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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하다 하다 내 동영상 속 대화 필사하기

(내 걸 제일 많이 보기)

by 하늘

“여기서 보면 몸을 안 쓴다는 느낌인 거예요. 본인은 많이 쓴다고 생각하죠?”

“예전보다는 많이 쓰죠. 이거보다 더 많이 써야 돼요.”

“아니요. 그렇게 몸을 쓰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아! 잘못 쓰고 있다고요?”

“내려갔다 올라오는 느낌으로 치는 게 아니라, 뒤로 돌았다 앞으로 오는 느낌으로만 친다고요. 그러니까 조금만 공이 낮게 오면 그냥 앉아버리는 거예요. 미리 앉았으면 올라올 때 공을 칠 거란 말이죠.”

“앉는 게 가장 큰 문제네요.”

”앉는다기보다는 내려가는 게 문제예요. 자, 서 봐요. 이제 앉아요. 이게 탁구 칠 때 기본자세예요. 여기서 더 앉아봐요. 커트 볼은 이렇게 더 앉아야 하는데, 준비 동작 자체가 기본자세에서 시작하니까 안 되는 거예요. 아무리 공이 낮게 온다 하더라도 내려갔다 올라오면 되거든요."

“(구호를 외치며 반복한다) 앉아, 앉아, 앉아”

유튜브 속 내 동영상을 누르면 2025년 4월 27일부터 올리긴 시작한 탁구 레슨 동영상 화면이 주르르 뜬다. 물론 나만 볼 수 있는 비공개 영상이다. 6년 차가 되면서 새로운 환경에서 배우고 싶어 새로운 코치님께 레슨을 받기로 했다. 레슨 전 상담에서 뭘 배우고 싶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씀드렸다 “죽기 전에(?) 포핸드 드라이브를 제대로 하고 싶습니다. 제 버킷 리스트 중 하나인데요. 서비스 넣고 포핸드 드라이브로 시작하는 탁구를 하고 싶습니다.” ‘무슨 버킷리스트까지?’ 의아해하는 코치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뭘 배우고 싶은지 분명하게 말씀드렸다.

사실 이렇게까지 말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느새 내 입에서 술술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의식의 발현인지도 모를 말. 저 깊은 곳에 잠들어 있다 드디어 때가 왔다는 걸 알았는지 줄줄 새어버린 말. 어떤 결심은 말로 꺼내 놓아야만 도달하려는 시늉이라도 하게 된다는 걸, 말하는 대로 이루어지진 않더라도 그 근방에서 어슬렁거릴 수 있다는 걸 알기에 냅다 말부터 내뱉은 건지도 모른다. 내가 한 말이 나를 멱살 잡고 끌고 가길 바라면서. 포핸드 드라이브에 대한 굳은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이 사람은 정말 포핸드 드라이브에 진심이구나’라는 진정성과 ‘아니, 버킷 리스트라면서 왜 열심히 안 하지?’라는 감시의 눈초리를 동시에 세팅해 놓은 셈이다. 가장 순수하게 원하는 것을 깎아 보겠다며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한 환경부터 만든 셈이다.

