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문밖에서 미지의 온기가 맞이한다.
웃는 표정에 추악함이 묻어있다.
서글한 목소리에 꾀를 감춘다.
인사로 건넨 손에 가시가 돋쳐있다.
믿어 온 건 먼발치에 있던 환영이다.
거짓으로 점철된 악몽에서 깨어나야지.
저 문밖에서 미지의 온기가 맞이한다.
처음 맞는 햇볕에 숨을 가득 머금는다.
1년 전부터 나의 퇴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불합리와 부조리가 그득했던 작은 울타리에서 완전하게 빠져나오기는 까다롭다. 당연하다고만 여겼던 행습은 악습이었고 합리적인 시선을 갖는 데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부담으로 느꼈던 일과는 절대 일상이 아니었다. 오롯이 내 것이라 생각한 책임감은 다른 이의 것이었다. 옭아맸던 족쇄는 많이 느슨해졌지만 완전히 풀진 못했다. 마지막 퇴근에 모든 걸 내려놓은 줄 알았지만 지난날의 경험과 감정은 여전히 괴롭힌다.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더라도 같은 굴레를 반복할 수 있다는 게 두렵다. 도리어 더욱 심한 악몽이 기다릴 수도 있다. 한 발 앞으로 내디뎌야 하지만 손과 발은 떨려온다.
다행이라면 당시라도 퇴사를 했다는 점이다. 심신이 힘들었으나 퇴사를 결정했을 때는 상당히 이성적이었다. 쾌적하지 않은 업무 여건, 직원의 도구화, 균일하지 못한 체계, 상당히 낮은 급여 등 복잡한 과제가 본가와의 먼 거리로 인한 주거 문제와 시기적으로 맞물려 있었다. 덧붙여 처했던 불합리한 대우와 환경을 인지해 감정적으로도 임계점에 도달했다. 만일 결정을 번복했다면 어땠을까. 날 묶은 사슬은 발목뿐만 아니라 목을 조여 깊은 수렁에 빠지지 않았을까.
오늘에 이르러서야 말을 한다면, 퇴사는 용기가 필요하고 이를수록 좋다. 좀 더 이른 시기에 퇴사를 했다면 추태를 보지 않았을뿐더러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잔존해 있는 감정의 찌꺼기도 보다 적을 것이다. 온갖 추악함을 견디는 게 회사 생활이라지만, 무조건 참는 게 해답은 아니다. 직장은 이익 집단이며 구성원 또한 개인의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 본인에게 충족하는 이해를 계산해 과감한 결론을 지어야 한다. 퇴사를 한다 해서 낙오자는 아니다. 끔찍한 경험의 반전은 반면교사다. 그러나 이 뒷면은 경험을 끝맺고서야 볼 수 있다. 1년이 지난 지금도 새 출발을 준비하고 있지만 퇴사를 결정했던 건 후회하지 않는다. 만약의 경우로 일찍 했거나, 하지 않았거나를 가정해도 당시에 이룬 결실은 큰 다행이다. 여전히 손발은 떨리지만 보다 긍정적인 미래를 그릴 수 있다는 점이 희망적이다.
저 문밖에서 미지의 온기가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