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바람이 거세게 불던 어느 겨울날 저녁 무렵,
까맣고 동그란 눈에 찰랑거리는 단발머리의 여학생이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 Excuse me, Can I come in?"
언뜻 보기엔 유치원생처럼 보였는데 또랑또랑한 목소리와 발음에서 초등학생임을 직감했다.
뒤 이어 따라 들어오시는 어머님께선 아이가 영어로 인사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시면서 가볍게 목례를 하셨다.
전화로 먼저 상담을 하셨기에 유진이에 대한 이전 영어 학습 이력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어머님의 남다른 교육열로 유아기 때부터 영어에 노출을 시켜주셨고, 유진이도 영어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서 영어유치원을 재밌게 다녔다고 전하셨다.
초등학교 입학 후 조금 타이트한 학원에 보내면서 아이는 점점 영어에 대한 흥미도가 떨어지고 과제에 대한 스트레스로 학원에 가는 것을 거부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셨다.
한 시간 남짓 걸린 레벨 테스트를 마친 후, 아이는 교실 여기저기를 유심히 관찰하면서 책꽂이에 적혀 있는 이름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선생님! 얘는 1학년 몇 반이에요?" "내 친구랑 이름이 똑같아요!" "그래? 어디 보자, 1학년 3반이네. 유진이랑 같은 반이네.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면 좋겠다."
첫 만남인데도 궁금한 것을 이것저것 물어보는 유진이는 호기심이 가득한 친구였다.
등록 후 이틀 뒤부터 등원한 유진이는 아니나 다를까 호기심 천국인 아이였다. 선생님의 점심 메뉴는 무엇이었는지, 어디 사는지, 몇 시에 출근하는지, 왜 영어 선생님이 되었는지 등. 그렇다고 수업 중 시도 때도 없이 질문하는 산만한 아이와는 달랐다. 궁금한 건 수업 전에 질문하고, 일단 수업이 시작되면 집중모드로 바뀌었다.
아이들마다 다르지만 보통 우리 학원에 오는 아이들은 2학년 때부터 단어 시험을 친다. 하지만 유진이는 이전 학습 이력도 있고 어머님께서도 원하셔서 등록 후 바로 단어 테스트를 진행했다. 어린아이들에게 있어서 영어 단어 시험을 매일 친다는 건 힘든 일이다. 개중에는 아직 한글 쓰기도 제대로 안되는 학생들이 태반이다. 역시나 내 생각이 적중했다. 유진이도 영어 말하기는 잘했지만 쓰기는 어려워했다. 보통 유진이는 열 개의 단어 시험을 쳤을 때, 반 이상이 틀렸다. 나는 그런 아이에게 맞힌 단어들을 가리키며 "유진아! 잘했어! 글씨도 또박또박 예쁘게 잘 썼네!"라고 칭찬을 해줬다. 그럴 때마다 아이는 속상한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곤 했다.
그런 유진이에게 "괜찮아! 내일 다시 연습해서 시험 치면 잘할 수 있어!"라고 격려를 해주면, 아이는 불안한지 정말 내일 다시 해도 되는지 재차 묻곤 했다. "그럼! 옛날에 선생님도 처음 영어 단어 시험 칠 때 빵점도 맞았어!"라는 나의 말에 아이는 신기한 듯이 "정말요? 선생님도 빵점 맞은 적이 있었어요?"라며 까르르 웃었다.
등록한 후 1주일쯤 지났을 때,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목도리를 급하게 풀고 유진이가 나에게 다가왔다. "학교 잘 갔다 왔니?"라는 나의 물음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배시시 웃었다. "유진아! 오늘 기분 좋은 일 있었구나!" "선생님, 눈 감고 손 내밀어 보세요" 잠시 후 눈을 떠보니 나의 오른손 위에는 만 원짜리 초록색 지폐가 떡! 하니 올려져 있는 게 아닌가!
무슨 돈이냐는 나의 말에 아이는 뜻밖에도 "제가 선생님께 드리는 용돈이에요. 맛있는 거 사 드세요"라고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아이의 말에 의하면, 이전 학원에서는 단어 시험을 치고 틀리면 오답 쓰고, 다 맞을 때까지 남아서 재시험을 쳤다고 했다. 그리고 많이 틀리면 선생님께서 왜 틀렸냐고 무서운 표정으로 혼을 내셔서 수업 시간이 늘 불안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제야 유진이가 나에게 만 원짜리 지폐를 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예전 학원에서는 많이 힘들었겠구나!"라는 나의 진심 어린 공감에 아이는 "선생님은 제가 단어 시험에서 많이 틀려도 혼내지 않으셔서 착해요. 그래서 용돈 드리는 거예요." 세상에나! 그동안 아이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짠해졌다. 나의 교육 철학은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독립된 인격체로 대하고,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배움은 편안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어야 학습효과가 높다. 그래서 평상시 수업 태도가 안 좋거나, 시험 성적이 나쁘면 충분히 알아들을 때까지 타이르고, 반복 학습을 진행해 왔다. 선생님이 원하는 만큼의 결과가 안 나온다고 아이에게 화를 내거나 혼내는 것은 옳지 않다.
낮에 있었던 일을 전달할 겸 그날 저녁 어머님과 통화를 했다. 전후 사정을 이미 다 알고 계셨고, 사전에 부모님의 허락을 받았으니 맛있는 거 사드시라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통화를 마치고 나니 때마침 교실 책장 한 귀퉁이에 꽂혀 있는 유진이의 책꽂이가 보였다. 나의 작은 친절이 아이의 마음을 움직이고 환하게 웃을 수 있게 했다는 점이 참 뿌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