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비명자들 3막 - 나무가 있다> - 연극(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주최/주관: 극단 고래
*작/연출: 이해성
어려운 연극이었다. 1편(2019년)과 2편(2017, 2018년, 1편보다 먼저다)을 보지 않은 이유도 있겠지만, 극이 끝나고 '관객과의 대화'에서 연출과 배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극을 쓰고 연출을 담당한 이해성 씨의 '고집'을 보았기 때문이다. 극을 이끌어가는 건 단연 비명자들의 '몸짓'. 무용이었다. 흙으로 돌아간 비명자들은 나무가 되어 자연의 순환 법칙을 따른다. 비명자들은 영원하다.
'비명자'는 고통 속에서 이성을 상실한 채, 비명만을 질러대는 사람들이다. 비명자의 비명은 4킬로미터 이내에 있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느끼게 한다. 비명자들의 손을 잡으면 역시 큰 고통에 휩싸인다. 2014년부터 극을 구상한 작가이자 연출가는 온통 비명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아픔 많고 좀비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자 했다고 한다. 2014년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해다.
극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비명자들이 나무가 되는 모습에 이르러서야 사회적 참사에 대한 아픈 기억이 되살아난다. '비명자', '파사', '파사현정연구소' 등 낯선 단어가 관객이 극에 스며드는 것을 방해한다. 20명이 넘는 배우의 등장, 대극장에 걸맞은 무대 장치, 무대 바로 밑에 위치한 여러 명의 라이브 밴드 따위로 인한 극단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조금 쉽게 만들었더라면 정말 좋았겠다,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극이 끝난 후 '관객과의 대화'에 연출과 주요 등장인물 네 명, 사회학자 한 분, 사회자가 무대에 올라 30여 분간의 시간을 갖는다. 극이 어려운 탓에 무얼 물어야 할지 관객들은 당황한 모습이다. 몇 명의 질문이 이어졌지만 그렇게 명쾌한 답이 존재하는 질문은 아니었다. 이제 내 차례, 배우들에게 질문하려 손을 들기 바로 전 사회자가 배우들에게 돌아가며 한 마디씩 하라고 마이크를 건넨다.
질문은 안 해도 한 것과는 별 차이 없었을 것 같다. 배우들 역시 극 해석과 더불어 자신의 역할 이해에 어려움이 있었음을 알게 하는 말들을 한다. 연출은 극을 준비하면서 배우들과 많은 소통을 나누었다는 말을 했지만, 배우들의 말에서는 완전한 소통의 결과에 합당한 증거는 찾기 어려웠다. 배우들도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음을 알 수 있었다. 연출의 '고집'이 극의 완성도를 이끌었으니 결과 역시 연출이 책임질 일이다.
오랜만에 초대를 받아 대극장에서 '큰공연'을 보았다. 소극장 편력이 4, 5년은 넘은 것 같다. 탁 트인 공간에서 시원하게 뚫린 보이드 공간을 바라보며 공간의 가치를 맛보았다. 배우들은 무엇을 위해 저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지 문뜩 궁금해지기도 했다. 우리는 실용적이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연기를 하며 살고 있고, 또 그런 이야기를 듣고 보면서 허구를 즐기고 있는가. 어쩌면 삶 자체가 허구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허구 세상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허구적인 목적을 이루려고 애쓴다. 마침내 목적을 이룬 사람들은 세상의 칭송을 받는다. 그것도 허구일 텐데.
프랜시스 베이컨은 '낯섦'이 없는 절묘한 미는 없다고 했다. 토요일의 '황금' 시간에 낯섦을 찾아 대학로를 다녀왔다. 나는 이제 무엇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까, 고민하는 시간이다. 배우들은 저렇게 허구의 가치를 위해 열심히 하는데, 나도 허구를 위해 무얼 하든지 열심히 해야 한다. 낯섦이 인간의 감성을 건드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반복되는 일상생활에서 낯섦을 찾기가 쉽지 않지만 그래도 찾아야 한다. 낯섦은 존재한다. 보려고, 느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