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역사는 개별 유기체의 행복에 무관심하다
(필사의 말들)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김숨『오키나와 스파이』
“역사는 개별 유기체의 행복에 무관심하다.(p.346)
“대부분의 역사서는 위대한 사상가의 생각, 전사의 용맹, 성자의 자선, 예술가의 창의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책들은 사회적 구조가 어떻게 짜이고 흩어지느냐에 대해서, 제국의 흥망에 대해서, 기술의 발견과 확산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개인들의 행복과 고통에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의 역사 이해에 남아 있는 가장 큰 공백이다. 우리는 이 공백을 채워 나가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p.560)
유발 하라리의 말대로 역사가 개인들의 행복과 고통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말해주고 있지 않다면? 그리고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공백이 남아 있어 이 공백을 채워 나가야 한다면 이러한 공백을 채워 나가는 사람들은 『소년이 온다』『작별하지 않는다』의 한강 작가 같은 사람이 아닐까? 이러한 생각이 든 건 김숨의 『오키나와 스파이』를 읽고나서부터다. “역사란 모든 사람이 땅을 갈고 물을 운반하는 동안 극소수의 사람들이 해 온 그 무엇이다.”라는 유발 하라리의 말처럼 역사가 극소수의 사람들이 해 온 무엇이라면 ‘역사의 공백을 채우는 일은 문학이 해야 하는 일인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문학은 시대를 막론하고 지속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역사의 공백을 메워가고 있는 건가? 내 생각이 맞는지 틀린지 사실 나도 잘 모른다. 단지 이 문장들이 몇 달 동안 머릿속을 떠다녔기에 꼬리에 꼬리를 문 질문들이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김숨의 소설 『오키나와 스파이』는 태평양 전쟁 당시 오키나와 본섬 서쪽의 작은 섬 구메지마에서 일본군이 선량한 주민 20명을 미군의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무참히 살해한 ‘구메지마 수비대 주민 학살 사건’을 다룬다. 이 중 7명은 조선인 구중회 씨와 그의 가족들이었다, 일본군의 스파이 공포증과 이 공포증에 휘말려 들어간 섬 주민들의 모습을 파헤치는 이 소설이 인상적이었던 건 책의 구성이었다. 총 12부로 구성되는데 1부에서는 9명, 4부에서는 1명, 9부에서는 3명, 12부에서는 7명이 학살되는 장면이 그려진다. 주인공도 조연도 없다. 다만 비극에 놓여진 동일한 개인들이 있을 뿐이다. 나머지 공백 부분은 스파이 공포증에 침범당한 섬 주민들의 이야기로 채워진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무참하게 죽어 나가는 장면은 마치 내 눈앞에서 실제 학살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끔찍했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 칼날에 살이 베이고 찢기고 도려내지는 소리, 피가 토해지고 뿜어 나오는 소리(p.21)” 피가 낭자한 참혹한 장면들의 연속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학살의 감각이 전해져 불편하고 힘들었다.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묘사해야 했을까?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이러한 의문은 책 말미 문학평론가 박혜경의 해설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경악스러운 학살의 현장을 눈으로 보듯 생생하게 서술해 나가는 이 장면은 참혹한 집단 학살의 대상이 된 사람들이 아홉이라는 숫자로 뭉뚱그려진 이름 없는 희생자들이 아니라 각각의 이름과 개체성을 지닌 ‘한 사람’ 임을 기억케 하려는 일종의 제의적 장면처럼 보이기도 한다.”(p.369) 작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의 이름과 개체성을 가지고 그 섬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일상적인 모습들을 보여주고 그들이 어떻게 학살되었는지 여과 없이 보여준다. 그렇기에 여기에 나온 한 사람 한 사람은 때론 나 같기도 하고 내 이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더더욱 학살 장면이 마치 나의 일처럼 내 이웃의 일처럼 감각된다.
대부분의 역사는 숫자만을 이야기한다. 희생자 몇백만 명, 몇십만 명, 몇만 명, 몇천 명, 몇백 명, 몇십 명, 몇 명 등. 그 안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은 그저 숫자로 뭉뚱그려질 뿐이다. 숫자는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살과 피를 지닌 슬픔과 고통을 느끼는 인간이라는 말은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학창 시절 나는 역사책에 보통 한 줄로 기록되어 있는 희생자 몇 명이라는 숫자 앞에서 아무것도 감각하지 못했다. 그들은 나와 아주 먼 사람들이었고 나와 무관한 사람들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이제야 나는 그들을 숫자가 아닌 각자의 이름이 있는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개체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감각하기 시작했다. 멀게만 느껴졌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역시 다르게 감각된다. ‘구메지마 수비대 주민 학살 사건’과 비슷한 일이 그곳에서도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을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몸서리가 쳐진다.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이름을 가진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누구보다 충실히 살아왔던 한 사람 한 사람이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게 그 어느 때보다 끔찍하게 다가온다.
김숨 작가가 독자에게 원한 게 이런 것이었을까? 그녀는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실에서 절대 기록되지 않을 개개인의 고통을 기록함으로써 역사의 공백을 채워 가고 있는 것 아닐까? 역사를 이해한다는 건 이렇듯 역사적 사실과 그 사이의 공백 즉 전쟁이 개개인에게 어떠한 고통을 주었는지 기억해야 한다는 걸 그녀를 통해 알았다. 고통과 공포의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것과의 용기있는 대면을 통해 고통과 공포를 넘어서는 힘을 갖게 되는 것이며 우리의 그리고 미래 세대의 인권도 보호 받고 보장 받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숲을 보라고 하잖아요. 숲을 보지 말고 나무를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