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의 말들) 천선란 『천 개의 파랑』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했다. 경마장에서는 빠른 말이 1등을 하지만, 느리게 달린다고 경기 도중 주로에서 퇴출당하지는 않았으므로, 애초에 천천히 달리는 것이 규정에서 어긋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p.349)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나 자신이 레이 리오니의 그림책 『프레드릭』 의 주인공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왜 일을 안 하냐는 다른 쥐들의 질문에 춥고 어두운 겨울날을 위해 햇살을 모으고 있다고 말하는 프레드릭, 친구들이 꿈꾸고 있는 거 아니냐고 물을 때 이야기를 모으고 있다고 대답하는 프레드릭. 아마 그 당시 일주일 내내 읽은 책을 독서 모임에서 토론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그 책에 대해 충분히 생각할 사유의 시간을 가졌기에 스스로가 이야기를 모으는 프레드릭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설거지를 하거나 빨래를 개킬 때에도 책 속 문장이나 토론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들이 머릿속을 떠다니며 생각해 보라고 곱씹어 보라고 주문을 외우는 듯했다. 한 주의 토론이 끝나면 한 주의 사색할 시간이 필요했다. 사유의 시간으로 한 주를 보내다 보면 언제 어디서 만날지 모르는 춥디 추운 날을 위해 이야기를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한 권의 책을 온전히 통과해 나가고 있는 것 같은 충만함 또한 큰 즐거움이었다.
이랬던 내가 지금은 ‘프레드릭’처럼 느껴졌던 과거의 나를 그리워하고 있다. 과거를 그리워한다는 건 현재가 만족스럽지 않다는 반증. 책을 제대로 깊게 읽기 위해 필사를 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필사와 필사 사이 사유하는 시간이 짧아지면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내 안의 프레드릭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경주마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어떤 일이든 꾸준히 하면 가속도가 붙는다는 걸 미처 알지 못했다. 필사에도 가속도가 붙을 줄이야! 필사의 세계에 속도전이라니 웬 말인가? 필사의 본질을 생각해 봐야 할 시간이 찾아왔다. 필사의 사전적 정의는 ‘책이나 문서, 글 등을 손으로 직접 베껴 쓰는 행위’며, 필사의 효과로는 ‘문장을 곱씹으며 사고력이 확장되며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라는 데 있다. 경주마가 과연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
글은 쓰고 싶어 미치겠는데 글 쓰는 법을 한 번도 배워본 적이 없기에 선택한 방법이 필사였다. 글을 쓰면서 필사 정도는 해야 내가 쓰는 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해 시작한 것이 필사의 시작이었다. 내가 쓰는 글에 대한 예의, 스스로 차리기로 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책 한 권당 적게는 A4용지 5장부터 30장까지 인상적인 문장을 필사해 나가기 시작했다. 점점 늘어가는 필사의 양 때문에 ‘왜 책 한 권을 다 필사하지 그래?’라는 생각이 들기도 수차례였다. “이번 책부터는 기어코 필사 문장을 줄이겠어!” 다짐하고 필사를 시작해도 끝은 매번 똑같았다. 글쓰기 초보에게는 이 문장도 저 문장도 다 필사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문장으로 느껴졌다. 어쩌다 필사하지 못한 문장이 계속 생각나는 바람에 책을 다시 펼쳐 필사해 추가하기도 했다. 그렇게 미련을 떨었고 필사를 병행한 글쓰기는 계속되었다. 그렇게 필사와 나란히 출발한 글쓰기는 감사하게도 어느 날 출간 기회가 찾아와 책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아마 필사가 중심을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과연 내 이름의 책이 세상에 나왔을까 싶을 정도로 나의 글은 필사에 많은 부분 빚져 있다. 