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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순범 Sep 01. 2023

<강변의 무코리타>, 먹는 영화

무코리타의 시간

본 영화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떤 영화는 본다. 어떤 영화는 읽는다. 어떤 영화는 먹는다.


<강변의 무코리타>는 먹는 영화다. 토마토와 오이와 같은 아삭한 여름 채소와 밥도둑 젓갈이 소담스럽게 밥상을 채우는 이 영화는 소박하고 정겨운 풍경들로 가득하다. <카모메 식당>으로 유명한 오기가기 나오코 감독은 이전 전작처럼 느긋하고 무해하고 소소하다. 영화의 대사처럼 '미니멀 리스트'가 알맞은 영화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게으르지 않다. 여유를 가지되 정확히 무게 중심을 잡고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명료하게 말한다. 이 영화는 화려한 영상으로 눈과 귀를 사로잡기보단 풀벌레 소리, 여름 채소의 식감, 버려진 전화기와 같은 작은 것들로부터 큰 의미를 길어낸다.




과거를 지우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작은 어촌 마을의 젓갈 공장에 취직한 '야마다'는 공장 사장의 소개로 낡고 오래된 '무코리타 연립주택'에 입주한다. 그곳에는 남편을 잃고 딸과 함께 살고 있는 집 주인 '미나미', 야마다의 집에서 목욕하기 위해 막 들어오는 옆집 이웃 '시마다', 아들과 묘석을 방문 판매하는 '미조구치'가 살고 있다. 그곳에서 잃었던 웃음을 서서히 되찾을 무렵, '야마다'는 인연을 끊고 살았던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접한다. 그리고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혼란스러운 감정이 야마다를 덮친다.


'무코리타 하이츠'라는 공간


야마다가 입주한 '무코리타 하이츠'라는 집은 다소 이상하다. 우선 방음이 되지 않는다. 야마다가 화장실에서 목욕을 하면 그 소리를 듣고 시마다가 자기도 목욕 좀 시켜달라고 오는 식이다. 앞마당에는 텃밭이 있어서 채소를 직접 가꾸고 재배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집이 수평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러니까 자기의 사생활은 거의 지킬 수 없는 셈이다. 현대인들에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공간이지만, 이런 특성 덕분에 오히려 이웃을 알아가기 쉽다. 야마다가 더위에 못 이겨 누워 있을 때 시마다가 채소를 건네줄 수 있는 이유는 창문을 통해 바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굉장히 이상한 '무코리타 하이츠'라는 연립주택의 구조는 오기가기 나오코 감독이 추구한 이상적인 공동체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이 공간은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기보단 지나가다 그냥 한 번 둘러보는 느슨한 연대감이 강조된다. 그리고 건물이 1층으로 되어 있어 누군가가 위에서 살지 않는다. 모두 다 평등한 방에서, 평등한 권력을 가지고 살아간다. 집주인 미나미가 권력을 가진 것처럼 보여도, 미조구치가 집세 6개월이나 밀려도 눈감아 주는 것으로 보아 그냥 모두 이웃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그리고 세상을 떠난 오카모토 할머니의 방도 아직 할머니가 살아 있는 것 같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에게 내주지 않는다. 이처럼 '무코리타 하이츠'라는 공간에서 인물들은 모두 수평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심지어 죽은 사람까지도 말이다. 이 영화에서 인간, 삶, 죽음, 자연은 전부 수평적 구조로 배치되어 있어 아무런 조건과 자격을 따지지 않고 천천히 대화하는 듯하다.




시마다가 야마다에게 채소를 건네주면서 "여기서 죽은 사람은 없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 있다. 오카모토 할머니가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무코리타 하이츠에 사는 사람들은 할머니를 죽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있다고 마음속으로 기억한다. 이렇게 무코리타 하이츠라는 공간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이다. 이는 후술할 영화의 전체적인 태도와 관련되어 있다. 


먹는다. 고로 살아간다.


이 영화는 여름의 풍경들이 한껏 담겨 있는 영화이다. 일본 시골 작은 마을의 향토적 풍경들이 흙 내음과 바닷바람을 연상시키며 서정적인 생기를 불어 넣는다. 그중에서 특히 이 영화는 먹는 장면을 롱테이크로 자주 보여준다. 단순한 식사 장면이었다면 이토록 공들여 묘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먹는다는 것은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야마다가 삶의 의욕을 잃고 더위에 지쳐 누워 있을 때 시마다가 건네준 토마토와 오리를 먹는 장면을 떠올려본다. 그때 야마다는 단순히 채소를 베어 무는 것이 아니라 게걸스럽게 먹는다. 단순히 먹는다는 행위를 넘어 채소의 식감과 함께 건네준 사람의 온정도 함께 느끼는 것이다.




