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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아 Nov 08. 2022

인생의 물결

#반여동

나는 누군가의 성공을 간절히 바란 적이 없다.

단 한 사람을 빼고는 말이다.

그건 오빠다. 나의 오빠.


오빠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건  삼각우유다. 어릴 때 우리 집엔 늘 삼각우유 하나와 요구르트 두 개가 배달되었다. 우유는 오빠 거였고 요구르트는 언니와 내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키가 작은 오빠 때문에 엄마는 늘 걱정이 많아 오빠는 우유를 달고 살았다. 다행히 오빠는 우유를 좋아했다. 어린 시절 우유에 밥을 말아먹곤 했는데 그 맛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난 커서도 우유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세상 일이란 원래 뜻대로 잘 안된다. 우유와 계란을 달고 살던 오빠는 키가 그리 크지 않았다. 요구르트만 열심히 먹던 언니와 나는 쑥쑥 컸다. 그래서 지금도 언니와 나는 어디를 가도 키로 주눅 들일은 없다.


어린 시절 오빠와 나


엄마 말에 따르면 오빠는 내가 애기일 때, 나를 등에 업고 밖에 나가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곤 했다 한다. 내가 진짜로 예뻐 보여서였는지 여섯 살 터울이 난 동생이 신기해서였는지 오빠에게 물어본 적은 없다. 아무튼 그 기억이 무의식 속에 있어서 인지 오빠와 나는 사이가 좋았다.

오빠와 나는 군것질을 좋아했다. 내가 태어난 동네에는 그 시절 ‘점방’이라고 불리던 구멍가게가 있었다. 거기가 할머니 동생이 운영하던 가게였어도 별다른 혜택은 없었지만 난 정말 거기를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동전만 생기면 바로 달려가곤 했으니까.

오빠와의 연대는 그 동네를 벗어나 좀 더 아랫동네로 왔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오빠는 돈을 주고 원하는 걸 사 오라고 시키곤 했는데 무조건 싫다고 하는 언니와 달리 나는 그 시간을 기다렸고 오빠가 시키면 두말없이 달려가곤 했다.

난 늘 뭐든 하는 걸 좋아했던 것 같다. 언니가 오빠가 놀자할 때마다 싫다 한 반면 나는 오빠가 하자 그러면 뭐든 하고 싶었다. 그래서 오목, 장기도 배워서 같이 했다. 그리고 우린 영화를 좋아해서 ‘토요명화’, ‘주말의 명화’, ‘일요명화’를 빠지지 않고 보았다. 언니는 늘 그 시간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잠이 들었기 때문에 오빠와 나만 보았다. 그러다 86년도 아시안게임 덕분에 생긴 비디오 플레이어로 우린 열심히 비디오를 보는 사이가 되었다. 그 당시엔 비디오 대여점이 유행이어서 동네마다 있었다. 오빠 덕분에 온갖 우주 괴물이 나오는 영화는 다 보았던 것 같다.


사춘기 시절 오빠와 나


오빠와의 기억이 모두 좋은 것만은 아니다.

오빠는 늘 걱정을 안겨 주었다.

내 걱정이라기보다는 엄마의 걱정이 투영된 것이겠지. 어린 시절엔 유달리 왜소한 체격 때문에, 커서는 도통 말을 듣지 않아서였다. 오빠는 살짝 엇나가기 시작했는데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집에는 소통할 사람이 없었던 게 아닐까. 오빠의 생각을 들어주고 나눠줄 사람이 집에는 없었다. 아버지가 해외에 계셔서였을까 싶지만 아버지가 집에 계셨어도 오빠의 생각을 나누지는 못했을 것 같다.

집에서 항상 문제를 일으키던 오빠는 아버지가 해외에서 사다준 물건들을 내다 팔기 시작했다. 어느 날 집에 오면 아이와 플레이어가 소니가 그리고 엄마가 약속했던 피아노 대신 있던 전자 피아노가 사라지고 없었다. 문제집을 산다고 엄마에게서 받아간 돈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오빠는 멀쩡한 집을 놔두고 하숙집을 하던 친구 집에서 기거하곤 했다. 집에서 엄마가 지극정성으로 차려주는 밥보다 하숙집에서 세숫대야에 비벼 먹는 밥이 맛있다고 했다. 그렇게 엄마의 걱정과 한숨이 늘었고 언니와 나는 초조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오빠가 떠나고 평화로운 시절의 나


그렇게 속을 썩이던 오빠는 재수를 삼수를 했다. 그동안에도 오빠는 87년 민주화 운동에 나섰다. 엄마가 그랬던 것 같다. 대학생도 아니면서 왜 거기에 나가냐고. 오빠는 무엇에 그렇게 화가 나 있었던 걸까?

