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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야말로 인류가 지향하는 보편적인 코스가 아닐까

(필사의 말들) 고미숙 『조선에서 백수로 살기』

by 하늘

“소크라테스, 공자, 부처, 노자. 이들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우리 시대의 언어로 치환하면 백수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귀족과 자유인, 조선 시대의 양반, 인도의 브라만. 이들의 공통점 역시 백수다. 직업과 노동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면 백수야말로 인류가 지향하는 가장 고매하고도 보편적인 코스가 아닐까.” (p.72)

30대 중반에 박사학위를 받고도 중년 백수가 되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고전 평론가’라는 직업을 직접 만든 고미숙 선생님이 이렇게 백수를 찬미하는 이야기를 했더니 현장에 있던 청년, 중년들이 열광했다고 한다. 가슴속에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은 표정들이었다고. 그녀는 이러한 현상이 의미하는 바를 사람들 마음속에 이미 백수의 열망이 파동치고 있지만 그걸 어떻게 공공연한 담론으로 끄집어낼지 잘 몰랐을 뿐이라고 해석한다.

아이들이 대학에 입학해 집을 떠남으로써 전업주부의 두 축인 육아와 살림 중 한 축이 끝나자 내게도 백수의 시대가 왔다. 중년 백수로 살 것인지 아니면 일하러 나갈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일과 하고 싶은 일 중 하나를 골라야 했는데 20년 육아에 대한 셀프 선물이라는 강력한 자기 합리화가 승리하는 바람에 글 쓰는데 3년이란 시간을 주기로 했다. 10년 이상 읽기만 했으니 한 번쯤 글이라는 굴을 깊이깊이 파보고 싶었다. 감사하게도 이 기간에 쓴 글이 책 한 권으로 묶여 세상에 나와 언제 들어도 듣기 민망하고 쑥스러운 ‘작가’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선물이었던 3년의 글쓰기 시간도 첫 책 출간과 함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이제 정말 일하러 나가야 하나?’ 결단의 시기가 다시 찾아왔다. 지금 내 정체성을 말하자면 이제 막 책 한 권을 낸 저자, 읽고 쓰는 사람, 필사가 일상인 필사 생활자, 중년 백수다. 마침 독서활동가로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겠다는 제안을 받아 고민은 깊어졌다. 독서활동가로서의 일과 지금 하고 일(읽고 토론하고 쓰고 필사하고)을 병행하고 싶어 하는가? 아니면 3년이란 시간에 이어서 계속해서 글 쓰는 일에만 집중하고 싶어 하는가? 둘 사이에서 다시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지난번에 이어 이번에도 필요한 건 자기 합리화다. 자기 합리화를 위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 있다.

사놓기만 하고 책장 한구석에서 잠자고 있던 고전 평론가 고미숙의 『조선에서 백수로 살기』에서 답을 찾기로 했다. 책을 사놓았다는 건 아마 백수로 살고 싶다는 무의식의 발현이었을지 모른다. 지금 당장 내게 필요한 말이 이 책에 있을 것 같았다. 지난번에도 사실은 백수로 살고 싶었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백수로 사는 것에 대한 불안과 죄의식을 느끼는 이중 플레이 때문에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것 같다. 3년의 글쓰기 시간을 스스로에게 주는 셀프 선물이라며 그럴듯하게 포장하면서 백수로 살고 싶은 마음을 애써 감췄던 것 같다. 분명 마음은 매일 출퇴근을 하고 똑같은 노동을 쳇바퀴처럼 반복하면서 행복할 자신이 없는데 어떻게든 직업을 가져야 된다는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니, 스스로를 자책하고 괴롭히지 않기 위한 일종의 방어기제를 만든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원초적 욕망은 직업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한다. 자본주의에 와서 유독 노동에 대한 예찬과 직업에 대한 열망이 생겼다. 삶이나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화폐의 증식을 위해서다. 화폐의 증식을 위해서라면 사람들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노동을 열망해야 한다.”라고 저자는 세바시 강연에서 말했다. 나 또한 노동에 대한 예찬과 직업에 대한 열망이 뿌리 깊이 내면화되어 있어 직업을 갖지 않고 노동을 하지 않으면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 중 하나다. 그러니 ‘백수’라는 단어를 받아들이기 힘들어 백수는 아니라고 지금은 단지 선물을 받고 있는 중이라며 스스로를 세뇌시켰던 것 같다.