밥 먹는 장면뿐만 아니라 밥 짓는 장면도 섬세하게 묘사한다. 야마다가 쌀 씻는 장면을 보면 거의 빡빡 문지르듯이 쌀을 씻는다. 그렇게 정성 들여 밥을 짓고 난 다음에는 꼭 밥솥 뚜껑을 열어 구수한 밥 냄새를 한껏 맡는다. 영화는 이 모든 과정을 평화로운 리듬감으로 담아낸다. 그렇게 요리하는 순간순간마다 삶의 숨결을 고스란히 담는다. 그리고 카메라를 낮게 설치하여 철저히 인물들이 앉아서 식사하는 시선에 맞춘다. 일본 영화의 전통적인 촬영 기법인 '다다미 샷'인데 이를 통해 관객 또한 인물들과 함께 식사를 동참하게 한다. 영화의 대사처럼 "밥은 혼자서 먹는 것보다 같이 먹는 것이 맛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영화는 이렇게 먹는 장면을 통해 삶을 묘사하는 반면, 묘석을 판매하는 미조구치의 대사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처럼 죽음의 이미지도 계속 투영한다. 야마다의 방을 지키고 있는 아버지의 유골과 '생명의 전화'에서 알려준 '하늘을 나는 금붕어' 이야기가 그렇다. 또한 무코리타 하이츠에 사는 사람들은 상실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야마다는 아버지를, 시마다는 딸을, 미나미는 남편을 떠나보냈다. 미조구치는 자세히 묘사되지 않지만 그의 아내는 영화 내에서 단 한 번도 모습을 비추지 않는다. 무코리타 하이츠에 사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소중한 누군가를 떠나보내면서, 사회에서 튕겨나간 사람들이다. 결국 이 영화는 죽은 사람들을 기억하는 방식에 대해서 고민하는, 남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야마다가 거의 남에 가까운 아버지의 유골을 인수할지 말지 고민하는 순간 시마다는 "어떤 사람이었든 없던 사람으로 만들면 안 돼"라고 말한다. 그리고 야마다는 아버지의 유골을 인수하기로 결심한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야마다는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궁금해한다. 아버지는 자살을 방지하는 '생명의 전화'에 전화하였다. 하지만 자살이라기엔 식물도 키운 사람이었다. 고독사라기엔 시신이 살기 위해 문으로 몸을 뻗지 않았다. 아버지의 죽음은 고독사와 자살, 그 사이에서 희미하게 존재할 뿐 명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야마다가 알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우유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버지가 우유를 좋아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아무리 미운 아버지이지만, 아버지가 없었다면 야마다도 존재할 수 없다.




후반부에 천진난만한 상상이 실현되는 장면이 있다. 영화 내에서 아이들은 줄넘기를 돌리고 고장 난 전화기를 통해 외계인과 교신하려고 한다. 그리고 죽은 금붕어를 묻어주는 순간 전화기가 울리고 그들은 함께 하늘을 쳐다본다. 하늘에는 오징어 모양의 풍선이 둥실둥실 떠있다. 그리고 시마다는 그것을 본 순간 세상을 떠난 딸을 떠올리고 자신도 데려가달라고 소리친다. 그 슬픔은 그 누구도 위로해 주지 못한다. 이는 '생명의 전화'에서 말해주었던 영혼이 떠나면 어디로 가는지와 연결된다. '생명의 전화'는 죽은 영혼은 하늘을 나는 금붕어가 된다고 하였다. 그렇게 하늘을 떠다니며 산 자를 지켜보는 것이다. 작은 어촌 마을 축제에서 쓸 법한 거대한 오징어 풍선은 그 자체로 비현실적이면서 죽은 자의 영혼을 상징한다. 사소한 것에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듯한 시마다는 오징어 풍선을 보는 순간 슬픔을 참지 못한다.


무코리타의 시간


결국 남아 있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각자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시마다는 사소한 것에 행복을 느끼고자 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미나미는 남편의 유골을 꺼내어 애무하듯이 자신의 몸에 문질렀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딸 앞에서 슬픔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줄곧 나오코 감독 작품에서 무성애적 존재로 묘사되었던 여성이 이번 영화에선 성애적 존재로 묘사된다는 면에서 놀랍다.) 미조구치는 묘석을 팔았다. 그렇게 해야 담담한 태도로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삶과 죽음은 늘 함께 존재한다. 이 사실을 깨달은 야마다는 아버지의 유골을 뼛가루로 만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린다. 나 같은 건 웃으면 안 되는 마음, 전과자가 사소한 행복을 느끼면 안 된다는 마음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나 다시 시작할 수 있다. 함께 앉아서 밥을 먹을 수 있는 공동체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갈 수 있다. 야마다가 눈물을 흘릴 때 카메라는 로우 앵글로 여름의 하늘도 함께 포착한다. 이 순간 미나미뿐만 아니라 여름의 하늘도, 떠나간 아버지도 함께 느껴도 괜찮다고 위로의 포옹을 건넨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단순히 영화의 시간만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곳에는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간과, 그들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죽은 사람의 시간도 함께 흘러간다.




'무코리타'는 불교의 시간 단위로 牟呼栗多(모호율다)의 일본식 발음이다.(정확히는 산스크리트어를 일본식으로 음차한 것이다.) '세츠나, 타세츠나, 로바쿠, 무코리타(찰나, 달찰나, 납박, 모호율다 刹那 怛刹那 臘縛 牟呼栗多)'라는 것이 영화에서 연이어 등장하는데, 대략 1찰나가 0.013초이고 1무코리타는 48분이다. 이 의미를 되새기면서 영화의 시간을 다시 생각해 보면, 무코리타의 여름 풍경이 다시금 새롭게 다가온다. 결국 '무코리타 하이츠'는 삶과 죽음의 시간이 동시에 흘러가는 곳이다. 무코리타의 시간과 함께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눈에는 여름 햇살의 뙤약볕이, 코에는 구수한 밥 냄새가, 입에는 아삭한 여름 채소의 식감이, 귀에는 풀벌레 소리가 한 아름 담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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