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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아 Oct 21. 2022

나는 아름답습니까?

매일매일 늙고 있는 나에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자 가장 어려운 일이다.




손을 뻗어 이마를 만져 보았다. 굵은 선이 느껴지고 울퉁불퉁하다.

‘설마...’ 하며 거울을 보는데 이마에는 굵은 주름 세 개가 가로로 깊이 새겨져 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생각하는 순간 잠이 깼다.

꿈이었나? 몸을 일으켜 거울부터 봤다.

다행히 깊은 주름은 없다.

꿈이다.


이런 꿈을 꾸게 된 건 얼마 전 조카 결혼식에서 만난 사촌 오빠 때문이다.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사촌 오빠는 대뜸 그랬다.

“누가 언니야?”

난 눈치가 빠른 편이다. 이 말이 빈정대는 말이라는 걸 알 만큼 말이다.

결혼식장에서 만난 언니와 오빠가 내 표정을 봤는지 얼른 편을 들기 시작했다.

오빠가 먼저 말했다.

“현아가 어때서?”

그리고 몇 마디 말들이 오간 후에 둘째 고모네 사촌들은 자리를 떴다. 테이블에 우리들만 남게 됐을 때 언니가 말했다.

“나는 요즘 네가 내년에 오십이라고 생각하면 징그럽더라. 벌써 네가 오십이라니! 우리 막내가!”

“그래, 내 나이도 벌써 그래.”

그렇다. 나는 나이를 먹고 있고 예쁘다는 말은 가끔 듣는다.

삼십 대일 때 나는 기준을 만들었다.

나는 모든 일에 기준이 필요한 사람이다.


나는 어릴 때 ‘못났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그 시절 인심이 그랬겠지만 버스를 타면 꼭 누군가의 무릎에 앉았고 귀여움도 많이 받았다. 학교에 들어가서도 늘 어느 정도의 평가가 따랐던 것 같다. 전학을 가면 보내는 선생님이 아쉬워하며 울었고 전학 간 학교 교장실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초등학교 운동회 때는 선생님이 시켜서 가장행렬 앞에서 피켓을 들었고 고등학교 때는 친구들한테 떠밀려 반대표로 교복 모델도 했다. 대학교에 가서도 학교에서 주최한 큰 행사에 교수님의 지시로 안내를 맡았다. 직장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신입 훈련을 마치고 간담회를 할 때 상관의 지시로 상무님 옆에 앉았고 아이를 낳고 복직 교육 후에 마련된 자리에서도 윗분의 지시로 어딘가에 앉았다. 누가 그랬던 것 같다. 현아 씨는 예쁘니까. 그 당시엔 그런 말들이 내가 기분 나빠해야 할 부분인지 몰랐다. 어쨌든 부정할 수 없는 건 이 지구상에 살면서 예쁘다는 건 유리하다는 거다. 동물이든 사람이든. 어디에 살든 말이다. 세상은 미운 놈에게 떡을 주지 않는다. 아름다움이 미덕이고 젊음을 유지하는 건 능력으로 평가받는 세상이다. 나는 그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나를 예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다.


나는 사실 외모에 있어서 한없이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다. 아마 사춘기부터일지도 모른다. 혹은 엄마의 영향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를 누구보다 냉정하게 볼 줄 안다.

아주 가끔은 그나마 봐 줄만 하고 많은 날들은 못나 보인다. 그런 내가 타인으로부터 예쁘다는 말을 듣는다고 나 자신을 예쁘게 볼 수 있을까? 그런 말들로 생각이 바뀌고 자존감이 올라갈 수 있을까?


나는 살면서 끊임없이 타인으로부터 평가를 받았다.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말이다.

자존감이 낮은 나는 예쁘다는 말을 들은 날은 그 저의를 의심했다.

'나는 예쁘지 않은데 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저 말은 거짓일까? 진실일까?

보는 사람마다 기준은 다르니까...'

반대로 아무 말도 듣지 못한 날은 나를 자책했다.

'오늘 뭔가 문제가 있나?'

또 어떤 날들은 자기들끼리 내 외모를 잘났다 아니다 의견을 나누는 것이다. 그런 말들을 들으며 끊임없이 나는 나 자신을 다시 평가했다. 그렇게 내가 내린 평가들로 내 마음에 충돌이 일어났을 때, 어느 순간부터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불편하고 불안한 일이 되었다. 만나서 듣게 되는 내 외모에 대한 평가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첫 아이를 낳고 삼십 대 중반으로 들어섰을 때 아이 모임에서 친하게 지내던 언니로부터 뜬금없는 말을 들었다.

“우리 남편이 그러는데 현아 씨보다 수빈이 엄마가 더 예쁘대.”

