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스스하진 않지만 속 시끄러운 책무덤.
얼마 전 서랍장을 뒤지다 그곳에 봉인되어 있던 물건들을 만났습니다.
혹시 몰라 챙겨둔 부품, 알맹이 없이 남겨진 케이스, 더 이상 쓰지 않는 전자기기.
해외 연수를 다녀온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합니다.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물건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고. 이민가방 몇 개로 온 가족이 이동할 수 있다고 말이죠.
한창 미니멀리즘에 꽂혀 있을 때, 집에 있는 옷의 개수를 다 세서 그 수의 평형을 지켰던 적이 있습니다.
사실 기계적인 수의 평형은 옷을 새로 사고 있던 옷을 버리면 그만이었기 때문에 소유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본질에 가닿지는 못했습니다.
불어난 세간살이와 퇴근 버스마냥 비좁은 옷장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한구석이 석연치 않지만 당장하고 있는 일에 주의를 돌려 오늘도 모른 척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가장 모른척하기 힘든 세간은 바로 책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제 눈앞엔 난립하는 아파트 공사 현장처럼 여기저기 책기둥이 올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노트북 작업을 할 책상의 건폐율을 늘리기 위해 책기둥을 이동시키지만 그때뿐입니다.
잡다한 관심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는 서가에는 테트리스처럼 빈틈없이 책이 들어차 있습니다. 한 권을 빼려면 주차한 책 몇 대를 빼야 하는 난감한 상황.
비록 책장문으로 가려져 있어 눈에 보이진 않지만 어린왕자가 오랜 잠에서 깨어난 사막 우물의 노랫소리를 듣듯이 저는 책장에 잠들어있는 책들의 원성을 듣습니다.
괴담 같지만 저는 책의 무덤에 둘러싸여 있는 셈입니다. 전혀 무섭진 않지만 속이 시끄러워지는 무덤이죠.
더듬더듬 책을 펼쳐 소생시키는 것 말고는 부채의식을 덜 방법은 없을 겁니다.
빚잔치를 마친 책은 다른 곳으로 여행을 보낸다면 금상첨화겠죠.
오늘도 책기둥 사이로 몸을 비집고 서폐소생술을 하고 있어요.
한 권의 책이 무덤에서 걸어 나오기 직전입니다.
깨어난 책을 위해 책거리를 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