포핸드 드라이브에 마음을 다하기로 했다. 탁구 기술이 이것만 있는 건 아니지만 죽기 전에 이 기술을 제대로 구사하고 싶다. 버킷 리스트에 오를 만큼 간절하다면 이 기술에 마음을 다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리라. 동영상을 찍기 시작한 건 내 생각이 아니었다. “본인의 스윙폼을 한번 찍어 보세요."라는 코치님의 조언에서 시작되었다. 멋지게는 아니더라도 웬만큼은 치고 있다는 착각을 깰 수 있을 영상을 마주하기란 누구에게나 두려운 법이다. 영상을 찍어놓고도 한참을 미적거리다 “영상 봤어요?”라는 코치님의 압박에 마음을 단단히 먹고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아! 정녕 저게 나란 말인가? 저렇게 자세가 심하게 틀어져 있단 말이야?’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코치님이 왜 그렇게 영상을 보라고 재촉했는지 알 것 같았다. 에이!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었다. 자세는 신경도 안 쓰고 그렇게 탁구장 뛰어다니는데만 땀 흘리는 데만 열중하더니! 극단은 언제나 부작용을 초래한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기에 그래야 또 살아지기에 충격도 잠시 미친 듯이 뛰어다녔던 과거의 나를 인정하기로 했다. 뛰어다니면서 느꼈던 희열로 기뻤던 날들도 재미있었던 날들도 많았으니까. 뭐든 다 좋을 순 없으니까. “후회 안 돼요? 뭐가 그렇게 긍정적이에요?”라는 코치님께 ”후회하면 뭐해요. 지금이 중요하죠. 그래서 오래 살려고요. 이제 한 땀 한 땀 자세 만드는데 몰입하겠습니다.”라며 애써 쿨한 척했다. 코치님 말이 물론 맞지만 과거를 바꿀 수는 없는 일, 내 마음대로 오래 사는 걸로 정리하기로 했다. ‘그래, 오래 살면 되지. 100세 시대인데 이렇게 돌아가도 뭐 괜찮지 않겠어?’ 라며 나를 다독였다. “나를 진정으로 바꾸는 것은 내가 이미 행한 시행착오들뿐이다. 피 흘려 깨달아도 또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는 게 인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은 이러한 반복들로 이루어진다.”라는 문학평론가 신형철 님의 말도 떠올라 위안이 되었다. 마음 정리가 되자 영상 속 나를 받아들이기 한결 편해졌다. 레슨 영상을 찍어 내 동영상에 차곡차곡 쌓아가며 나를 마주하는 것부터 출발하기로 했다. 코치님이 쏘아 올린 공을 냉큼 받아 활용하기로 했다.

그런데 동영상을 활용하는 방법도 시기마다 달라지나 보다. 첫 두세 달은 영상을 올리기만 했다. 설거지하거나 머리 말릴 때 가끔 내 영상을 보긴 했지만, 온갖 재미있는 유튜브 영상들과 탁구 관련 유튜브 영상들에 밀려 뒤전이었다. 찬밥신세였다. 받아들일 마음이 생겼어도 나를 마주하기로 했어도 서투르고 어색한 내 모습을 20분 넘게 마주하려면 또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던 어느 날, <최성운의 사고실험>이라는 유튜브 채널에 나온 런던 베이글 뮤지엄 창업자인 ‘료’님의 이야기를 통해 내 동영상을 내 눈으로 다시 한번 보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았다. 그녀는 아침에 생산한 걸 저녁에 다시 보고 생각하면서 자신에게 인풋으로 집어넣는다고 한다. 누군가 만들어 놓은 레퍼런스(참고)도 귀중하지만, 자신이 스스로의 레퍼런스가 되어야 한다는 그녀는 자신이 생산해 낸 걸 인풋으로 받아 다시 아웃풋으로 나왔을 때 더 유니크하다고도 말한다. 심지어 이 방법이 나라는 사람을 발견해 가는 과정이라니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나를 보지도 마주하지도 않고 수많은 포핸드 드라이브 영상들을 기웃거렸다. 그래서 아웃풋인 내 동영상을 다시 보고 생각하면서 내게 인풋으로 집어넣기로 했다.

