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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경 Oct 17. 2022

소설 <날개>로 본 일상의 무기력

비상하라, 이상<날개>의 화자처럼.

이상<날개>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책을 읽지 않은 사람도 많이 알고 있는 <날개>의 첫 문장. 혹자는 소설에서 `첫 문 장`이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더 인상 깊게 느껴지는 이 문장은, 여러 문 학작품들과 함께 인상 깊은 소설 첫 문장으로 거론되곤 한다. 한 ‘천재’의 담담한 말 투. 이상은, 아니 날개에서의 화자 ‘나’는 이 한마디로 소설의 물꼬를 튼다.

  우선  이상이  쓴  이  작품은  수필이냐  소설이냐.  이  질문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이 작품이 소설 같으면서도 수필 같기도 한, 기존의 문학사와는 다른 새로운 형 식이라고도 느껴졌다. 물론 이게 사실이 아닌 허구적인 '창작' 작품이라는 점에서 소 설이라고 봐야 응당하겠지만, 어떻게 보면 작중 아내에 대한 전기 같은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아주 조용히 숨죽이고 쓰는, 아내에 대한 기록.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여진 이 소설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선 작가  이상의 전기적  일생을 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상은 큰아버지 밑에서 자랐는데, 기술자인 그분 밑에서 기술자 교육 을 받고 1929년 20살때에 기술자가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33년 폐병을 얻어 일을 그만두게 되고, 그 후 요양차 온천에 내려갔다가 금홍이라는 기생을 만난다. 그 기생을 데리고 다시 서울로 가서 금홍을 마담으로 한 다방을 차렸는데, 사업이 연이 어 실패하고 그 과정에서 금홍도 떠나갔다. 이 일 말고도 다사다난했던 인생사를 겪 은 이상 결국 병이 악화되어 1937년 4월,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사망했다. 이때 당 시 이상의 나이는 26살이었다.

  소설 날개는 1936년 9월에 발표된 작품이다. 사실 이 소설은 이상이 금홍과 동거했던 경험 이후에 쓴 소설이기도 하다. 화자인 '나'는 병이 들고 현실감각이 없는 청년 이다. 즉 작가인 이상 본인을 대입해서 생각하면 된다. 아내에게 빌붙어 살아가는 소설 속 화자인 '나'. 그런 그의 아내는 유곽에서 몸을 파는 여자다. 그래서 그가 사는 곳은 아내가 일하는 33번지 사창가다. 한번지에 18가구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그 곳. 그곳엔 낮에도 한점 빛이 들지 않는다고도 한다. 하기사 빛이 든다 해도, 사실상 낮에는 잠만 자는 곳인데 그게 무슨 소용이랴.

  ‘나’의  모든  행동과  생활반경은  오로지  아내에  의해  결정된다.  주인공은 돈조차  쓸 줄 모르는 인물이다. 인간으로서의 주체성은 거의 거세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저 아내가 손님  받는 중에  방에서 숨죽이고  있을 뿐이다.  거의 사육에  가까운 이런 환경에 대해,  왜인지  그는  불만이  있을리가  없다고  말한다.  그의 무기력은  이제  그의  생활 자체에서 온다. 한때 이불 속에서 이런저런 발명도 하고, 시도 많이 썼지만, 방을 채 우는 무기력한 그 분위기에 ‘비누처럼 풀어져’ 사라진 뒤다. 그런 ‘나’는 그런 자신의 단조롭고 반복적인 일상을 정밀 묘사하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가감없이, 비참하게, 담담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에게는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정말 흔적도 없는 것인가.

이제 책 전개 부분을 지나 절정 부분이라고 볼 수 있는, ‘나’가 아내의 매음 행위를 목격한 장면. '나'는 충격을 받고 거리로 나간 뒤, 정신을 차려보니 경성 미스코시 백 화점 옥상에 올라가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말한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 꾸나.’

첫 문장과  함께 소설  날개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다.  이 독백과 함께 소설은 끝난다. 아이러니하게도 자본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는 백화점 옥상에서, 자본적으로 부족하고 쪼들렸던  청년이 이런 생각을 한다. 사실 이 작품을 학창시절 때 이상 작가를 배우며 접한 적이 있는데, 그때 이 부분은 투신자살을 암시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나 학생들은 대부분 당연하게 결말을 비극적으로 받아드렸다. 제국을 만난 식민지 국민의 무기력함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조금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바로 그 백화점 옥상에서 거리를 본 후 이어지는 구절이 있다.

‘나서서 나는 또 문득 생각했다.’

라는 문장. 이 ‘나서서’ 가 ‘백화점을 나서서’ 라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면 이제 이상의 날개는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옥상에서 거리로 나와 사람들 사이를 걷다가, 다시 한번 날개를 달고 싶다는 욕구를 가지는 것. 사람이 옥상에서 날개를 달 면 떨어질 일밖에 없지만, 거리(땅)에서 날개를 단다는 것은 비상을 한다는 다짐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면 이제 이 책의 첫 문장에서 언급되었던 ‘박제된 천재’문장으로 돌아가보자.  이  첫  문장을  새롭게  해석한  장면과  연결시켜 본다면  조금은  희망적인 메시지로 읽힌다. 화자는 아예 죽은 상태가 아닌 그 박제된 상태에서 벗어나 다시 한 번 비상과 희망을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작품이  특정한  시대를  비판하는  것으로  끝나는  단발성  문학은 아니라 생각한다. 이 소설이 일제강점기 시대의 작품이더라도 말이다. 이 소설에서 이상은, 특유의 염세주의적 어투와 무기력함을 그대로 구사하고 있다. 아울러 예술과 현실의 경계, 사랑과 집착의 경계, 자유와 구속의 경계라는 문학의 보편적인 주제의식을 아직 정신이 녹슬지 않은 주체의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것들이 지금의 독자에 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무기력에 종속되어 살다가 비상하는 소설 속 화자처럼, 너무 늦기 전에 우리 역시 무기력이라는 유혹을 벗어 던져버리는 것이 어떨까. 혹시 그런 유혹에 빠져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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