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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 Mar 12. 2024

농부가 된 사연

돈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내 평생의 꿈은 돈을 많이 주는 회사에 들어가 임원까지 하면서 열심히 일하는 거였다. 가끔 문화생활을 즐기고, 친구들을 만나 수다도 떨고, 국내외 곳곳으로 여행도 가면서. 이 심플하고 평범한 희망은 섣부른 김칫국이었다는 것을 이제 이 글을 읽는 모두가 알게 됐다. 


오로지 자본에만 의존하여 (갈릴 내 몸은 생각도 않고) 높은 연봉만 보고서 서울로 이직했다. 서울은 빠르고, 편하고, 쉬웠다. 돈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돈이 없는 게 문제였지만 정기적으로 월급이 들어왔기 때문에 부족한 게 있으면 다음 달의 내가 해결했다.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도 물론 돈으로 해결했다. 매일 같이 배달음식을 시켜 먹고, 사고 싶은 게 있으면 고민 없이 결제하고, 길을 지나가다가도 충동적으로 구매했다. 회사에서는 늘 참았기 때문에 회사 밖에서는 참지 않았다.


찝찝하고 텁텁한 부정적인 감정들이 차곡차곡 쌓여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럼에도 커리어우먼이 되고 싶었다. 인정받고 싶었고, 잘해보고 싶었고, 칭찬받고 싶었다. 그러려면 몸이 3개는 필요했으나 상식적으로 불가능해서 시간을 아껴 썼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고, 집에서도 일을 했다. 그래도 일은 끝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나 혼자 소화해 낼 수 없는 양이었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이 두려워 잠에 드는 게 무서웠다. 내일은 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또 어떤 피드백에 시달릴지 상상만 해도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나는 아주 느리게, 죽어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외출을 했다. 계속 시간을 못 내다가 미루고 미뤘던 약속에 가기 위해서였다. 모든 생명이 반짝거리는 눈부시게 화창한 봄날이었다. 나름 밝은 얼굴로 h를 마주했다고 생각했는데 안색이 안 좋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는 밖이 보이는 큰 유리 통창을 마주 보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나는 그와 상반되는 회색의 낯빛으로 어두침침한 회사 얘기를 했다. 한참 듣던 h가 얘기했다. "힘들면 그만둬." 그 말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맞다, 그런 방법이 있었지. 회사를 떠난다는 선택지를 그간 모른척해오고 있었다. 얼떨결에 움켜 잡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꾸 합리화를 했다. 내가 이상하고, 내가 부족하고, 내가 못해서 그렇다고. 지금 생각해 보면 h를 만난 건 그만두라는 얘기를 듣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어느 누가 들어도 나를 갉아먹는 곳이었다. 더 이상 나를 미워하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사수에게 퇴사를 통보했다. 


고정적인 수입이 끊겼다. 돈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 정신적인 충격을 회복하는 것이 먼저였다. 후유증이 상당했기 때문에 아무 생각도 않고 반년을 보냈다. 그 사이에는 우연한 기회로 친구들과 주말 농장을 하게 됐다. 주말마다 산 자락에 있는 10평도 안 되는 작은 텃밭으로 출근했다. 밭을 갈고, 모종을 심고, 북주기도 하고, 가끔 물도 줬다. 근처에는 작은 계곡이 있어서 가기 전에 꼭 들러 손을 씻거나 발을 담갔다. 하늘을 뒤덮은 초록색의 나뭇잎들이 하나 둘 갈색으로 변할 때쯤 가을이 끝났고, 주말 농장도 끝이 났다. 


몇 주간의 경험은 내 삶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흙을 만지고 작은 생명체를 돌보는 것만으로 세상이 달라 보였다. 음식이 내 입으로 들어가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왜 마트에서 파는 야채와 내가 키운 야채의 향과 맛이 다른지, 농부들이 어떤 농법으로 작물을 키워내는지와 같은 것들이 궁금해졌다. 그런 호기심이 모이고,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결정을 만들어냈다. '귀농귀촌'. 분명 꿈꿔왔던 삶은 아니었지만 내 다음 직업은 농부가 분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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