레슨 시간에 찍은 동영상을 집에 와서 내 눈으로 다시 한번 보는 게 내게 인풋으로 집어넣는 방법이다. 물론 이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요즘 내가 미쳐있는 필사를 접목시키기로 했다. 영상은 보통 20-30프로만 기억 속에 저장된다는 이야기를 어딘가에서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다 하다 레슨 때 코치님과 나눈 대화를 필사하고 있다. 20분짜리 영상 필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1시간 30분. 필사를 하다 보면 코치님도 참 극한직업이다. 똑같은 말을 하느라 입에서 단내가 나겠다. 나뿐 아니라 하루에 수십 명에게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고. 말귀를 잘 못 알아먹는 나 같은 사람은 난이도가 꽤 높은 회원이다. 분명 내려가면서 앉으라고 수없이 이야기했는데 못 따라 하니 얼마나 답답할까? 코치님 심정도 심정이지만 나 또한 그렇게 반복되는 말을 듣고도 아직 앉으면서 내려가는 게 습관이 되질 않으니! “영상 보면 코치님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말을 하던데 그 말을 얼마나 들어야 제가 바뀔까요? 만 번이요?”라고 물었더니 “만 번요? 택도 없어요. 그렇게 쉬운 게 아니에요.” 아! 택도 없는 소리구나. 그나마 코치님의 반복되는 멘트들을 받아 적으면서 ’척하면 척‘까지는 아니더라도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게 되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 코치님을 당황시켰던 날들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동영상을 나의 인풋으로 받아들이는 법 또한 발전 중이다. 한 번 보면 못 보았을 내 자세에서의 문제점도 보면 볼수록 보인다. 어깨도 팔도 다리도 전체적으로 내려가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몸 쓰는 법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팔로만 탁구 친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지만 한 귀로 흘려듣던 나였다. 일요일 저녁에는 “벽을 뒤로하고 서서 양손을 뒤로 보내 벽을 대는 정도까지 몸통을 돌려야 한다”라는 영상 속 코치님 코칭에 따라 벽에 붙어 연습하기도 했다. 탁구대 앞에서는 빈 스윙으로 얼마큼 몸을 돌리면서 내려가야 하는지 감각으로 느끼는 연습도 했다. 코치님 말대로 돌리면서 내려가기 위해서는 정말 많이 내려가야 한다는 걸 몸으로 체험하는 시간이었다. 마치 스쿼트 하듯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제 좀 익숙하겠지 싶어 탁구 로봇으로 이동해 연습한 걸 하는데 막상 공이 오니 연습한 자세가 나오질 않았다. 로봇을 끄고 빈 스윙으로 돌리면서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한 후 다시 로봇을 작동해 연습을 이어나갔다. 다행인 건 몸통이 미세하게 조금씩 써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감각이나 몸을 쓰는 원리는 무시한 채 아무 생각 없이 탁구를 치던 내가 이제야 감각과 원리에 집중하고 있다. 아웃풋인 동영상을 필사한 후 부족한 점을 고쳐나가면서 다시 내 인풋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코치님의 코칭이 인풋이고 동영상이 아웃풋이라면 그걸 내 눈으로 다시 보면서 필사한 후, 내 신체에 적용해 보는 게 내가 나 자신의 인풋이 되는 길인 것 같다.

다른 동영상에서 길을 찾을 게 아니라 답은 내게 있었다. 습관적으로 탁구 관련 동영상을 누르려하다가도 이제는 내 동영상에 들어가 나를 꺼내 본다. 보고 또 본다. 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이 새로이 보이고 지난번 이해하지 못했던 말들이 이해되는 마법은 일이 벌어진다. 내 동영상만 보려 한다. 시간은 지극히 한정적이고 내 영상 볼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다. 찍으면 끝이었던 내 아웃풋은 이렇게 반복 재생되고 있다. 내 영상의 조회수는 지금 나로 인해 점점 늘어나고 중이다. 8월 6일 자 영상은 무려 14회를 보았다. 내가 나를 보는 시간이 많아진 시스템. 이 채널 저 채널 기웃거리던 내가 요즘은 내 걸 제일 많이 보는 나로 바뀌었다. 내 신체를 자세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탁구에 관련된 것뿐이 아니다. ‘아! 내가 저럴 때는 저런 말을 하는구나. 자기 합리화도 참 잘하는구나. 코치님 말을 참 안 듣는구나. 저럴 때는 저런 표정이구나. 자아가 여러 개구나 ’ 여러 번 보다 보면 이렇듯 온갖 생각들이 교차한다. 나라는 인간이 어떤 사람인지 동영상 속 나의 말과 행동에 그대로 배어 있다. 내 걸 제일 많이 보는 게 나를 발견해 가는 과정이라는 말이 맞는 듯하다. 그래서 습관이 될 때까지 내 동영상에 심취해 있으려고 한다. 내가 나의 인풋이 되려 한다. 인풋과 아웃풋 그리고 이 아웃풋을 다시 나한테 인풋으로 집어넣는 시스템. 내가 나 스스로의 레퍼런스가 되는 시스템. ‘료’님의 말처럼 매일 손에 닿는 범위 내에서 자가발전 할 수 있는 시스템. 돈 한 푼 안 들이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아가게 하는 방법을 찾다니! 일회성이 아닌 지속 가능한 방법, 나에게 집중하는 삶, 진짜 나로 사는 법은 지극히 단순한 데 있었다. 내 걸 제일 많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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