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의 말들)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엄마, 어제 뭐 하셨어요?”
“그러게. 어제 뭐 했더라. 기억이 안 나네. 어제가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져.”
아이 둘 다 대학에 입학해 장장 20년간의 육아에서 벗어나 한숨 돌리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친정 모임을 만드는 거였다. 멤버라고 해야 여동생과 나, 친정엄마 셋. 동생과 내가 회비를 모으고 한 달에 한 번 친정엄마와 이것저것 맛난 것도 먹고, 이곳저곳 구경도 다니자며 시작했다. 내 새끼 크는 거 보느라 정작 나를 키운 엄마를 돌아본 건 그렇게 아이들이 내 품을 떠난 후였다. 아이들에게서 해방된 두 딸은 그렇게 다시 엄마의 자식으로 돌아갔다. 나를 키운 팔 할인 엄마가 막 칠십이 되던 해였다. 40대 후반 딸 둘과 칠십 초반인 엄마의 모임은 그렇게 7년째 이어져 오고 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라는 『안나 까레리나』의 첫 문장을 비켜나가는 집이 있을까?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다. 동네 부잣집 남자가 애타게 구혼을 했다는데 엄마는 아빠의 훤칠하고 잘생긴 얼굴에 넘어가 결혼했다. 미남이지만 생활력이라곤 눈 씻고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었던 아버지는 할아버지께서 물려주신 전답을 노름으로 탕진하고도 가부장제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난감한 사람이었다. 생활고와 가부장제의 이중고 속에서 엄마는 버티고 버티며 우리를 키워냈다. 이것저것 안 해본 일이 없었기에 내가 첫 책을 냈을 때 건넨 첫마디가 “엄마 이야기도 한 번 써봐라. 아마 책 몇 권은 나올걸.” 그 눈빛에는 숱한 세월을 겪어낸 한숨과 탄식이 진하게 묻어 있었다. ‘누가 내 이야기 좀 들어줬으면!’ 하는 진한 바람이 가득 묻어 있었다.
그런데 그만!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고야 말았다. 이미 뱉어 주워 담을 수 없는 말. “엄마, 그렇게 고생한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특별한 일이 아니라 아무도 읽으려고 하지 않을걸요.” 얼마 전 “신세 한탄이 책이 될 수 없다”라는 어느 작가의 말이 뇌리에 박혀 있다 자동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는 구차한 변명을 하더라도 엄마에게는 얼마나 모진 말로 들렸을지. 그것도 딸의 입을 통해 자신의 인생이 특별한 게 아니라 누구나 겪는 보편적인 일로 평준화당했으니 얼마나 허탈했을지. 이렇게 말한 거나 다름없었다. “그때는 다들 그렇게 살았어요. 당신의 인생이 뭐 그리 특별하다고.” 삶은 정신 차리고 있지 않으면 조금만 방심하면 한순간 대형사고를 치고 만다. 쯧쯧. 책에서는 보편적인 삶을 개개인의 특별한 삶으로 끌어올리지 못해 안달이더니! 잘한다. 잘해!
어느 누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나는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세상 모든 엄마가 내 엄만가? 나를 키운 엄마는 한 명뿐인데. 그런 서사를 가진 사람은 세상에 딱 한 명밖에 없는데. 엄마 고유의 삶을 그렇게 퉁 치다니! 읽어온 책 대부분은 이렇게 목놓아 외치고 있었다. “제발 어떤 역할이 아니라 저 자체로 봐주세요.” 책을 읽으면 뭐 하나? 이런 종류의 주제로 글을 쓰면 또 뭐 하나? 쓰는 것과 안 쓰는 것의 차이가 없다면 글은 도대체 왜 쓰나? 글과 삶의 괴리를 이렇게나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가! 등골이 서늘해졌다. 글이 삶을 앞서나갔다. 글과 삶의 차이를 줄이기 위해 딴에는 노력한다고 안간힘을 썼건만 한참 멀었다는 걸 뼈저리게 실감했다.
