리

백발노인 두노인도 그중에 끼었구나

                  <김우모 내방가사 ‘눈물 뿌린 이별가’>


김우모는 가사에서 조선의 당파 싸움, 탐관오리의 횡포, 백성의 피폐함으로 나라가 망했고, 오적과 칠적의 매국행위와 도탄에 빠진 백성, 망국 백성의 간도 이주와 본인 부부의 만주행, 친구와 가일마을과의 이별, 만주 가족과의 해후 등을 기록했다.     


<원별가라>는 울진군 평해 사동촌 독립운동가 황만영 문중의 며느리가 쓴 내방가사이다.

황만영黃滿英(1875~1939)은 이상룡, 김대락 등과 혼맥으로 서로 얽혀 있는 사이로 서로 연락을 취하며 만주로 망명했다. 황만영이 만주로 망명하자 문중인과 마을민 100여 세대가 그의 뒤를 따라 이주했다. <원별가라> 작가도 남편 및 시부모와 함께 1911년 봄에 고국을 떠나 만주로 망명했다. <원별가라>는 만주 망명 후 1916년경에 썼고, 작가의 나이는 20대 후반으로 추정된다.      


“북문밧  졍거장 오고가고 하ᆞ는 왜놈들

동졍을 살피노라 가작이 드러서서 치보고 네려보니

분여의  간장이나 분심이 졀로나고 살짐이 졀노ᄯ걸여

소리업난 총잇스면 몃놈우션 쥭이겟다

열심으로 겨우참고 화차ᆞ에 올나안자ᆞ”

                     <황만중 문중 며느리 내방가사 ‘원별가라’>


작가 일행은 울진에서 영천에 와서 기차를 타고 신의주로 향한다. 이때 번화한 영천을 보고 놀라면서도 오가는 왜놈을 보고 분한 마음에 살이 떨리면서 소리 없는 총이 있으면 몇 놈을 우선 죽이고 싶다고 했다. 규방의 여인인 양반가 며느리가 과격하고 충동적인 여성 전사로 돌변한다.      

만주 망명 안동인의 내방가사와 함께 만주로 망명하지는 못했지만 고향에 남아 망명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쓴 내방가사가 있다. 이른바 ‘만주 망명인을 둔 고국인의 내방가사’로 <송교행>, <답사친가>, <감회가>, <별한가>, <단심곡>, <사친가> 등이 있다.     


<송교행>은 이황의 후손인 안동시 도산면 원촌마을 이중우의 아내인 안동 권 씨가 쓴 내방가사이다. 1912년 봄에 딸(<위모사> 작가 이호성)이 사위와 함께 만주로 떠날 때 딸을 위해 지었다. 작가 나이 51세 때다. 딸을 시집보낸 어미의 심정과 서간도로 떠나는 딸에게 이별의 아픔을 노래했다. 멀고 추운 서간도로 가야만 하는 딸의 안위와 함께 다시 볼 날을 그리워한다. 그곳이 살기 좋으면 따라가겠고, 고국이 무사해지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을 기약한다.      


<답사친가>는 하회마을 류시준의 아내인 유실이가 쓴 내방가사이다. 유실이는 <해도교거사>, <간운사>, <답사친가>를 쓴 김우락의 맏손녀다. 독립운동가 이상룡의 맏손녀이자 이준형의 장녀이다. 이 내방가사는 조모 김우락이 보낸 <조선별서>에 대한 답가로 1914년경으로 추정된다. 이때 작가의 나이는 21세로 보인다. 

조모의 가사에 대한 감회와 부모 생각, 일제 치하에 처한 나라의 현실, 조부의 망명 결심과 친정 식구와의 이별, 결혼으로 인해 못 따라간 심정, 부친의 일시 환국과 이별, 조모의 환갑 축하 등을 서술하고 나라의 독립을 기원하는 내용으로 구성됐다.     


<감회가>, <별한가>는 독립운동가 성주 한개마을 이승희의 아내이자 독립운동가 이기원과 이기인의 어머니인 전의 이 씨다. 만주서 독립운동을 하는 남편과 막내아들을 생각하는 그리움과 그들을 볼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신변탄식류’ 가사이다. 남편 이승희는 1908년 62세의 나이로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해 이듬해 만주 길림성 밀산부로 들어갔다. 막내아들 이기인은 17세 때 부친이 있는 밀산부로 망명했다. <감회가>는 작가 나이 59세 때인 1913년에 창작했고 <별한가>는 1915년 작가 나이 61세였다. 두 작품 모두 남편과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의 슬픔을 계절의 순환에 따라 서술했다.    

  

<단심곡>은 1893년 서울 북한산 자락의 명문가 장녀로 태어나 영남 명문가로 시집온 여성이 쓴 내방가사다. 남편이 경술국치에 분개하여 신혼임에도 불구하고 망명했다. 13년이나 생과부로 세월을 보내야 하는 독수공방의 서정과 부친의 원통한 사망으로 어린 동생들과 편모를 걱정하는 서정을 중점적으로 서술했다. 작가의 친정아버지 또한 만주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망명자였다. 1922년 작가 나이 30이 넘어서 창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친가>는 37세의 여성으로 친정아버지가 3.1 운동에 가담해 일경에 쫓기게 되자 급하게 만주로 망명한다. 작가의 아버지가 만주로 망명한 지가 18년이 지난 것으로 표현돼 있어 이 가사는 1936년경에 쓴 것으로 보인다. 만주 친정아버지에 대한 걱정과 시집살이를 하고 있는 여자라는 이유로 친정 식구를 팽개치고 있다는 본인의 자책감 등을 담고 있다.     


만주 망명 내방가사 작품은 대부분 망명 과정의 고단함과 의식주, 이웃과 친지들의 안위와 걱정, 가족 생계에 대한 여성으로서의 고뇌, 고향에 남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 등으로 구성된다.

비밀리에 활동해야 하는 남성들의 독립운동과 달리 여성들은 만주의 진짜 삶을 글로 남기고 그 애환을 이웃과 친지와 공유했다.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내방가사가 창작될 수 있었던 것은 일제강점기에도 안동을 중심으로 하는 경북 지역에서 내방가사를 창작하고 향유하는 글쓰기 문화 전통이 계속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망명의 땅 만주에서도 어릴 때부터 익힌 내방가사로 나라를 잃은 민족의 현실과 그로 인해 굴곡진 각 개인의 삶을 적극적으로 서술하면서 고단했던 삶을 잠시나마 잊고 피붙이 간에, 이웃 간에 서로의 정을 나눌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한국국학진흥원 기획 '안동문화 100선'.  이호영. 『어와 벗님네들』. 안동내방가사이야기. 민속원.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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