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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동 호서비 Mar 04. 2024

안동문화관광이야기

4.  안동 도산서원은 퇴계 선생이 직접 지었다.?

4. 안동 도산서원은 퇴계 선생이 직접 지었다.?         

안동 도산서원 전경 

안동 도산서원은 1574년에 건립됐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후학들이 세운 서원으로 지금의 사립학교이다.  많은 사람이 도산서원과 도산서당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도산서원 안에 도산서당이 있는데 둘 다 퇴계 선생과 관련 있어 퇴계 선생이 모두 건립했다고 생각한다.  도산서원은 퇴계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 지역 유림과 후학들이 뜻을 모아 세웠다. 하지만 도산서당은 퇴계 선생이 생전에 건립한 공부방이다. 1560년 명종 15년에 세웠다. 선생은 이곳에 기거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도산서당 영건기사(陶山書堂 營建記事)를 보면 

“정사년(1557)에 선생께서 도산 남쪽에 서당터를 잡으시고, 느낌을 적은 시 두 수를 지었다....(중략) 경신년(1560) 7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1월에 서당이 준공되었는데, 당(堂)은 모두 3칸이었다. 헌(軒)은 <암서(巖栖)>요, 재(齋)는 <완락(玩樂)>인데 합하여 도산서당(陶山書堂)이라 편액 하였다.”     


서당은 퇴계 선생이 생전에 터를 잡고 공사를 주관하였다.      

도산서원은 후학들이 유림과 지역의 뜻을 모아 선생의 사상과 학문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했고, 도산서당은 퇴계 선생께서 제자를 양성하기 위해 지었다.

도산서당 기숙사 농운정사 

도산서당을 지을 때 유생들의 기숙 공간인 농운정사(隴雲精舍) 및 역락서재(亦樂書齋)가 건립됐다.      

“서원 건물이 전저후고(前低後高) 지형을 활용하여 내부 공간을 상하의 예(禮)에 적합하도록 위계적으로 구성한 것이라면, 서당 건물은 상대적으로 수평적이고 자연에 개방적인 경관을 보여준다.”(『안동의 유교현판』권진호)     

도산서원 편액과 전교당 

퇴계 이황이 세상을 떠난 뒤 1574년 7월에 도산서원이 창건되었고, 1775년 낙성과 함께 선조 임금으로부터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가 쓴 ’도산서원(陶山書院)‘이란 현판을 사액받았다. 1576년 2월에 이황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그 뒤 1616년에 월천(月川) 조목(趙穆)을 종향하였다.      

도산서원은 대원군 서원 철폐 당시에 훼철되지 않고 존속된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고 1969년 사적 제179호로 지정되었다.      

도산서당 전경 

이 도산서당을 지은 목수는 ’중‘이었다.              

도산서당은 당시 법련(法蓮) 스님이 목수를 담당하였다.      

선생께서 제자 조목(趙穆)에게 준 편지를 보면 

“도산정사의 터를 잡은 것은 만년에 가장 큰 관심사로서 법련이 스스로 담당하여 내가 돌아가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일을 마쳤으면 하였더니, 이제 들으니 법련이 죽었다니, 이런 몹쓸 일이 있을 줄이야...”라고 탄식하였다.     


법련은 용수사 승려인데 퇴계를 매우 존경했다. 건축 공사를 맡아 기와를 굽는 일부터 시작했지만, 공사 도중 병을 앓아 입적했다고 한다. 서당 설계도는 선생이 한양에서 손수 그려 보냈는데, 두 번 수정했다. 법련 스님이 죽자, 정일(淨一)이란 스님이 계속 일을 맡았고 마루가 너무 작다며 설계를 바꾸어 암서헌 한 칸을 더 달아 냈다고 한다.     


퇴계 선생께서 제자를 가르치신 도산서당 방 내부 모습

성성재(惺惺齋) 금난수(琴蘭秀)가 쓴 도산서당 영건기사(陶山書堂營建記事)를 보면

“서당 서쪽에 정사 8간을 지었는데, 헌은 ‘관란(觀瀾)’이고, 재는 ‘시습(時習)이고, 요(寮)는 ’지숙(止宿)‘이니 ’농운정사(隴雲精舍)‘라 이름하였다. 걸어놓은 편액은 모두 선생의 필적인데, ’경재잠(敬齋箴), ‘백록동규(白鹿洞規)’, ‘명당실기(名堂室記)’들을 벽 위에 걸었다. 이로부터 '도옹(陶翁)‘이라는 다른 호를 쓰셨다. “라고 하였고     

”또 선생은 필법이 단아하고 힘차며, 아름다우며, 중후하여 다른 명필가들이 기괴한 것만 숭상하는 것과는 달랐다. 혹 다른 사람이 서(書), 병풍(屛), 족자(族) 등을 간절히 원하면, 그 사람 앞에서 휘갈기지 않고, 비록 늘 모시고 있는 제자일지라도 다른 데서 온 사람이 글씨 쓰기를 마치지 않고 주는 법이 없이, 반드시 갈무리하였다가 기다려서 글씨를 주셨으니, 그의 근엄함이 이와 같았다”라고 하였다.   

  

퇴계는 도산서당을 완성한 후 여기서 10여 년간 수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조선 시대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에 따라 사찰에는 다양한 사역이 부과되었다. 특히 목판 각수, 종이 만들기, 건축 등에 사찰 비구가 동원되기도 했다. 아마도 법련이나 정일이란 스님은 목수로서 당시 이름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도산서당은 유가의 건축물을 잘 지은 사찰 스님 덕분에 오늘까지 퇴계 선생의 유훈을 잘 계승하고 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덧붙이는 말: 도산서원 이야기는 세계유산콘텐츠센터  https://whcc.kr '내가 바라보는 세상이 콘텐츠가 된다' 에도 실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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