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2백만 명 중 점 하나가 되어
(일상의 말들)
서울로 향하는 고속버스 안의 풍경은 여느 때와 다름없지만 마음만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오른쪽 맨 앞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맨 뒤 묵직한 배낭을 무릎 위에 올려놓는다. 배낭 안에는 집회를 위한 개인용 방석, 여벌의 히트텍, 카디건, 장갑, 목도리 등이 들어있다. 영하권이라는 날씨예보에 타이즈를 신고 단단히 준비한다고 했는데 어떨지 잘 모르겠다.
드디어 버스가 센트럴시티에 미끄러지듯 들어서고 발걸음은 화장실로 향하는데 어째 예전보다 더 혼잡한 느낌이다. 한참을 기다리다 화장실 안에서 옷을 더 껴입은 후, 국회의사당역에 가기 위해 9호선 방향으로 걷는다. 나처럼 전국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고속버스터미널역에 모여 있는 듯 수많은 사람들이 9호선을 기다리고 있다. 지하철이 바로 왔음에도 “밀지 마세요. 다음 차 타세요”라는 말에 몸을 구겨 넣었다 다시 내린다. 사람들을 가득 싣고 떠나가는 지하철을 보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달려가는구나 싶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지하철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그곳으로 실어 나르고 있을까?
지하철 안에는 “집회 때문에 역사 안이 혼잡합니다. 질서 있게 행동해 주세요”라는 방송이 주기적으로 울려 퍼진다. 다시 온 전철에 발을 딛고 올라선다. 꽉 차서 터질듯한 전철 안에서는 몸과 몸이 맞닿아 불편도 하련만 누구 하나 말하는 사람도 없다. 그저 침묵 속에서 “내릴 분은 미리 말씀해 주세요.”라며 행여 다치는 사람이 없길 도와주시는 안전요원의 외침만이 들릴 뿐이다. 역마다 내리는 분들과 타는 분들의 힘겨운 내림과 오름의 반복이 있고 이리 밀리고 저리 밀려도 ‘조금만 참자’라는 무언의 배려가 있을 뿐이다.
드디어 국회의사당역에 도착, 잠시 요기할 요량으로 편의점으로 들어간다. 이미 물건들 대부분이 동이 나 있다. 구운 달걀 2개, 초콜릿, 물 한 병을 집어 들고 길게 늘어선 줄을 기다려 계산을 하고 나온다. ‘한 번 앉으면 화장실에 가기 어렵겠지? ’라는 생각에 화장실로 향한다. 이곳 역시 긴 줄의 행렬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다. 시간 절약을 위해 긴 줄 사이에서 구운 달걀 하나를 까기 시작한다. 오물오물 한 개를 먹은 후, 다시 한 개를 꺼내 껍질을 까는데 까지질 않아 난감하다. 무릎에 대고 탁탁 치다가 이번엔 이빨로 한번 베어 물어보는데 깨지질 않는다. 이제껏 참고 있었던 화가 달걀로 향했는지 손으로 달걀을 꽉 잡았더니 그제야 껍질에 금이 가 속살이 보인다. 이번엔 마구마구 달걀을 입에 밀어 넣는다.
긴 기다림 끝에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나오니 구석 한편에 무언가가 담겨 있는 종이백 몇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필요하시면 가져가세요.” 여성 위생용품, 핫팩, 깔창용 핫팩, 사탕 등등.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쓴 포스트잇 글씨에서 따스한 마음들이 느껴진다. 평상시 잊고 지냈던 사람의 성분인 사랑, 배려가 전해진다. 감사한 마음으로 핫팩 2개를 챙긴다. 애꿎은 달걀에 화풀이했던 마음도 눈 녹듯 사라진다.
지하철 밖으로 나가는 계단을 한발 한발 내디뎌 올라감에 따라 함성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온다. 드디어 역을 빠져나와 지상에 발을 내딛는다. 오후 3시. 영하의 날씨임에도 이미 인산인해의 사람들로 가득하다. 아스팔트에는 피켓을 들고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로 꽉 차 있고, 아스팔트와 인도를 잇는 턱에는 걸터앉거나 서 있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자리를 잡아야 하는데 어쩌지? 나처럼 도착은 했으나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들이 중앙에 난 길을 따라 걸으며 자리를 찾고 있다.
