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지식을 전달해 주는 책도 좋지만, 가끔씩은 이야기가 있는 책에 엄청난 몰입을 한다. 왜냐하면 그 책들을 나를 그들이 만든 세상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준다. 때로는 지나친 염세주의자로 만들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사랑에 빠져 주변의 모든 것을 내팽개쳐버리는 맹목적인 젊은이로 만들어주기도 한다. 때로는 사건에 미쳐있는 탐정으로 만들어주는가 하면, 때로는 미치광이 살인마로 만들어주기도 한다. 한 권의 책을 읽고 나면 마치 블랙홀의 입구에서 출구로 나오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래서 마치 타인의 몸에서 막 빠져나온 나의 실제 영혼이 조금은 지쳐있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고난 후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몸에 힘이 빠져나간 듯한 느낌이 드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앤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언제나 나를 앤이 살았던 1800년대 중후반의 캐나다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로 데려간다. 앤의 배경인 프린스애드워드 섬은 곳곳이 경치가 좋기로 유명한 캐나다에서도 국립공원으로 지정될 만큼 경치가 그림 같은 곳이었다. 그곳은 끝없는 잔디가 펼쳐져 있고, 아름다운 호수와 바다가 이어져있었다.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은 끝없이 펼쳐진 잔디들에게 그들의 말을 전하기라도 하듯 차례차례 움직이며 재잘거리기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곳곳에 있는 덩치가 큰 나무들 사이로 내리는 햇빛을 올려다보고 있노라면 마치 크게 뻗어있는 나무줄기 전체가 하나의 보석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던 풍경 속 그곳에서 앤과 끝없는 대화를 나누고 나면 또 다른 의미로 한참을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래서 그 넘치도록 순수한 마음이 오히려 나를 더 아리게 만든다.
아이가 이제 말을 하고 놀고 있는 모습을 보면 더욱더 그런 생각이 든다. 아이의 순수함을 지켜주고 싶다고 말이다. 순수하기만 해서는 살아가기가 너무나 힘든 세상이지만, 마음속 어딘가에는 지금의 순수함을 남겨두게 해주고 싶다. 아이의 마음속에 방이 여러 곳이 있다면 넓고 좋은 방을 내어주고 싶다. 순수함을 잃는다는 건 세상의 재미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슬픔은 슬픔 그대로 받아들이고, 좋고 행복한 것도 그대로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아이였으면 좋겠다. 슬픔 뒤에는 기쁨이 언제나 다가올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본능으로 아는 아이였으면 좋겠다.
앤의 대사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아, 정말 멋진 날이야! 이런 날엔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지 않니? 아직 태어나지 않아서 이 기쁨을 맛보지 못한 사람들이 안 됐어. 물론 그 사람들한테도 좋은 날이 오긴 하겠지만 오늘 같은 날은 다시없을 거야."
너무나 행복해서 내생에 다시는 이런 날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드는 날도 분명히 나에게도 있었다.
그리고 아이에게도 그런 날이 있을 것이다. 더없이 행복한 날. 그런 날 들이 엄청나게 많지는 않겠지만, 그런 행복이 나에게 다가왔을 때, 조금의 흘림 없이 그것을 내 안에 담을 수 있는 방법 또 그런 행복이 높은 확률로 나에게 오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많다는 것을 아이에게 가르쳐주고 싶다.
가슴이 벅찬 순간들이 어떤 느낌인지 알게 해주고 싶다. 그래서 그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