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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가족의 경제, 문화적 포트폴리오가 공개되는 순간

(일상의 말들)

by 하늘

“결혼은 가장 비용이 많이 드는 행사이고, 짧은 시간에 그 가족의 경제, 사회, 문화적 포트폴리오가 압축적으로 공개되는 순간이다”

98년생 아들의 결혼식 식 날. 여자친구를 인사시키기 위해 작년 12월 7일에 내려오고, 올 2월 8일 양가 상견례를 시작으로 약 1년간의 결혼 준비 끝에 아들은 턱시도를 입고 신랑 입장을 위해 버진 로드 위에 서 있다. 우린 혼주석에 앉아 이 식의 조연으로서 만반의 준비를 한 채 오늘의 주인공들인 신랑, 신부의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조연 넷과 주연 둘의 퍼포먼스인 결혼식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결혼한다고? 너무 빠른 거 아냐?’” 스물여덟을 한 달 앞둔 아들이 결혼한다고 했을 때 예상치 못한 소식에 가족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 생에 닥쳐오는 수많은 일들이 늘 그렇듯 이 일 역시 예고 없이 어느 날 불현듯 찾아왔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인 법. 맨 처음 든 생각이 이를 여실히 증명해 주었다. ‘이 나이에 벌써 시어머니가 된다고?’ 비교라면 질색하던 사람이 74년생인 나와 나이가 비슷한 엄마들을 떠올리며 ‘또래 중에는 내가 처음이겠군.’을 연발하며 비교의 정점을 찍고 있었다. 가급적 ’ 비교‘라는 단어는 저만치 밀어놓고 살려고 발버둥 치던 인간이 자식 결혼을 앞두고는 속수무책으로 ‘비교’라는 세계에 성큼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사회적인 관습이나 관행 앞에서는 나도 그저 별수 없는 인간이라는 걸 지극히 사회적인 인간이라는 걸 결혼 준비를 하는 내내 뼈저리게 느꼈다. 얼마나 많은 것들에 비교라는 잣대를 들이대던지!


“결혼은 짧은 시간에 그 가족의 경제, 사회, 문화적 포트폴리오가 압축적으로 공개되는 순간이다.”라는 문장을 어느 책에서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누군가의 말을 받아 적었을 수도. 핸드폰 메모장 폴더 속에서 고요히 잠자고 있던 수만 개의 필사 문장 중에서 마침내 때가 되어 수면 위로 떠오른 문장. 나조차 제대로 인지하고 있지 않은 우리 가족의 경제, 사회, 문화적 포트폴리오가 결혼 준비과정 내내 때로는 가족 구성원들에게 때로는 주변 사람들에게 공개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학교도 졸업 못하고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아들을 사돈댁이 반대할 법도 한데, 대학교 2학년 때 밴드 동아리에서 만난 형과 사업을 시작해 지금까지 이끌어 온 아들이 마음에 드셨는지 결혼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사돈댁이 허락한 이상 졸업하지 못한 것과 군대 문제는 더 이상 결혼의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남편과 나는 졸업도 하고 군대도 다녀온 후 결혼하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컸지만, 요즘 아이들이 부모 말을 듣는 것도 아니고, 한편으론 ‘본인 인생이고 본인도 뜻한 바가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아들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부모 자식 간 대립으로 치달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다 큰 성인인데 그렇게 해봤자 아들과 관계만 나빠질 뿐이라는 걸 알기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걸 알기에 아이의 결정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들의 결혼은 그렇게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공개되는 결혼식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과정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결혼 당사자가 아니라 혼주로서의 경험은 처음이기에 모든 게 낯설었다. 우리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결혼 문화가 때론 신선하기도 때론 이해하기 힘들었다. 첫 번째 단계는 양가 상견례. 양가 가족들에게 태블릿을 나눠준 후, PPT를 통해 양가 가족들을 소개하고, 결혼 준비 과정을 알려주는 건 정말 신박했다. 상견례 시 주의사항까지 친절하게 설명하는 아이들을 보며 ‘시대가 정말 변했구나’를 체감했다.

