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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는가?

(필사의 말들) 윤정은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

by 하늘

“마음의 얼룩을 지우고, 아픈 기억을 지워드려요. 당신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구겨진 마음의 주름을 다려줄 수도, 얼룩을 빼줄 수도 있어요. 모든 얼룩 지워드립니다. 오세요. 마음 세탁소로.” (p.47-48)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는가? 누구에게나 마음의 상처가 있듯 내게도 마음의 얼룩이 있다. 그런데 그 기억보다 더 선명하게 남아 있는 건 내게 닥친 일이라는 게 믿기지 않아 내가 했던 행동들이다. 수영 강습을 받던 중이었는데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에 얼이 빠져 있었다. 세상은 분명 어제와 똑같이 흘러가고 있는데 내가 사는 세계 안에 또 다른 세계가 생겨난 것 같은? 분명 물속에 있었지만 몸이 공중에 ‘붕’ 떠 있는 것 같았고, 팔과 다리는 갈 곳을 잃은 채 휘청휘청 허공을 가르는 듯했다. 땅을 디디고 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땅에 발이 붙어 있었으나 마치 땅에서 한 뼘은 떨어진 공중을 걷는 듯 발걸음 역시 어쩌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감당의 범위를 넘어선 일에 몸은 그렇게 반응했다.

이 책은 마음 한편에서 사라지지 않고 조용히 잠자고 있는 기억을, 굳이 꺼내 보고 싶지 않은 기억을 소환해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한다. “마음 세탁소라는 곳이 있다면, 그 기억을 지우고 싶은가요?”라고 물어온다. 글쎄. 당시엔 너무 아프고 힘들어 어떻게든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던 기억밖에는 없다. 아마 그때 내게 똑같은 질문이 주어졌다면 “제발 당장 지워 주세요.”라고 말했을지 모른다. 그렇게 구겨지고 얼룩진 마음임에도 과거의 일로 미뤄놓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날들이 이어졌고 살아내야 할 날들 틈에서 그 일도 점점 희미해져 갔다. 아주 가끔 뭔가가 그 기억을 건드리기라도 하는 날이면 그때의 내가 떠올라 마음이 욱신거렸지만 애써 외면하며 모른 척 살아왔다. 그렇게 그 기억은 머릿속 어딘가에 밀봉되어 있다가 외부의 자극을 받으면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나, 아직 네 머릿속에 있어.” 자신의 굳건함을 그렇게 알려왔다.

그 일이 있은 후, 2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세월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기억은 퇴색되어가고 있지만 나는 아직도 수영장 물속에 가라앉아 있다. 마음의 나이테가 되는 얼룩이 있다지만 나이테가 되지 못하는 얼룩도 있다. 그럼 "이 기억을 지우고 싶은가?"라고 지금의 내게 다시 묻는다면 생각이 바뀌었다.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라는 중요한 교훈”이라는 양귀자의 『모순』에 나오는 문장 때문이다.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면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 매달리고 자책하는 대신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일로 받아들이겠다’라고 마음먹었다. 불행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기로 했다. 한계치를 넘어선 경험이었지만 그 일로 인해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 일이 없었다면 평생 모르고 살았을 세상의 한켠을 알게 된 것도, 내가 사는 세계 속에 무수히 많은 세계가 흐르고 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의 숨겨진 진실들을 배울 기회였다. 나의 확장은 결국 불행을 통해서 왔고 그것을 통해 인생의 크기가 커진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니 마음의 얼룩을 지우는 세탁소가 있다고 한들 지우고 싶지 않다. 그 기억을 지워낸다면, 나는 다시 쪼그라들어 세상을 편협하게 바라보며 섣불리 단정 짓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사는 건 늘 괴로운 일 투성이고, 정도의 차이로 마음의 얼룩도 각양각색이지만 얼룩을 얼룩인 채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직도 마음이 수영장 물속에 있어 그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살겠다는 말은 무리가 있지만 지우고 싶지 않은 얼룩임에는 분명하다. 그 일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그게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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