이제는 백수로 살고 싶은 마음과 백수로 사는 것에 대한 불안과 죄의식을 느끼는 이중 플레이에 지쳤다. 이미 마음은 3년이란 시간에 이어 계속해서 읽고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결정을 내렸지만 앞으로 백수로 살면서 계속해서 글을 쓰려면 “백수여도 괜찮은데. 백수여서 좋은데.”라는 확신이 필요했다. 이러한 삶의 형태도 괜찮다고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납득시킬만한 근거가 필요했다.

백수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가 필요한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시대적인 흐름에서 개인은 자유로울 수 없으니 ‘나라는 인간은 어떤 시대에 살고 있나?’ 에서부터 시작하려 한다. 광활한 우주 속 지구라는 행성, 지구라는 행성 속 피엔스로서 나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가?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인류는 노동으로부터 점점 벗어나고 있다. 저자는 이를 ‘노동해방’이라고 부른다. 앞으로 노동은 대부분 알파고, 인공 지능, 사물 인터넷 등이 담당할 것이기 때문에 노동은 줄어들거나 사라질 것이고 그나마 인간이 하는 노동이라곤 클릭이 전부인 시대, 노동하고 싶어도 노동할 수 없는 시대가 올 것이다. 대세가 이러할진대 내 마음은 여전히 직업을 갖고 노동을 하지 않으면 죄책감을 느끼는 지점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고 있지 못하다.


“어차피 모든 가치와 상식은 시대적 합리화의 산물이다. 노동과 화폐, 소비와 과시가 성공의 척도라는 것 역시 시대적 합리화에 불과하다.” (p.72) 나 또한 노동과 화폐라는 시대적 합리화에 깊이 세뇌되어 이것이 진리라 믿으며 살아왔다. 그러니 노동이 필요 없는 시대가 왔음에도 ‘그래도 일을 해야 하지 않아? 노동을 해야 하지 않아? ’라는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사실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으면서, 현실은 그렇게 살지도 않으면서. '인간의 본질이 노동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은 스스로에게 단 한 번도 하지 않으면서.

기계가 노동을 대체해 인간이 노동에서 해방되리라는 건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다. 노동이 필요 없다는데 기어코 평생 노동을 하겠다고 우길 수 없는 시대가 왔다. 이러한 시대에 백수는 더 이상 특별한 상태가 아니라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존재다. 백수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청년 백수, 중년 백수, 장년 백수, 노년 백수. 사방에 백수가 넘쳐나고 누구든 언제든 백수가 되는 기간을 거쳐야만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야말로 백수는 전 세대에 걸쳐 누구나 겪어야 되는 삶의 단계가 되었다. 실제로 주변을 둘러보면 가까운 지인부터 친인척들까지 백수가 넘쳐난다. 직업을 구하거나 직장을 다니다 이직 전 잠시 쉬는 청년 백수, 육아에서 해방되었지만 직업을 갖는 대신 자신의 취미 생활에 매진하는 중년 백수, 퇴직 후 제2의 인생을 위해 이것저것 배우는 정년 백수 등등. 다양한 형태의 백수들이 존재한다.