그렇게 있다 오빠는 어느 날 갑자기 잠적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외지로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경험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렇게 걱정 한 보따리를 안겨주고 떠났던 오빠는 돌아와 갑자기 군대에 가겠다고 했다. 우리 모두 걱정했다. 왜소한 체격에 대학도 가지 못한 오빠가 군대에 가서 잘 견딜 수 있을까 하고. 그런데 걱정과는 달리 오빠는 최전방에 가서도 꿋꿋하게 잘 지냈다. 오빠에게 그런 모습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리고 그 시절 우리 집엔 평화가 찾아왔다.

엄마, 언니, 나. 우린 좋았다. 한편으론 이 평화가 깨지지 않길 바라며 오빠가 군대에서 나오지 않기를 바랐던 것 같기도 하다. 우리 모두 다 알듯이 시간은 붙잡을 수 없다. 한 가지 기대할 것은 군대에서 사람이 바뀌는 다. 그렇게 돌아온 오빠는 다시 도전해서 대학을 가겠다고 했다.


가장 행복했던 시절 오빠와 나


그렇게 여섯 살 터울이 지는 오빠와 나는 같이 입시 준비를 했다.

나는 학교에서, 오빠는 재수 학원에서.

오빠는 달라 보였다. 오빠는 재수 학원을 열심히 다녔다. 잘 되고 있다는 오빠의 말이 불안한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서로를 응원하며 함께했다. 마지막 학력고사였던 그해 난 오빠의 성적을 제대로 몰랐기 때문에 같은 대학을 가길 바랐다. 형제가 같은 국립대를 가면 한 사람은 학비가 면제인가 그랬기 때문이다. 그 당시 뜻하지 않게 집을 짓는 바람에 경제적인 부담이 컸던 부모님 걱정에 나는 대학 학비라도 보탬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같은 대학을 갈 줄 알았던 오빠는 모두를 속이고 우리가 살던 지역에서 제일 좋은 대학에 몰래 원서를 넣고 시험을 보았다. 모두가 불안해하던 합격 발표날 나는 나보다 오빠의 합격 소식을 더 바랐다. 부모님의 기뻐하는 얼굴을 보고 싶었던 거다. 그렇게 오빠와 나는 각자의 대학에 합격했다. 같은 학번으로. 그날 우리 집은 잔치를 벌였다. 친척들이 다 왔다. 그렇게 행복해하던 부모님 얼굴을 그때 이후로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 날 만큼은 정말 행복했다.


함께 대학시절을 보낸 오빠와 나


대학을 간 오빠는 멋졌다. 오빠의 책상에는 보기만 해도 멋진 책들이 많았다.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이 1권부터 3권까지, 막심고리끼의 ‘어머니’,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밀란 군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코스모스'... 다 기억할 순 없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어려운 책이었다. 오빠 덕분에 나는 팝송도 많이 들었다. 주로 영화 OST였는데 ‘남과 여’, ‘러브스토리’, ‘원스 어폰 어 타임 아메리카’, ‘미션’, ‘갓 파더’... 바바라 스트라이샌드가 불렀던 ‘메모리’도 생각난다. 그리고 그때 오빠는 ‘씨네 21’도 자주 사보곤 했다. 그 덕분에 나도 문화적인 혜택을 많이 받았다.


그냥저냥 내 수준에 맞춰 꿈도 희망도 없이 그냥 세상이 바라는 대로 사는 나와 달리 오빠는 자기 뜻이 강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대학 생활에 오빠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우연히 오빠 서랍 속에 고이 간직되어 있는 어디서 얻었는지 모를 서울 유명대학교 입학안내문을 보고서야 오빠가 원하던 삶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여러 해 뒷바라지 한 부모님에게 염치가 없었던 오빠는 더 이상 모험을 할 수가 없었기에 안정권을 택한 거였고 그래서 들어간 학교에는 흥미가 없었다. 오빠는 야학으로, 장애인 도움 활동으로 대학 생활을 보냈다. 학점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똑똑했던 오빠 눈에는 대학 교수들의 부조리도 눈에 보였고 그런 것들이 우습게 보여 적극적으로 학교 생활을 하고 싶게 하지 않았다. 그 시절 그 대학을 나오면 웬만한 좋은 곳은 다 취직할 수 있었던 오빠는 또다시 스스로 힘든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오빠는 갑자기 기술고시를 보겠다고 했다. 오빠는 1차를 합격했고 2년간의 유예기간이 있었다.