변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 역시 PPT라고 하기엔 애매하지만 PPT 비스름한 걸 준비했다. 자식을 결혼시키는 부모라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아이들이 결혼할 때 혹은 집을 준비할 때 얼마를 도와줄 수 있느냐일 것이다. 결혼 과정 중 가장 힘들었던 게 이 금액을 정하는 일이었다. 상견례 날 아이에게 말해주기로 하고, 일주일 전부터 이를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어렴풋이 알고 있던 우리 가족의 경제 포트폴리오가 공개되는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기존의 경제 포트폴리오를 점검하고 재조정해야 할 때. 아들뿐 아니라 추후 결혼할 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금액이기에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 부부가 옛날처럼 60-70세에 죽는 세대가 아니라 90-100세까지도 살 수 있다는 점, 60세 퇴직 후 30년 이상 연금만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점, 시부모님은 돌아가셨지만 친정 부모님이 아프실 경우 도와 드려야 한다는 점 등등. 고려해야 할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친정 부모님, 우리 부부, 아들 부부 전체를 놓고 봤을 때 무리하게 도와주다간 3대 모두 힘들어질 수 있으니 신중해야 했다. 남편과의 여러 차례에 걸친 회의 끝에 “많다, 많지 않다, 적다, 적지 않다.”라는 말이 돌림노래처럼 수차례 오고 간 후에야 드디어 금액이 정해졌다. 이렇게 인생 전반에 대한 걸친 경제 포트폴리오 재조정은 아들의 결혼을 계기로 이루어졌다. 자식 결혼이 쏘아 올린 공 우리만이 아닌 위아래 3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다음 스텝은 결정된 금액을 자식들에게 어떻게 전달하느냐였다. 분명 우리 돈을 주는데도 불구하고 더 많이 보태주지 못하는 아쉬움 내지는 죄책감 때문에 자꾸 변명하는 것 같은 문장에 심란했다 하지만 마음을 다잡고 아들과 딸에게 전하는 장문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평소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우리 부부의 일대기 즉 신혼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서 지금의 우리가 되었는지, 이러한 금액이 나오게 된 배경과 금액 등등. 말로 할 수 있지만 부모 자식 간 돈 문제라 행여 말실수를 할까 싶어 택한 방법이다. 굳이 글로 써서 전달한 가장 큰 이유는 결정된 금액은 단지 숫자가 아니라 아빠, 엄마가 그 돈을 모으기 위해 얼마나 오랜 기간 열심히 살아왔는지에 말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돈이 아니라 그 돈에 담긴 서사를 전해주고 싶었다. 말로 했다간 휘발되어 다 날아갈 것만 같았다. 누군가에게는 많은 돈일 수도 누군가에게는 적은 돈일 수도 있지만,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이야기가 담긴 돈이니 모쪼록 감사히 받기를 바랐다. 이건 순전히 나와 남편 생각이고 아이들 생각은 또 다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상견례 후 가족만 자리한 카페에서 준비해 간 글을 가족 톡방에 올리고 긴 글을 읽어 내려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솔직히 떨렸다. 만에 하나 부족하다고 하면 어떡하지? 걱정하기도 했다. 속이야 어떻든 간에 천만다행으로 아들, 딸 모두 감사하다고 말해줘 고마웠다. 이렇게 PPT 비스름한 장문의 메시지가 아들과 딸에게 전달되면서 결혼의 가장 큰 난제는 해결되었다. 해결이 아니라 타협일 수도 아니 설득일 수도 있는 일은 그렇게 끝이 났다. 아들은 아들의 PPT를 하고 우리는 우리의 PPT를 했다.

두 번째는 결혼식장 문제. 여기서 아들과의 문화적 차이를 가장 많이 느꼈다. 아들이 강남 한복판, 그것도 청담동 하우스 웨딩을 하는 곳에서 결혼하고 싶다고 했을 때 우리 부부는 “아니, 자기가 무슨 연예인이야?” 라며 깜짝 놀랐다.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계인 것 같은 곳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남편이 대기업 직원이지만 둘 다 아무것도 없이 시작해 정말 지독하게 아껴 지금의 자산을 일군 우리가 볼 때 평소에도 사업하는 아들의 마인드를 이해하기 어려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샐러리맨과 그의 아내로 평생을 살아온 우리 부부에게 아들은 그렇게 가끔씩 낯선 존재였다. 문화가 다르고 생각이 달랐다. “사업하잖아. 시대가 다르잖아. 우리 아들만 그러는 건 아니잖아.”라며 마음을 추스르며 아무리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나도 모르게 한 번씩 불만 섞인 말이 튀어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절약하다 못해 지독히 살아온 우리 가치관으로는 결혼식 비용에 그렇게 많은 돈을 쓴다는 게 결혼식 날 하루를 위해 그렇게 많은 돈을 태운다는 게 납득이 되질 않았다. 하지만 ‘결혼식 비용을 아껴 주거비용에 보태는 게 훨씬 합리적이고 지혜로울 텐데’라는 생각은 그저 우리의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결국 “우리 가치관 하곤 맞지 않는다. 정말 그곳에서 하고 싶다면 네가 모은 돈으로 해라. 우린 너무 부담스럽다. 우린 하객들 식대만 부담하겠다.”라는 타협안이 나왔다. 그렇게 가족 내 신구 세대의 문화적 차이는 조정을 거쳐 오늘의 결혼식이 있게 된 것이다. 다행히 아들이 모아놓은 돈이 있기에 가능한 결혼식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에겐 과한, 분에 넘치는 결혼식이다.

위에 열거한 두 가지 과정 말고도 하객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일들이 결혼식 전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과정을 하나하나 건너온 아들이 마침내 저기 서서 신랑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가장 비용이 많이 드는 행사이고, 짧은 시간에 그 가족의 경제, 사회, 문화적 포트폴리오가 압축적으로 공개되는 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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