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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동 호서비 Mar 17. 2024

안동문화관광이야기 6. 도산서원은 수몰될 수도 있었다.

도산서원 수몰?, 도산별과에 1만 명이 몰렸다.

6. 도산서원은 수몰될 수도 있었다.                  

     

도산서원과 시사단 그리고 안동호  출처:이동춘

도산서원은 한때 수몰될 수도 있었다. 1968년 1월 안동다목적댐 건설계획이 발표되면서 도산서원이 수몰 위기에 처하자 당시 유림대표 20여 명이 건설부 장관을 방문하여 보호해 줄 것을 진정했다.     

이에 앞서 지역 유림들은 60년대 초부터 안동 낙동강에 다목적댐의 건설계획을 알고 도산서원 수몰을 막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다. 1962년 12월 서원에서 당회를 열어 130여 명의 연명으로 전국 유림에 통문을 보내 서원을 지키는데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근래 정부는 다래(현 도산면 동부리 부용봉 남쪽) 앞의 강을 막아 전기를 생산하려는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다래는 곧 도산과 이어지는 하류입니다. 강이 크고 골짜기가 험준하여 만약 이곳을 막는다면 그 담긴 물이 부자(夫子)의 혼령을 모신 사당(사당)을 잠기게 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중략)     

삼가 바라옵건대 국내의 여러 군자들께서 당국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 한 목소리로 사정을 말하여 의혹을 풀고 잘 처리되는 방법을 속히 강구해 주시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임인년 11월 20일(양력 1962년 12월 16일)”     


도산서원을 수호하기 위한 이 통문은 전북 남원, 경북 의성, 흥해, 경산 등 향교와 유회소 등에 진정서 사본이 접수된 기록으로 보아 전국 유림에서 정부에 진정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부는 유림의 진정 등에 따라 1969년 1월 도산서원을 아산 현충사(顯忠祠)와 함께 성역화한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성역화는 건물과 흙담을 중수하고, 환경미화를 하여 안동댐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둑을 쌓는다는 내용으로 1970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준공식이 거행되었다.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은 퇴계 선생을 모신 서원이 초라하다고 여기고 ’보수정화사업‘을 지시했다고 한다. 1년간 연인원 24,000여 명과 9,600만 원의 사업비로 낡은 목재와 기와를 교체하고, 도산서당과 농운정사, 상. 하고 직사를 제외하고 모두 단청을 새로 하였다. 또 모든 계단과 축대를 장대석으로 쌓았고, 잔디를 깔고 단풍과 목련, 옥향나무 등을 심었다.    


안동댐이 축조되면서 도산서원 입구인 곡구(谷口)가 사라졌다.

곡구가 수몰돼 석축을 쌓고 흙을 채워 없어지면서 계곡이 넓은 마당으로 변하고 산기슭을 잘라서 진입로를 새로 만들었다. 결국 정문인 곡구로 드나들던 서원 입구를 억지로 지금의 주차장에서 ’천광운영대‘ 위 산허리를 잘라 곁문을 만들어 드나들게 되었다.                                                  

도산서원 천연대    출처:황대영

                                                                                                              

도산서원 시사단에 1만 명의 선비가 모였다.?       

  

도산서원 시사단 

현재 도산서원과 시사단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유적지로 여겨진다. 하지만 시사단은 조선 정조 때 도산서원에서 치러진 별과 시험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과 비각이 있던 작은 단으로 현재는 안동댐 수몰로 인공섬이 되었다.     

1792년 정조 16년 음력 3월 25일 도산서원 앞에는 1만 명이 넘는 선비들이 운집했다. 정조 임금이 퇴계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추모하고 영남지역 선비의 사기진작을 위해 도산서원에서 과거시험을 치르라고 어명을 내렸다. 이 어명에 따라 도산서원에서 과거를 치르기 위해 규장각 관리까지 왔지만 너무 많은 선비가 몰려 도산서원 경내에 수용하지 못하게 되자 강 건너 송림에서 치르게 되었다.    

  

당시 과거 시험을 치겠다고 접수한 선비가 1만여 명에 달했고 선비를 시중드는 하인과 마부, 구경꾼 등 수 만 명이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실제 과거장에 들어온 선비는 7,228명이고 제출된 답안지는 3,632장이었다. 과거 시험 합격자는 음력 4월 15일, 양력 5월 5일에 발표됐다.      

이 도산별과를 기념하기 위해 1796년 정조 20년에 단(壇)을 쌓고 영의정 번암 채제공이 지은 글을 비석(碑石)에 새겼고 비각(碑閣)을 건립했다. 도산별과를 치른 자리가 1975년 안동댐으로 수몰하게 되자 인공 섬을 만들어 비와 비각을 옮겨 놓아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도산별과 재현(2017년) 출처:안동문화원

이 도산별과는 1993년부터 재현되고 있다. 매년 음력 3월 25일 안동시장이 주최하여 기념행사와 함께 한시백일장이 열리고 있다. 전국에서 매년 200여 명의 현대 선비들이 모여 한시를 짓고 퇴계 선생의 유덕을 기리고 있다. 또 2015년부터는 학생부가 추가돼 젊은 유학도의 사랑을 받고 있다.       

                            

도산별과 장원급제가 유가행렬(2-017년)  출처:안동문화원

 덧붙이는 말: 도산서원 이야기는 세계유산콘텐츠센터  https://whcc.kr '내가 바라보는 세상이 콘텐츠가 된다' 에도 실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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