끝내 대학으로 모든 것을 입증했던 것처럼 오빠는 반드시 보여주리라. 그렇게 믿었다. 그리고 바랐다. 간절히 바랐다.


오빠와 새언니


그렇게 바라던 오빠의 성공은 없었다. 오빠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도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오빠는 너무나 멋진 새언니를 데려왔다. 우리 새언니는 정말 좋은 사람이다. 모든 면에서. 내 눈에는 그렇다. 아마 다른 사람 눈에도 그럴 거다. 새언니는 특수학교 교사였다. 우리의 운명인지 장애인 도움 활동을 하던 오빠와 특수학교 교사였던 새언니는 조카의 자폐를 빨리 눈치채고 속으로 불안해하던 언니를 병원으로 이끌었다. 사람일이란 정말 알 수 없다.


우리가 바랐던 건 하나였다. 우리가 오빠에게 기대를 고 실망을 하고 반복했던 것을 새언니는 겪지 않기를. 그래서 오빠가 성공하기를 더 간절히 바랐다. 우리의 이런 마음이 새언니는 더 싫었을 수도 있다. 우리의 이런 마음이 새언니를 힘들게 한 걸 수도 있다. 오빠와 새언니는 지금은 협력 관계다. 남들이 보기엔 이상한 관계다.


아버지와 오빠


늘 아버지에게 1순위였던 오빠가 아버지를,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지 못하고 걱정을 끼칠 때마다 오빠가 미웠다. 그러다 아버지 팔순 때 아버지가 갑자기 응급실에 가시게 된 순간에 오빠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해외로 떠났을 때 나는 그렇게 사이좋던 오빠와 인연을 끊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2년 뒤에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런데 참 신기하다. 새로 발견된 암으로 아버지가 수술을 받던 날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오빠가 소식도 없이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코로나 때문에 해외 입국자로 자가격리를 했던 오빠가 격리 해제되던 날 아버지는 갑자기 쓰러지셨다. 수술 후 퇴원한 바로 그날 몇 시간 후에 말이다. 그렇게 아버지로 인해 우리 삼 남매는 응급실에 다시 모였다. 오빠가 나타난 순간 깨달았다. 아버지의 뜻인가? 우리를 다시 엮어주고 가시고 싶었던 걸까? 그날 우리는 미뤄둔 얘기를 나눴고 다시 형제로 돌아갈 수 있었다.


지금의 오빠와 나


얼마 전에 병원을 갔다. 예약된 검진임에도 불구하고 한 시간 남짓 대기가 길어졌다. 진료실 문이 열렸다 닫혔다 한다. 그 사이로 의사와 간호사가 보인다. 내가 들어가야 할 곳은 제3 진료실. 내 눈앞에는 제2진료실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는 양복 입는 젊은  남자가 보였다. 여기는 유방외과다. 그렇기에 그가 더 이상해 보였다. 그도 기다리다 지쳤는지 제2 진료실 방문을 노크한다. 간호사와 얘기를 나눈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한참 뒤에 간호사가 이제 들어와도 좋다는 사인을 하자 그는 허리를 잔뜩 굽힌 채로 방문 앞에 섰다. 옷매무새를 다듬는다. 들어가기 전 문에다 인사를 한다. 문이 열리자 보는 사람도 없을 것 같은데 또 인사를 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의사를 보자 깍듯이 인사를 한다.

 ‘의사란 대단한 사람이구나. 그래 여기는 대형병원이니까 더 그렇겠지.’

나는 어릴 때부터 오빠가 의사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유는 모르겠다. 왠지 오빠는 의사가 어울릴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의사를 보면 오빠가 의사가 되지 않은 게 그렇게 아쉽다. 오빠가 지금 이렇게 사는 것도 자기 몸에 맞는 의사라는 가운을 걸치지 못해서 그런 것만 같다.

성공한 삶이란 어떤 걸까?

의사들은 자기들의 삶을 만족할까?


비록 의사는 못 되었지만 오빠는 늘 당당하다. 이제는 오빠의 당당함이 좋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성공도 좋지만 자신에게 당당한 삶이 좋다. 나도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런 삶을 살고 싶다. 이런저런 일을 겪었지만 오빠와 나는 여전히 한 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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