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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 May 19. 2023

국가가 없는 민족이 모여사는 도시, 마르딘

쿠르드족의 터전이자 북시리아 접경지대인 튀르키예 마르딘

 지난해 튀르키예 이스탄불의 명소인 이스티클랄 거리에서 폭탄 테러로 시민 6명이 목숨을 잃고 87명이 다친 이야기,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여파로 상반기 내내 이스티클랄 거리 곳곳에선 바리케이드를 치고 기다란 총으로 완전무장을 한 경찰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한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전쟁이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자, 불안해진 주변국 스웨덴과 핀란드가 러시아 견제를 위해 만들어진 군사동맹이었던 NATO가입에 문을 두드렸었다. 하지만 이미 NATO에 속해있던 튀르키예의 반대 한 표로 몇 번이고 가입이 미끄러졌던 사실 역시 뉴스에서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전자와 후자의 이야기에는 모두 긴밀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문제의 중심엔 '쿠르드족 무장단체'가 있었다는 것. 주로 이라크 북부와 튀르키예 남동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들의 목표는 '독립 국가 수립'이며, 도시 테러를 일삼기에 튀르키예와는 적대적인 관계에 놓여있다. 바로 쿠르드족 노동당인 PKK가 이스티클랄 거리의 테러를 저질렀고, 스웨덴과 핀란드는 또 다른 쿠르드족 무장조직인 YPG을 지원했기에 튀르키예가 쉽사리 군사동맹의 길을 터주지 않았던 것이다.


 *쿠르드족 : 국가 없는 세계 최대 단일 민족. 약 3천 만명으로 집계되며 1차 세계 대전 이후 나라를 세우지 못해 튀르키예, 시리아 및 이라크 땅에 모여 살고 있다. 그리고 튀르키예와 쿠르드족의 무력 충돌은 튀르키예가 공화국을 수립한 이래로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2023년 5월 5일 금요일, 나는 배낭 하나를 매고 튀르키예 동남부 지역인 마르딘으로 또다시 홀로 떠났다. 내가 좋아할 것 같다며 누군가가 추천해준 여행지였는데, 무계획 여행자로서 여행 당일까지 아무것도 찾아보지 않고 있었다. (혼자 여행할 때 백지상태가 가장 심해지는 것 같다.) 그래도 양심상 공항에서 시내까지 들어가는 방법은 좀 알아놔야 하지 않겠나, 싶어 포털 사이트에 'mardin'을 검색했는데 가장 먼저 뜬 속보가 바로 쿠르드족 노동당인 PKK와 관련된 이야기였다. 튀르키예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그들이 활동 중지 선언을 한 모양이었다. '5시간 전'이라며 쏟아지던 속보들은 스크롤을 내려도 끝이 없었다. 실제로 나중에 마르딘에서 만난 몇몇 현지인들이 어쩌면 내가 가장 적합하고 안전한 시기에 온 것 같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동남부 지역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유독 더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몇 번 듣고는 했는데, 이렇게 확 와닿을 줄은 몰랐다. 닭살이 돋았을까 괜스레 팔을 몇 번이고 쓸어내렸다. (이전에 상황이 많이 안 좋았던 것이지, 마르딘은 현재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안전합니다!)


 그렇게 나는 다시 공항에 내리자마자 대충 시내로 가는 것 같아 보이는 작은 공항버스를 타고 산맥을 따라 올드 마르딘 시내까지 쭉 내려갔다. 땀에 찌든 버스 안내원 아저씨는 이 버스가 시내로 가냐는 내 질문에 험상궂게 대답했다. 내 옆에 앉은 튀르키예 관광객들은 뺑뺑 돌아가던 마르딘의 공항버스에 화가 잔뜩 나있었고 그 무뚝뚝한 아저씨의 태도에 몇 번이고 답답함을 호소했다. 나 역시 불안해 '아무 생각 없이 내가 또 엉성하게 대처했나' 싶었지만 어떻게 할 수 있는 도리가 없어 입을 꾹 닫고 있었다. 버스 뒤편에 앉아계셨던 현지인들은 그 관광객들에게 차분함을 요하며 우리가 올드 마르딘으로 맞게 가고 있으니 제발 좀 기다리라고 했다. 관심 없는 척, 하나도 이해 못 하는 척했지만 귀를 쫑긋 세우고 그 소소한 다툼거리들 속에서 이 무계획 여행자는 얻어낼 수 있는 모든 정보를 훔쳐 먹었다.


