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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아 Oct 27. 2022

울지 않는 코끼리

1994년 그해 나는

방금 뉴스에서 한 가지 사건을 보았다.

미국에 있는 어느 서커스단의 코끼리 한 마리가 자기를 훈련시키던 조련사를 보더니 갑자기 그에게 달려들어 그를 죽이고 거리로 나와 난동을 부리다 달려온 경찰들에 의해 100여 발의 총을 맞고 죽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흐릿한 화면 속에서 거대한 코끼리는 총을 맞고 힘없이 쓰러졌다. 우연히 찍힌 듯한 그 영상은 코끼리의 눈과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을 번갈아 보여 주었다. 눈은... 눈물이 가득 고인 그 눈은 매우 지친 듯 보였고 너무 슬퍼 보였다. 조금 전 난폭하게 사람을 짓밟던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말이다.

왜... 왜 그랬을까?

사나운 맹수들도 자기의 본성을 잊어가며 길들여지는데 그 코끼리는 그제야 자기를 찾고 싶었던 걸까?

코끼리는 어쩜 행복해할지도 모른다.

이제는 좁은 우리 안에 있지 않아도 될 테고, 단추가 달린 반짝이는 옷을 입을 필요도 없으니까. 그리고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 더 이상은 앞발을 들 필요도 없을 테니.

                                                                                                              1994. 8. 2


시계를 보니 8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가방을 집으려는데 책상 한쪽에 <한국실무전산학원>이라고 쓰여진 흰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무심결에 그걸 일기장에 끼워놓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생각보다 밖은 추웠다. 가볍게 바람이 스쳤을 뿐인데 뺨에 소름이 돋는다. 이젠 제법 쌀쌀해진 모양이다. 하지만 언제 또 바뀔지 모르지. 요즘은 모든 것이 너무 빨리 변하니까. 날씨가 더욱 그렇다. 가을이다 싶으면 금세 겨울이고.


정류소엔 사람이 많았다. 이 시간대는 원래 그렇다. 직장인, 학생 그리고 아주머니들.

중년이 된 나이에 이제 자기 인생을 찾아보겠다고 이 추운 날씨에 수영을 하려는 아줌마들까지 끼어 더욱 복잡했다. 난 그들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나 '스타노래연습장' 간판 아래에 섰다. 거기가 버스를 기다리기엔 가장 좋은 장소니까.


버스가 한 대 왔다.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까만 머리들이 좁은 문틈에서 아등바등한다. 꼭 그 버스를 놓치면 무슨 큰 일이라도 날 것처럼 말이다. 어쨌든 버스는 그 사람들을 다 태우고 무사히 출발했다. '좀 늦으면 어때?' 집에서 나올 때완 달이 마음이 느긋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바삐 오고 갔다. 주위를 둘러보니 노래연습장으로 들어가는 입구 한쪽 벽에 어울리지 않게 때 지난 연극 포스터가 붙어 있고 그 옆으로 최신곡이라고 적힌 종이가 붙어있다. 그 옆에 또 최신곡 그리고 또 최신곡. 눈으로 훑어보니 모두 유행 지난 노래뿐이다. 그중에서 한곡을 골라 속으로 흥얼거린다.

한 대, 두 대, 세 대...

이젠 타도 될 것이다. 밀치며 탈 필요도, 밀리며 탈 필요도 없다. 운 좋으면 앉을자리도 있을 것이고 지금쯤이면 교통체증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 차속에서 답답해할 필요도 없겠지.


뒤쪽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버스는 곧 출발했고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차들이 지나가고 집들이 지나가고 내 머릿속엔 생각들이 생각들이... 눈앞이 멍해졌다. 그러다 문득 일기장에 끼워두고 온 학원 안내장이 생각났다.

한국 실무 전산학원. 참 우습다. 거의 1년 전에 고작 2달 정도 다녔을 뿐인데 나에게 아직도 미련이 남았는지 매달 꼬박꼬박 안내장을 보내온다. 거기엔 개강일이며 교재, 자격증 시험에 관한 얘기들이 자세히 적혀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나를 아직도 기억해 주다니! 그런데 매번 쓰레기통에 구겨 넣던 그 안내장을 왜 일기장에 끼웠지? 그것도 하필이면 일기장에다 말이다. 나에게 새로운 의욕이라도 생긴 걸까?


그땐, 그 학원을 다닐 땐 그랬다. 뭔가 하고 싶어서.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무작정 학원 새벽반에 등록해서 두 달 동안 열심히 다녔다. 무의미하게 보낸 대학 일 년을 반성하며 나에게 그런 의욕과 열정이 있다는 걸 기뻐하며 그렇게 말이다. 그런데 또다시 일 년이 지난 지금은 처음과 같은 상태다. 강의 시간에 멍청이 앉아 있다가 때가 되면 밥 먹고, 건수를 기다리다 술 마시고, 노래방 가고, 친구들과 쉴 새 없이 떠들다가도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왠지 모를 허탈감에 시달리고. 옛 친구들에겐 바빠서 못 만난다고 하면서 주체 못 할 시간 앞에서 외롭다고 외로워서 못살겠다고 하고. 모든 것이 엉망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나에게도 분명 목표가 있을 텐데.


고등학교 다닐 땐 한 가지는 분명했었다.

대학에 가는 것.

모두들 대학에 가야 한다고 했고 나 또한 그게 다인 줄 알았으니까. 막상 3학년이 되고 원서를 쓰게 됐을 땐 적성을 맞춰 대학을 간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고 더구나 내 적성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저 어디든 들어가기만 하면 그 뒤엔 자연적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것만 같았다.

대학에 입학하고 한동안은 새로운 생활에 흠뻑 젖어 정신없이 보냈다. 새내기 시절이 끝날 무렵 친구들이 하나둘씩 뭔가를 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나도 그 분위기에 휩쓸려 학원을 다녔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했다. 난 목적도 없었고 진정한 자유를 누릴 줄 도 몰랐다.


그런 생각들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눈이 부셔왔다. 바다다...

빽빽이 들어선 건물 틈 사이로 바다가

그 넓은 바다가

아침 햇살을 받아 눈부시도록 반짝이는 바다가 

넘쳐흐를 것만 같았다.

순간 버스에서 내리고 싶다는 강한 충동이 일었다. 수업도 잊어버리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눈이 부셔서 더 이상 바다를 쳐다볼 수 없을 때까지 모래사장 위에 앉아 있었으면...


그 사이에 버스는 벌써 몇 구역을 지나 있었다. 왠지 모를 허탈감이 밀려왔다.

나는 눈을 감아 버렸다.

"이번 정차할 곳은 ooo대학입니다. 다음은..."

눈을 떠보니  낯익은 담장이 눈에 들어온다.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벨을 눌렀다.

버스가 서고 문이 열리는 순간

여름,

숨 막히게 무더웠던 그 여름,

그 여름에 보았던 코끼리가 생각났다.


지금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는 그 코끼리가 되고 싶은가 보다.


1994년에 대학 문예전에 냈던 글이다.
그로부터 28년이 흐른 후 글을 쓰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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