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아 Nov 14. 2022

그 짧은 시간 신호등


치과 정기검진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출퇴근 시간을 제외하면 전철이든 버스든 항상 여유롭다. 그날도 버스 뒷문 근처 빈 좌석에 앉았다. 앉고 보니 앞자리에 앉아 계신 나이 든 아주머니의 뒤통수와 마주하게 되었다. 정수리 부분이 숱이 많이 빠져 머리 밑이 훤히 들여다 보였다. 이 분은 누군가가 자기 뒤통수를 들여다보는 걸 알까? 뒤통수를 보이는 일. 그건 너무 슬픈 일이다. 시선을 돌려 창밖을 보기 시작했다. 버스가 가다 신호등에 걸렸다. 신호등.


몇 년 전이다. 그 당시 함께 살던 엄마가 외출 후 돌아오셔서 신호등에서 창피했다는 말씀을 하셨다. 무슨 일인가 하고 들어 보니 깜박거리는 신호등 불빛을 보고 빨간색으로 바뀌기 전에 건너려고 달리시다 그만 넘어져 버렸다는 다. 차들이 빵빵거리고 창피해서 아픈 줄도 모르고 벌떡 일어나 오셨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듣고 깜짝 놀라 엄마에게 화를 냈다. 급한 일도 없는데 얼마나 위험한 행동이냐고. 다음부터는 기다렸다 신호가 바뀌면 천천히 건너시라고.


그 뒤로 신호등을 건너는 어르신들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 다들 뭐가 그리 급한지 깜박거리는 초록불에 도전하신다. 어떤 분은 신호가 바뀌어도 걸음의 속도에 차이가 없다. 느긋하게 제 갈 길을  뿐이다. 보는 이만 마음이 초조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 모습들에서 늙음의 서러움을 느꼈다. 마음이나 생각은 충분히 시간 안에 저 길을 건널 수 있다고 믿지만 나이가 들면 운동신경이 예전 같지 않다. 무릎 관절도 다 문제가 생기고 말이다. 거기다 리어카에 한가득 폐지를 싣고 힘겹게 건너는 노인을 볼 때면 마음이 그렇게 서글플 수 없다.


얼마 전 오랜만에 지방에서 놀러 오신 엄마와 전망 좋은 식당에 예약을 하고 전철을 타고 갔다. 나는 운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집에다 차를 두고 웬만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20년을 넘게 살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서울의 지리 때문이기도 하고 주차의 두려움 때문에 대중교통을 선호하는 지라 택한 방법이었는데 집에 돌아온 엄마가 무릎에 파스를 붙이걸 보고 엄마에게 죄송한 생각이 들어 물었다.


 “엄마, 이제 신호등 건너는 거 힘들어? 걷는 것도 힘들어?”

 “응, 도로가 넓은 신호등은 힘들고 겁나지. 이젠 옛날 같지 않아서 높은 계단도 무섭다. 그래도 다른 노인네들 보단 난 잘 걷는 거야. 하하.”


지난 5월 제주여행 때 엄마는 오름에 한번 오르고 싶다고 하셨었다. 검색해서 다랑쉬오름을 골라 올랐는데 오르는 초입에 나타난 가파른 계단을 보고 엄마는 살짝 얼굴이 굳어지셨다. 엄마에게 갈 수 있는지 힘드시면 안 가셔도 된다고 했는데 엄마는 본인이  말도 있고 까칠한 둘째 딸 때문인지 갈 수 있다고 큰소리치시고는 오르며 중간중간  힘들어하셨다. 다 올라서는 좋아하셨고 다시 내려왔을 땐 많이 뿌듯해하셨다.

그때 알았다. 이제는 높은 계단은 엄마한테 무리라는 것을. 엄마는 이제 정말 할머니가 되었다. 그래도 더 늦기 전에 도전해서 성공하기는 잘한 것 같다.


일찍부터 걷는 것도 계단도 힘들어하시는 시어머니에 비해 어디든 잘 걷던 엄마도 이제는 다리가 아프다고 하시는 걸 보면 세월을 이길 장사가 어디 있겠는가. 사람으로 태어나 보통 첫돌이 지나 걷기 시작해서 75여 년을 두 다리로 걸어 다녔으니 무리가 갈 만도 하다.


며칠 전에 아들이랑 신호등을 건너는데 쏜살같이 건너는 아들을 따라 뛰는데 뛰는 것이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다. 뛰는 것이 어색하다니! 나도 어느 순간 신호등 건너는 것이 힘든 날이 온단 말인가. 늘 해왔던 일상들이 어려워지는 순간이 온다니.

아, 늙음의 서러움이여!


 ‘엄마, 이제는 어디든 꼭 차로 모실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