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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아 Dec 08. 2022

에스컬레이터를 거꾸로 오르는 남자

한걸음 한걸음 내딛다


회사로 복귀한 달은 몸도 마음도 여유가 없다.

사실 머릿속 여유가 없다. 머릿속엔 많은 생각들과 해야 할 일들로 꽉 차있다. 직장을 다니며 두 아이를 키우는 중년의 내 위치가 그런 거겠지.

회사의 익명게시판에는 매일 분노의 글들이 도배되고 있다. 아이는 수능을 끝내고 방황하고 있고 오래된 부모님 집의 세입자는 빨리 나가게 해달라고 자기의 어려운 처지를 생각해 달라고 애원한다. 회사의 어지러운 상황과 내 개인적인 여러 상황이 겹치다 보니 과부하가 걸린 것 같아 때론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회피할 수 없다는 걸 아는 것도 내 나이인걸.


전철로 퇴근을 하고 있었다. 혼잡한 시간이 지난 저녁 무렵이라 사람들의 부대낌 없었지만 내 머릿속은 온갖 생각들로 계속 부대끼고 있었다. 내려야 역에 도착해서 긴 에스컬레이터에 올라선 순간 앞에 있던 남자가 바로 옆의 하행 에스컬레이터를 바라보는 걸 봤고 나도 이상한 느낌이 들어 그를 따라 보았다.

60대 정도 되어 보이고 잘 차려입은 한 남자분이 상기된 얼굴로 하행 에스컬레이터 밑에서 거꾸로 오르고 있었다.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그리고 아주 정성스럽게.

'술을 드셨나 보다.' 생각하고 있을 때 앞에 서있던 남자의 통화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전철인데~ 술 취한 아저씨가 에스컬레이터 거꾸로 가고 있어. 완전 웃겨!"

가파르고 긴 에스컬레이터.

첨엔 기이하다 금세 걱정이 되어 올라가면 역무원에게 알려야겠다 생각하며 계속 그분을 바라보았다. 반대편 에스컬레이터에도 사람들이 나타나 내려가기 시작했고 여학생 둘이 아저씨에게 반대편으로 가라고 손짓하는 게 보였다. 그 순간 그분의 표정을 보고 그분이 술에 취해 거꾸로 오른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고 즐거운 듯 그 일을 계속했다. 

내가 다 올라올 때까지 제일 바닥에서 여전히 같은 속도로 한걸음 한걸음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그분은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며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무슨 생각을 하길래 저렇게 즐거운 듯 초월한듯한 표정을 짓는 걸까?


살아가다 보면 정성을 다해 한걸음 한걸음 내딛여도 늘 제자리라고 느낄 때가 있지 않나.

나아가지 못하면 어떤가.

모든 발걸음에 의미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나도 그분처럼 해보고 싶다.

남들이 보기엔 의미 없는 발걸음이라도 오늘만큼은 나도 거기서 한없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싶다.

반복된 동작으로 무아지경에 빠져 잠시라도 내 머릿속에 꽉 차있는 생각들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며 역사를 빠져나왔다. 

추워진 밤공기가 발걸음을 재촉한다.

이제는 그분의 모습까지 내 머릿속에 꽉 차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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