깃발 하나를 들고 서 있는 분에게 “들어가 가려고요.” 했더니 “이쪽으로는 못 들어갑니다.”라고 제지한다. 가까운 자리가 비어 그 자리에 앉겠다고 하니 난감해하시며 자기 자리란다. 대화를 듣고 있던 바로 옆 몇 분이 자리를 당기시더니 “혼자예요? 여기 앉으세요.”라고 말해 간신히 자리를 잡는다. 일인용 방석을 깔려고 하는데 둘둘 말린 방석이 오늘따라 유난히 펴지질 않는다. 이를 지켜보던 옆자리 분이 방석을 손수 펴 주시며 앉으라고 하는데 송구스럽다. 그제야 나눠준 피켓을 들고 사회자의 구호에 맞춰 함성을 지른다. 혼자라 쑥스럽지만 구호도 외치고 노래도 따라 부르고 피켓도 이리저리 흔든다. 그렇게 200만 명 중 점 하나가 된다.
영하의 날씨라 그런가 30분쯤 앉아 있으니 단단히 껴입었는데도 몸 구석구석 한기가 느껴진다. 옆 자리분들은 단체로 오셔서 오전 11시부터 앉아 계셨다고 하니 존경심이 절로 든다. 추워서 그런가 화장실이 다시 가고 싶어 인근 화장실을 찾아 일어선다. 길게 늘어선 줄이 보이는데 아니나 다를까 인근 카드 회사가 개방한 화장실에 들어가려는 줄이다. 9호선을 타려던 긴 줄,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려던 긴 줄, 역사 안 화장실의 긴 줄은 그렇게 국회의사당 인근 회장실의 긴 줄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모두들 조용히 그 긴 줄들을 반복하며 서 있기를 되풀이하고 있다.
다시 자리로 되돌아가던 길, 배낭을 멘 20대쯤으로 보이는 한 아가씨가 눈에 띈다. 손에는 핫팩 여러 개를 들고 있고 배낭에 꽂힌 작은 깃발엔 “핫팩 필요하시면 가져가세요.”라는 말이 쓰여 있다. 역사 화장실 안의 마음들이 그녀의 마음으로 이어지고 있다. 마음이 다시 울컥한다. 그녀들은 그녀들의 방식대로 집회를 치르고 있다. 자리에 착석한 후, 다시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함성을 지르며 노래를 부른다. 내 방식대로 집회를 치른다. 아마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집회에서도 모두들 각자의 방식으로 집회를 치르고 있으리라.
일인용 방석 위에 앉아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매일 밤 이 차디찬 자리에 앉아 계셨던 수많은 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분들에게 빚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태 이 자리를 지켜왔고 또 앞으로도 이 자리를 지켜갈 분들에게 빚지고 살 것 같다는 예감도 든다. 이분들 덕분에 세상은 점점 나아가고 있고 후퇴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도 생긴다.
운동하러 가다 들린 어제저녁 지역 집회에 참여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아가고 있을 때 누군가는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추워도 사람들이 많지 않아도 그 자리에서 그들의 일을 묵묵히 하고 있었다. 이러한 목소리들 덕분에 내가 운동도 하고 글도 쓰며 살 수 있었는데 그동안 너무 잊고 살았구나. 홀로 집회장 구석 자리에 앉아 쭈볏쭈볏 구호를 외치면서 든 생각이었다. 그래서 다음날 주섬주섬 짐을 싸 서울로 향했다. 그래야만 될 것 같았다. 몇백만 명 중 한 명이더라도, 잠시 앉아 있다 내려오더라도 가봐야 할 것만 같았다. 부채감이 등을 떠밀었다.
“우린 노래해. 더 나아질 거야. 우린 추억해. 부질없이 지난날들. 바보같이 지난날들. 그래도 우린 좋지 아니한가. 바람에 흐른 세월 속에 우리 같이 있지 아니한가.”를 따라 부르며 생각했다. 따뜻한 마음들이 이어져 있는 집회가 있는 한 세상은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지 않을까 하고. 그렇게 점 하나가 되었다 돌아왔다. 이러한 점들은 그날 다시 지하철, 버스, 자동차로 전국 곳곳으로 흩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