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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 따라 흐르는 삶 - 월간에세이 2024년 7월호

테네시 스모키마운틴

월간지 '월간에세이'로부터 지난 2월에 요청받아 쓴 글이 7월호에 실렸습니다.


계곡에 물이 많이 찼다. 테네시 스모키 마운틴 어느 산자락에서 세차게 흐르는 물결을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물은 괴성을 지르며 빠른 속도로 흐르고 있었다. 육십이 넘은 나이에 시작한 새로운 도전. 영어도 서툴고 해외에서 살아 본 경험도 없으며 이런 큰 공장을 운영해 본 경험도 없다. 오직 몰입의 힘 하나만 믿으며 내 앞에 펼쳐지는 삶의 흐름에 순응하고자 하였다. 


이제는 평화로운 삶을 살아보겠다고 스스로 퇴직한 회사에 1년 만에 다시 들어와 평생 생각해 본 적도 없었던 미국에서의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이 삶의 종착지가 어떤 모습일지 아직 모르지만, 문득 저 세찬 물결 속에 나의 삶이 투영되었다. 소리를 지르며(어디로 향해 가는지도 모르면서) 거친 물결 따라 흘러가는 삶! 나의 삶도 이 세찬 물결 위의 종이배처럼 물결 따라 흘러가고 있다.


'바다에 닿으면 좀 더 안전하고 평화로울까', '그렇다면 언제쯤 바다에 닿을 수 있을까', '바다가 존재하기는 할까'. 삶은 세찬 물결을 따라 이리저리 흘러갔다. 물결에 끝없이 저항하며 살아왔다. 쓰러지지 않으려고, 실존하며 인식되는 존재로 살아남으려고. 그러나 나에게 물결은 너무 거칠고 요란했고 그 위에서 균형을 잡기 힘들었다. 


힘들게 바다에 도착한 뒤에도 인생의 대부분은 바다 한가운데서 표류하고 있었고 때론 암초를 만나고 때론 폭풍우에 배가 뒤집히기도 했다. '암초나 폭풍우는 더 이상 없겠지'라고 안도하는 순간 바다 밑 지진의 쓰나미는 그런 나의 생각과 예측을 비웃었다. 잠시라도 표류하는 삶을 멈추고 싶다. 더 이상 거친 바람과 파도가 없는 곳, 작은 항구일지라도 지친 몸을 누이고 달콤한 잠에 빠지고 싶다. 삶의 목표나 성취와 의미, 그딴 것들은 다 잊어버린 채. 


잠시 한국에 나왔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는 길, 육십 넘어 다시 출항한 삶은 나를 또 어디로 이끌 것인지, 설령 고래를 잡지 못한다 해도 나는 바다로 나가야 할 것이다. 물결이 나를 어떤 곳으로 이끌지 알 수 없는데 나의 작은 배는 끝 모를 곳을 향해 더욱 빠른 속도로 흘러간다. '표류하는 바다 위의 삶은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이어지겠지'. 


아침에 잠을 깨며 문득 떠오른 하나의 생각,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이며 삶에 꼭 의미가 있어야만 하는가, 생명체에 있어 생명의 연속성 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까, 다음 세대로 생명을 이어가지 못한다면 그 어떤 업적이나 영광이 의미가 있을까, 생명은 그 자체로서 이미 삶의 의미를 다 이룬 것 아닌가'.


온통 모순 덩어리인 이 세상에서 의미 같은 건 잠시 잊자. 열심히 살았다면 이미 그 삶의 의미를 다 이룬 것이다. 사회에 나와 아직 방향을 찾지 못했다 해도 좌절하지 말자. 다양한 시련이 자신을 막아서고 있다 해도 괴로워하지 말자. 나이 들어 퇴직을 하고서도 무언가 일을 하지 않는다고 불안해하지 말자. 가만히 있어도 물결은 흐를 것이고 새로운 공간이 나타나면 새로운 길이 나타날 것이다.


'계획하고 태어나지 않았으나 살면서는 계획이 없으면 삶을 올바로 이끌 수 없고, 목표를 가지고 세상에 나오지 않았으나 살면서는 목표가 없으면 삶이 표류한다'. '의미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으나 살면서는 의미가 없으면 삶의 동력을 얻을 수 없다'. 이 모든 것들은 생명의 연속성을 위해 우리 조상들이 발명한 진화의 결과이다.  


세상은 '공평'이나 '공정' 또는 '정의'라는 단어들로 정의 내릴 수 없다. 그냥 물결 같은 것이고, 어느 날 우연히 그 물결 위에 올라타게 된 것뿐이다. 우리의 조상들이 만들어낸 허상에 빠져 스스로 자신을 괴롭히지 말자. 자연의 피조물일 뿐이고 사는 게 힘든 이유는 어느 날 인간에게 뇌가 생기고 의식이 생겨남으로써 생각이란 걸 하기 시작하며 생긴 분별력 때문이다.  


자연의 피조물 중 하나라면 그냥 존재 자체로 행복감을 누리며 충족되는 마음을 가져보자. 우연히 태어난 삶이지만 열심히 살았다면 이미 필요한 의미 있는 일을 다 한 것이다. 대단하고 거창한 일을 했다고 더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세상은 계획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선택이 더 나을지는 가보지 않고는 알 수 없으니 그냥 물결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물결 따라 흘러가 보자. 지금 누릴 수 있는 것들에 감사하고 현재에 만족하며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면 그뿐이다.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무기력에 빠질 이유도 없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생명의 연속성을 위해 성실하게 살아왔고 존재 자체로 사랑받기 충분하며 존재 자체로 그 의미를 이미 다 이루었으니 존재 자체로 충분히 행복하여야 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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