백수는 이제 열등하거나 비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존재 형태로 주변에 넘쳐 날 것이다. 우리나라뿐이겠는가? 전 세계가 백수로 넘쳐날 것이다. 백수로 살 수밖에 없는 시대가 왔다. 세상이 바뀌었다. 그러니 이제 그만 '그래도 일을 해야 하지 않아?'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이전 시대의 가치에 묶여 '그래도 일을 해야 하지 않아?' 언제까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거냐고? 언제까지 이런 생각에 빠져 있을 거냐고? 이왕 이렇게 된 거 백수가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자연스러운 존재형태라는 걸 빨리 인정하고 '그럼 나는 백수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구하는 편이 지금 여기, 현재를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백수로 살아야 하는 삶의 단계가 찾아왔다. 거기다 눈앞에 100세 인생까지 펼쳐졌다. 그럼 이 긴 시간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저자는 동서양의 고전을 읽으면서 인류 최고 지성들의 공통점이 백수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백수의 계보학을 통해 백수로 백세 인생을 사는 최고의 전략이 지식에서 지성으로, 지성에서 다시 지혜로 나아가는 지평선을 각자의 현장에서 각자의 속도대로 거침없이 달려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배우면 된다. 인생과 우주에 대하여, 마음의 행로에 대하여, 역사와 종교에 대하여. 그동안 먹고 사느라고, 지지고 볶고 싸우느라고, 또 수명이 짧아서 하지 못했던 일을 누구나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식과 삶이 마주치면 지성이 된다. 백수는 당연히 지성을 연마해야 한다. 그 지성이 삶과 죽음의 경계로 나아가면 지혜가 된다. 지식에서 지성으로, 지성에서 다시 지혜로 나아가는 지평선이 우리 앞에 펼쳐졌다. 그럼 우리가 이제 할 일은? 그 지평선 위를 거침없이 달려가는 것뿐! 각자의 현장에서 각자의 속도대로. 소크라테스, 공자, 부처와 장자 등 인류의 영원한 멘토들이 그랬던 것처럼. 백수의 원조이자 21세기 청년들의 영원한 '길벗' 연암 박지원이 그랬던 것처럼. 이것이 백수 시대에 백세 인생을 살아가는 최고의 전략이다. 단언컨대 이보다 더 좋은 삶은 없다. 고로, 백수는 미래다."(p.273)


백수의 계보학으로 백수를 찬미하고 백수가 인류의 미래라는 저자의 관점은 백수로 살기로 한 내게 아주 큰 힘이 된다. 소크라테스, 공자, 부처와 장자에 이어 연암 박지원 그리고 고전 평론가 고미숙. 이런 사람들이 백수의 롤모델이라면 백수로 살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처럼 세상의 잣대에 한없이 팔랑거리는 사람에겐 어떻게든 부여잡고 따라갈 사람이 필요하다. 붙잡고 살아야 할 문장이 필요하다.


“소크라테스, 공자, 부처, 노자. 이들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우리 시대의 언어로 치환하면 백수다. 그렇다면 백수야말로 인류가 지향하는 가장 고매하고도 보편적인 코스가 아닐까.”라는 저자의 말에 청중이 열렬한 반응을 보인 것도, 내가 이 말에 해방감을 느낀 것도 어쩌면 이미 백수의 열망이 나도 모르게 파동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저자의 이 말을 백수로 살아도 괜찮다는 말로 받아들이려 한다. 백수로 사는 데 있어 큰 기둥이 되는 문장으로 삼고 살아가려 한다. 그래야 주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지식에서 지성으로, 지성에서 다시 지혜로 나아가는 지평선을 달릴 수 있을 것 같다. 달릴 수 있는 만큼 달려 보고 싶다. 지금 앉아 있는 이 책상 위에서, 내 방식대로, 내 속도대로. 갑자기 해야 할 일들이 많아진 것 같다. 읽어야 할 책도 써야 할 글도.


그런데 웃기는 건 이러한 나의 다소 거창한 다짐과는 별개로 "왜 일 안 해요?"라고 물어올 사람들을 위해 그럴듯한 이유를 찾아 메모해 두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물어오는 사람들이 꽤 있다. "백수는 존재만으로 덕을 베푸는 존재다. 우선 내가 백수가 된 덕분에 누군가 일자리를 얻었을 테니까. 그뿐인가. 백수는 당연히 적게 벌고 적게 쓸 수밖에 없다. 이것보다 더 훌륭한 생태주의는 없다. 또 아무도 백수를 보고 긴장하지 않는다. 경쟁심을 느끼지도 적대감을 갖지도 않는다. 저절로 평화와 힐링의 메신저가 된다."(p.270) 언제 써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왜 일 안 해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움츠러드는 나 자신을 위한 문장이기도 하다. 다짐 따로, 현실 따로? 굳이 내 생각을 장황하게 말할 순 없으니 이 중 하나를 골라 대충 얼버무릴 게 뻔하지만 그럼에도 예전보다는 어깨를 쫙 피고 웃으면서 이유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으로선 그거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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