황당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해서 댓구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며 처음으로 나에게 주어졌던 평가들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사람들은 왜 나를 평가하지? 나는 내가 예쁘다고 말한 적도 없고 평가해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그날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고등학교 때 ‘진희’라는 친구가 있었다. 예비소집일 날 운동장에 각 반별로 모였을 때 처음 진희를 보고 나는 내 눈을 의심했었다. 잘 못 보았겠지. 하며 다가간 얼굴은 마치... 너무 놀랐고 살짝 무섭기도 했다. 얼굴이 화상으로 눈과 코, 입만 보였을 때 그건 아름다움, 추함, 이런 것 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당황함을 감추고 줄을 맞춰 섰을 때, 그때 아마 진희가 먼저 말을 걸어왔었나. 그렇게 진희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2년 동안 우린 같은 반이었다. 진희와 친해지고 난 후에 내가 물었던 것 같다. 어쩌다 그렇게 된 거냐고.


내막은 이랬다. 장사를 하던 진희 부모님이 세 살 된 진희를 혼자 두고 나갔는데 집에 불이 났고 진희는 전신 화상을 입었다고 했다. 얼굴도 함께. 

그렇게 진희는 얼굴을 잃었다. 팔과 다리도 자라난 부분 빼고는 열일곱 그 나이에도 불이 났던 그날을 온몸이 말해 주고 있었다.


방과 후 야간 자율학습과 봉고가 한창 유행이던 그 시절, 우리 학교는 자율학습이 없었다. 이른 하교로 할 일이 없었던 우리는 천천히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곤 했는데 진희는 만화를 좋아해서 늘 뭘 할 거냐고 물어보면 만화방에 간다고 했다. 공부에 흥미는 없었지만 나름 모범생이었던 나는 매번 진희에게 집으로 가라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진희와 만화방 얘기로 육교에서 옥신각신 했다. 진희와 둘이 다니면 늘 사람들이 대놓고 쳐다보곤 했는데 내가 처음 진희를 봤을 때를 생각하면 그 무례한 시선들이 이해가 가기도 했다. 그런데 그날 이상했던 건 사람들의 시선이 아니라 진희의 태도였다. 진희가 사람들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는 걸 그날 안 거다. 그것이 의아했는데 내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너무 어릴 때부터 받은 시선이라 정작 본인은 그게 당연해서 이상하다는 걸 못 느끼는 게 아닐까라는 거였다.


내가 느끼는 내 외모에 대한 만족과 불만족 그리고 두려움. 그것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것은 내 외모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내 마음에 기인하는 거다.


사람들은 살면서 거침없이 다른 사람의 외모를 평가한다. 그게 좋은 의도든 나쁜 의도든 말이다. 특히 TV에 나오는 연예인들을 스스럼없이 평가하곤 한다. 연예인들에 대한 평가는 정말 냉정하고 사람들은 죄의식이 없다. 그 부분에선 나도 마찬가지다. 인공적인 시술로 본연의 얼굴이 사라진 사람을 볼 때면 저렇게 까지 해야 했나 하다가도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난 사람을 보면 삶이 힘들었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 말이다.


연예인이 아니거나 특별한 외모를 지니지 않더라도 살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거나 평가에서 자유롭기란 쉽지 않다. 특히 아름다움과 젊음을 강요당하는 한국에선 더 그렇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노력한다. 보톡스 시술은 기본적인 것이 되어 버렸고 남자들도 눈썹 문신을 받는 세상이니 말이다. 가만히 있으면 뒤처지는 세상이다.


내가 가장 우려했던 건 이러한 타인의 시선 때문에 어느 순간 내가 아닌 내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그래서 삼십 대 때, 내가 의문을 갖기 시작했을 때 나는 나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표면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더라도 생각이나 마음으로 사람은 아름다울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말이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의 평가에 휘둘리지 말자고. 다른 사람들의 평가로 나를 치켜세우거나 미워하지 말자고 말이다.


꿈을 꾸고 난 뒤에 다시 생각한다.

내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 중엔 못난 사람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내면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의 됨됨이를 알기 때문에 그들의 얼굴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현대의 발전된 의학기술은 끝없는 사람들의 욕심에 사용되고 있다. 백세를 사는 세상이니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고 내가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걸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바란다. 그 기술들이 내 친구 진희 같은 사람에게 본연의 삶을 찾아 주는 데 사용되기를 말이다. 지금은 연락이 끊긴 내 친구 진희. 고3 여름 진희는 희망을 품고 피부 이식을 받고 있었다. 그때 내가 보았던 아름다운 친구의 얼굴...


나는 지금 거울을 보며 바란다.

진희가 더 편안해져 있기를,

그리고 내가 그 누구도 아닌 ‘나’로 늙기를,

매일같이 유혹해 오는 말들 속에서 굳건히 나의 노화를 받아들이고 사람들이 하는 평가에서 벗어나 그 편안함이 내 얼굴에 묻어나기를,

그리하여 사진 앞에서 내 얼굴이 당당해 지기를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기를 바라고 또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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