이런 모지리 같은 딸인데도 엄마는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내치지 않았다.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딸의 이런 종류의 말에 내성이라도 생겼는지(그렇다면 더 슬프다) 얼른 딴 곳으로 화제를 돌렸다. 이 와중에도 나는 엄마가 격노하지 않았음에 마음을 쓸어내리며 천만다행이라는 간사한 마음이 들었다. 참 가지가지한다. 이 나이에도 이렇게 싸가지가 네 가지인 말을 하는 걸로 봐서는 엄마를 속상하게 하는 말을 참 많이도 했겠다 싶다. 오십 중반인데 언제 철이 들는지.
한 달에 한번 하는 엄마와의 나들이에서 나는 여전히 엄마의 어린 딸로 멈춰 있는 듯하다. 아직도 철부지 딸이고 생채기를 내는 딸이지만 엄마는 보는 사람마다 붙잡고 이렇게 이야기한다. “애들이 매달 나 데리고 여기저기 좋은데 구경시켜 주잖아. 딸들이 최고라니까.” 나와 내 동생을 세상에 둘도 없는 딸로 둔갑시킨다. 사실 안부 전화도 잘 안 하는 우리가 (둘 다 전화와 친하지 않다) 유일하게 잘(?) 할 수 있는 일이 한 달에 한번 엄마 모시고 다니면서 좋은 거 먹고, 좋은 걸 보는 거다. 다른 자식들은 부모님 집에 자주 찾아가 살뜰히 챙기던데 둘 다 그런 성격이 못 되니 우리가 즐거운 방식으로 엄마와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것도 순전히 우리 편한 대로. 자식이란 게 원래 다 이런 건가?
다른 부모님들은 “뭐 하러 그런데 가냐? 나는 안 갈란다.” 아예 나서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는데 엄마는 우리가 가자면 언제든 오케이다. 행여 안 간다고 거절했다 다음에 안 부르면 어떡하냐며 열일 제쳐두고 따라나서신다. 엄마가 이렇게 적극적일 줄 몰랐다. ‘엄마라는 꼬리표를 뗀 내 앞의 한 인간에 대해 나는 얼마나 알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천리포 수목원에 있는 비밀의 정원을 가이드와 함께 탐방할 때도 그랬다. 손을 번쩍 들고 가이드에게 폭풍 질문하는 엄마가 호기심 가득한 인간으로 낯설게 느껴졌다. 둘레길 옆 오솔길을 걷다 ‘스르륵’ 지나가는 뱀을 만나 '꺆' 소리 지르며 엄마 뒤에 숨었다 놀라운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시골집 토방으로 뱀이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글쎄 막대기로 뱀을 걷어 올려 집어던졌다나 뭐라나. 그 모습을 상상하니 왠지 웃겼다. 내가 알고 있는 엄마는 빙산의 일각임에 틀림없다.
돌봄의 주체가 아닌 한 인간인 순자 씨를 한 달에 한 번 만나고 있다. 어제는 서울에 가야 볼 법한 프리다 칼로 전시회가 차로 20분 거리에서 열리고 있어 다녀왔다. 그녀의 그림은 자신의 슬픔을 핏빛으로 표현한 작품이 유난히 많은데 엄마는 그 그림들 앞에서 한참이나 서 있었다. 그녀의 그림을 통해 엄마도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는 듯했다. 안경 너머로 그림 아래 설명을 꼼꼼히 읽으며 그림과 그림 사이를 고요히 오갔다. 전시장에는 나와 동생, 엄마 단지 셋뿐이었다.
갑자기 왜 한강의 시집에 있던 시구가 떠올랐을까?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내일이면 엄마의 말처럼 기억나지 않겠지만 까마득한 먼 옛날처럼 느껴지겠지만 인생은 이런 날들, 영원히 지나가 버릴 날들을 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는 날들을 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와 함께 하는 시간들도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 버리고 있다고. 어느 한낮 나는 이런 생각에 잠겨 전시장에서 잠시 멈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