 올드 마르딘에 입성하던 순간부터 나는 할 말을 잠시 잃었다.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지로 드넓은 평원을 볼 수 있다는 이 마르딘은 튀르키예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전부터 튀르키예의 곳곳을 다니면서 이런 풍경과 이런 분위기는 느껴본 적이 없었다. 남쪽으로는 시리아와 접하고 있다는 이곳은 정말 '중동 그 자체'였고, 보이는 모든 건물이 베이지색과 황토색이었다. 임시완이 '미생' 첫 화와 끝 화에 나와 요르단 암만 시내에서 격투를 벌이던 그 장소들과 정확하게 겹쳐 보였다. 뭐야, 요르단 갈 필요가 없겠는데?라는 말이 입 밖으로 절로 새어 나왔다. 두 번째로 할 말을 잃었던 이유는 앞서 말한 모든 위험들과 이색적인 무언가들이 아주 무색해질 정도로 관광객이 많았다는 점. 금요일 낮이었는데도 일방통행 도로는 꽉 막혀 뚫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중간에 문 좀 열어달라고 하고 내렸다.) 그 비좁은 도로보다 훨씬 많은 비율의 관광객이 오고 감에 따라 괜스레 가방을 꽉 부여잡게 되었다.


 거리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나는 튀르키예어를 반도 못 들었다. 내 언어 실력의 문제고 뭐고 그냥 진짜 안 들렸다. 남쪽에서 넘어온 북시리아인의 아랍어인지 이곳에서 삶의 터전을 잡은 쿠르드인의 쿠르드어인지는 감도 안 잡혔다. 그런데 아마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여행 초반엔 살짝 긴장해 배가 미친 듯이 고프기 시작했고, 찾아봐둔 식당도 없었기에 그저 보이는 곳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마르딘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너무나 관광지라 '고급 식당' 느낌으로 해둔 레스토랑이 많았다. (또다시 내 첫 번째 편견이 깨지던 순간!) 몇 번이고 들어가기 뻘쭘해하다가 들어갔던 내 첫 번째 식당은 그저 로컬 케밥집이었다. 허름해 쓰러져가는 로컬집들이 원래 맛집이야,라고 다짐하며 당차게 케밥을 주문했다.


 주문하고 또다시 무계획 여행자의 상태로 돌아온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멍을 때리고 있었다. 그때 저기 한구석에 앉아있는 아시아 여자가 일본인이니 한국인이니 뭐니 하는 소소한 논쟁이 귓가로 흘러들어왔다. 흘끗 고개를 올리자마자 그들과 눈이 마주쳤고, 나는 웃으면서 한국인이라고 답했다. 특히 내게 많은 관심을 보였던 한 쿠르드인은 이전에 다녀온 서울 여행이 너무 즐거웠다는 짧은 한국어로 화답했고 마르딘이라는 곳은 어떻게 찾았냐는 등의 이런저런 관심 어린 질문을 여쭤봤다. 또 "My hand is very clean."이라며 자신 앞으로 나온 케밥을 계속해서 나에게 빵에 싸주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니 뭔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들의 행동은 한 줄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다정했다. 가게의 아저씨는 동남부 지역의 고기 질은 다른 지역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말과 함께 자부심을 드러냈는데, 아니나 다를까 케밥의 양고기에선 잡내가 하나도 나지 않았다. 입 안에서 사르르 녹을 뿐이었다. 그 정겨운 작은 골목 식당 사람들은 내게 다국적 인종이 넘쳐나는 마르딘에서 조심해야 할 몇 가지를 알려준 뒤 유유히 사라졌다. 차원이 다른, 댓가 없는 호의였다.


(왼) 메소포타미아 평원 / (오) 길가다 시리아 상인이 하나 맛보라며 준 마르딘 쿠키


 튀르키예에 사는 쿠르드 족이 1800만 명이나 된다는데, 내가 살면서 쿠르드인을 안 만나봤을 리가 없다. 그들은 튀르키예인들과 비슷하게 생겼으며 능숙한 튀르키예어를 사용한다. 그래서 케밥집에서 만났던 그들을 내가 면대면으로 처음 만났던 쿠르드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르딘의 사람들과는 대화를 몇 분 오래 하지도 않았는데, 그들의 민족성도 말 한 마디 한 마디와 함께 뚝뚝 흘러나왔다. 어디선가 그들이 자신들만의 언어와 문화로만 민족성을 지켜나가고 있다는 기사를 봤던 적이 있는 것 같다. 마르딘에서 만난 숱한 사람들 대부분이 내게 'Mardin aslında Kürt bölgesi.'(= 마르딘은 실제로 쿠르드족 지역이야.)라고 말했다. 그들은 내게 '실라' (=안녕)와 '시바스'(=고마워)라는 쿠르드어를 알려줬다. 2박 3일 내내, 나는 마르딘을 여행하면서 쿠르드인들로부터 이전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느낌의 환대를 받았고 그 푸른 메소포타미아 평원 앞에서 또다시 새로운 다양성에 휩싸였다. 다음 글에서는 더 진득한 마르딘의 순간 순간들과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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