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니의글적글적 May 30. 2024

언니가 라면 상을 엎었다

그 맛 알지? 맛있는 음식이야기: 라면

  



  어느 늦은 오후, 식탁이 왁자지껄했다. 학원에서 돌아온 두 아들이 나란히 앉아 라면을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냄비를 가운데 두고 서로 더 많이 먹겠다고 아웅다웅하는 광경이 조금 우스웠다. 젓가락을 쥔 작은 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국물을 후루룩 소리 내어 마시는 모습이 귀엽기도 했다. 형제가 함께 앉아 맛있게 라면 먹는 장면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문득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나와 여섯 살 터울인 큰언니는 읍내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녔다. 시골집에서 읍내 가는 버스가 자주 없었기 때문에 언니는 학교 근처에서 자취하다 주말이 되면 다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런데 언니는 집에 올 때마다 화가 나 있었다. 툭하면 짜증을 낸다거나 마치 사관 선생님 같은 어투로 동생들에게 설거지나 청소 따위를 하라고 명령하듯 했다. 그 당시 나는 초등학생이었고, 나보다 두 살 위의 작은 언니와 함께 묘한 카리스마에 압도되어 큰언니가 시키는 대로 했던 것 같다.


  그날도, 큰언니는 나에게 라면을 끓여 오라고 했었다. 우리는 큰언니에게 동전 몇 개를 받고는 곧바로 집을 나섰다. 작은언니와 나는 라면을 사기 위해 동네에 있는 작은 가게로 향했다. 그곳은 시골 마을의 유일한 슈퍼였는데 집에서 이십 분 남짓한 거리에 있었다. 뛰듯 걸어서 도착한 가게 안은 낮인데도 어둑했고 라면이나 과자, 몇 개의 작은 생활용품만이 진열되어 있었다. 주인 할머니는 우리가 라면을 사러 갈 때마다 반기는 기색 없이 무표정이셨던 것 같다. 우리는 그런 할머니의 눈치를 보며 안성탕면 2개와 달걀을 샀다.      


  라면 장을 본 뒤 서둘러 집에 돌아와서는, 먼저 가스레인지에 냄비를 올리고 물을 부었다. 잠시 후, 물이 보글보글 끓어오르면 나는 미리 잘라놓은 면을 살며시 냄비에 넣었다. 면이 물에 푹 잠기면 작은언니는 수프 봉지를 뜯어 주황색 가루를 냄비에 쏟아부었다. 가루가 물에 퍼지면 라면 특유의 매콤한 향이 부엌을 가득 채웠다.  나는 면과 수프가 잘 섞이도록 젓가락으로 면발 사이를 살살 벌려가며 저었다. 가루가 고루 섞이면서 국물이 한 번 더 세게 끓어오르고, 희던 면발이 윤기 나는 누런색이 되면 작은언니는 함께 사 왔던 달걀을 조심스럽게 깨서 냄비에 넣었다. 껍질이 달걀물에 딸려가지 않도록 신중했다. 흰자가 하얗게 익어가면 언니와 나는 서로의 눈을 마주치며 ‘다 됐다.’ 신호를 보냈다. 작은언니는 젓가락으로 라면을 조심스레 들어 올려 국그릇에 옮겨 담았다. 나는 국물을 국자로 퍼담았다. 주홍빛 국물 위에 떠 있는 달걀까지, 우리가 끓인 라면은 마치 예술작품처럼 완벽해 보였다.    

  

  마루에서는 이미 큰언니가 밥상을 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긴장된 마음으로 큰언니 앞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라면 그릇을 내려놓았다. 큰언니는 언제나처럼 면을 몇 가닥 먼저 집어 올렸다. 나는 언니의 표정을 조심스레 살폈다. 그때, 면을 몇 입 먹던 언니는 얼굴을 찌푸리며 난데없이 면이 불었다고 트집을 잡았다. 큰언니 얼굴이 점점 험악해지는 것을 보고 나는 겁을 먹었고, 작은 언니는 울먹였다. 그러자 큰언니는 버럭 화를 내더니 갑자기 상을 엎어버렸다. 라면 국물이 바닥에 쏟아지고, 꼬불꼬불한 면발이 달걀과 함께 마룻바닥 여기저기 흩어졌다. 눈앞에서 일어난 광경은 충격이었다. 나는 그저 넋을 놓고 바닥에 널브러진 라면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라면이 아까웠고 그게 내게로 날아오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나는 그때부터 큰언니의 마음도 저렇게 처참해진 라면처럼 꼬불꼬불하게 꼬였으리라 확신했다.   

  




   그랬던 것이 벌써 삼십 년의 세월이 흘러, 우리 자매는 이제 사오십 대의 중년층이 되었다. 그동안 각자의 삶을 살며, 저마다 성격도 변했다. 나는 결혼 후 육아를 시작했다. 출산 전에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깊이 이해하지 못했던 내가, 이제는 자식을 키우면서 아이의 표정만 봐도 그 속에 담긴 피로와 짜증을 금방 알아챌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미혼인 큰언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다양한 사회활동을 해오면서 많이 유연해졌다. 까다롭고 모든 일에 단호했던 언니가, 요즘은 후배들의 작은 실수에도 너그럽게 웃으며 조언해준다고 한다.      


  세월은 우리를 변화시켰고,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아이의 작은 신호에 민감해진 나와, 사회의 복잡함 속에서 여유를 찾은 큰언니.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살아왔지만, 결국엔 긴 세월 동안의 경험들로 이해와 배려의 중요성을 알게 된 것이다.


  어느 날 저녁, 가족 모임에서 다 같이 식사하던 중 우리는 다시 그 라면 사건을 떠올린 적이 있다. “언니, 그때 정말 왜 그랬어?” 내가 웃으며 묻자, 큰언니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땐 나도 많이 예민했었지. 너희가 라면을 정말 못 끓이기도 했고.” 우리는 큰언니의 그 한마디에 모두 웃음이 터졌다. 어릴 적 불편했던 그 순간이, 이제는 우리 가족이 함께 웃는 특별한 추억이 되어있었다.




  아이들의 입가에는 라면 국물이 살짝 묻어 있었다. 내내 먹는 모습만 지켜보다 더는 못 참겠다 싶어 나도 젓가락을 들고 나섰다. 면이 입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오늘따라 언니가 생각났다. 우리 자매도 ‘이렇게 맛있는 라면을 나눴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음번에 큰언니가 우리 집에 오면, 함께 라면을 끓이자고 해야겠다. 나는 아직도 따뜻한 국물을 냄비째 들고 호로록 마셨다.



사진© evanthewise, 출처 Unsplash

작가의 이전글 내 생일엔 스테이크를 부탁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