책이 나올 무렵 필사한 책이 100권쯤 되었기에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어느새 글쓰기와 세트가 되어버린 필사. 이렇듯 습관이 되어버린 필사는 급기야 읽은 책을 필사하지 않으면 책을 읽은 것 같지 않은 중병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주에 한 번 있는 대면 독서 모임 책, 한 달에 한 번 있는 전국구 줌 독서 모임 책, 개인적으로 읽는 책 모두를 필사해야 직성이 풀렸다. 이 병은 필사한 문장을 일상에 녹이는 글을 쓰지 않고서는 나을 병이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래서 책 출간 후에는 책을 읽고 필사한 후, 필사 문장 중 하나를 골라 일상에 녹이는 글을 쓰는 필사 생활자로 살기로 했다. “이제 이만큼 썼으면 쓸 만큼 쓴 거 아닌가? ”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해 줄 수 있을 때까지 필사한 문장과 나를 잇는 글쓰기에 마음을 다하기로 했다. 나여야만 닿을 수 있는 곳에 가보기로 했다. 이 시간을 아주 천천히 통과하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갈 길을 아는 것과 그 길을 걷는 건 다르다. 필사에 빠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필사의 영역도 확장되었다. 책은 물론 책을 쓴 작가의 유튜브 강의도 필사하기 시작했다. 유튜브에 있는 글쓰기 강의부터 글쓰기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이라면 사고 확장에 도움이 될 만한 영상이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필사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였나부다. 사유의 시간보다 필사라는 행위 자체에 매몰된 게. 책 한 권씩 핸드폰 메모장에 필사한 후 인쇄한 A4용지와 유튜브 동영상 강의를 필사한 필사 노트가 점점 쌓여 가는데 책 한 권을 온전히 통과해 나가고 있다는 충만감을 느낄 수 없었다. 강의 영상을 내 것으로 제대로 흡수했다는 감각 또한 느낄 수 없었다. 그저 필사라는 행위에 중독돼 다음 필사할 걸 찾아 계속 내달리는 내가 있을 뿐이었다. 흡사 경주마가 된 것 같은 내가 있을 뿐이었다.
뭐가 문제였을까? 나는 원래 느리고 느린 사람이다. 책을 한 주 읽었으면 한 주는 느리게 골똘하게 사유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사람인데 이 점을 간과했다. 사유의 시간이 점점 짧아지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그러니 당연히 즐겁지도 만족스럽지도 않았다. 필사의 세계에서 속도전을 하고 있는 내가 우습고 기괴해 보였다. 필사의 세계는 빠른 말이 1등을 하는 경마장도 아닌데, 나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빠른 속도로 내달리고 있나? 의문이 들었다. 결국 넓고 크게 생각하면 필사도 내 삶을 잘 살기 위한 한 방편일 뿐인데 말이다. 아무도 천천히 필사한다고 뭐라고 하지 않는데 아니 심지어 관심조차 없을 텐데. 같은 시대를 살고 있을 뿐 모두 각자의 시간을 살고 있을 텐데. 인생이라는 경기라면 주로에서 퇴출당하지도 않을 텐데. 애초에 천천히 달리는 것이 규정에서 어긋나지도 않을 텐데. 무얼 위해? 나야말로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천천히, 느리게, 여유 있게. 느린 호흡으로. 하늘도 쳐다보고 주변도 둘러보고. 내게는 필사생활자로서의 나의 주로가 있으니 이것만 보고 달리면 되는데. 어차피 이 주로는 나만 달릴 수 있는데. 내 속도에 맞춰 달리면 되는데.
“글쓰기를 계속한다는 것은 시간의 기울기에서 빠져나와 멈춰 서는 것, 혹은 반대 방향을 향하는 것이라고 이해해도 괜찮을까.”라는 프랑스 소설가 아니 에르노의 말이 떠오른다. 그녀 말대로 내가 쓰는 글도 시간의 기울기에서 빠져나와 잠시 멈추는 지점에서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니 나의 글쓰기와 한 세트인 필사 역시 시간의 기울기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세상의 속도에서 잠시 비켜선 세상이라 생각했던 필사의 세계에서 속도라는 복병을 만날 줄은 정말 몰랐다. 어느 세계든 잠시만 방심하면 세상의 속도에 휩쓸려 가기 쉽다는 걸 알았다. 바위에 앉아 가만히 이야기를 모으고 있는 책 속 프레드릭의 모습이, 한 주 내내 생각에 잠겨 있던 내가 그립다.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