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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 May 23. 2023

마르딘에서 마주한 모든 것

선량함이 흘러넘치던 마을, 마르딘


대선의 떠들썩함은 마르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마르딘 여행 당시 튀르키예 대선은 약 일주일을 앞두고 있었다. 골목골목에서 마주한 몇몇 아이들은 내가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대통령인 에르도안의 재당선을 원하는 선전 포스터를 나눠주는데 정신이 없었다. 처음에는 생김새도 다른 나한테 이런 걸 왜 주나 싶었지만 무리 지어 다니는 이 어린 친구들은 나와 튀르키예어로 전혀 소통할 수가 없었다. 날 그저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아무래도 난민 같았고, 부모님이 시켰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시리아에서 넘어온 대다수는 튀르키예 젊은 세대와는 다르게 에르도안의 아낌없는 난민 정책에 커다란 지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멋도 모르고 쥐어주었을 그들의 포스터를 한 손에 꼬깃하게 쥐고 한참을 헤매다 30분 만에 찾은 마르딘의 에어비앤비 숙소에는 호스트인 웬다가 날 환하게 반겨주고 있었다.


내가 묵었던 에어비앤비 숙소

 웬다는 땀범벅이 되어있던 내게 시원한 물컵을 손에 쥐어주며 입을 뗐다. 이전까지 자신의 집 앞까지 직접 찾아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며, 신기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숨 막힐 정도로 좁은 골목길에 있던, 동굴 같은 집이었기 때문이다. 이전 여행에서 고생하며 다녔던 메디나에 익숙해진 덕분이라고 전했다. 울퉁불퉁 덜 다듬어진 돌들로 만들어진 동굴 같았던 마르딘의 집들은 모로코뿐만이 아니라 튀르키예 카파도키아를 연상케 했다. 햇빛에 오랜 시간 노출되어 골목의 계단들을 오르내렸던 터라 땀을 뻘뻘 흘리던 와중이었는데 그녀의 숙소는 집 구조적으로 자연적으로도 날 서늘하게 만들어주었다.


에어비앤비는 호스트가 나에 대한 평가를 내릴 수도 있다.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은 스스로 모든 것들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다.” 라는 마지막 문장에서 또 다시 용기를 얻었다.

 웬다는 스물다섯으로, 마르딘 대학교에서 연극 영화학을 공부하는 대학생이었다. 그녀의 집 거실에는 그녀가 그린 캔버스화들이 즐비해있었고, 한구석에는 이젤에 올려둔 새로운 그림과 팔레트 및 물감들이 정갈히 놓여 있었다. 나는 좋아하는 것을 전공하고 사랑하는 것들로 꽉꽉 채운 그녀만의 공간 속으로 초대된 한 여행객이었다. 자신의 애정이 묻어나는 공간에 나를 손님으로 맞이하는 호스트와 함께 하고 있다니,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현실에 부딪쳐 고이 접을 수밖에 없었지만 나 역시 오래전부터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극 연출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우리는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많은 것들을 공유할 수 있었다. 웬다 역시 쿠르드인이었고 - 쿠르드 족은 오로지 언어와 문화로 자신들의 민족성을 지켜나가고자 하는 사람들이라고 들었는데 - 그 사실을 웬다의 삶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녀는 튀르키예 극들을 쿠르드 어로 번역해 무대에 올리는 활동을 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도 극을 올렸다고 말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러니까 민족성 보존을 예술로 승화해 보태는 삶이 멋있었고 나도 그런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골목마다 먹을 수 있었던 술야니 쿠키 (Süryani)
메디나와 비슷한 느낌이었던 마르딘의 골목 골목, 붉은 히잡을 쓰고 있는 여인의 오른쪽 그림은 모로코 페즈에서도 똑같이 발견할 수 있었다.

 거리 곳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쿠르드인들과 시리아인을 만났다. 골목길의 전통 시장에서 혼자 서성이고 있으면 시리아인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은 내게 마르딘에서만 맛볼 수 있는 시리아식 쿠키를 몇 개 손에 쥐어주며 한 번 먹어보라고 했다. 그들은 이 쿠키에 대단한 자부심이 있었다. 나 역시 맛있다고 엄지를 치켜세웠지만 사실 너무나도 달아서 이후 입안이 오랫동안 텁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르딘의 쿠키 안에는 후르마라는 고농축 당을 함유한 말린 야자열매가 들어있다. 처음에 후르마라는 단어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서 대충 꺼무잡잡한 속을 보고 과일 잼인가, 싶어 물어봤더니 시리아 인들은 사진까지 보여주며 이 열매를 알려주는 친절을 보였다. 어둑해질 무렵 가고 싶었던 비건 집을 한참 헤매다 끝내 실패하니 튀르키예 출신 상인은 알려주겠다고 따라 오라며 비건집 앞까지 데려다주고 쿨하게 떠났다. (이런 동부 지역에서는 꼭 중동 음식인 팔라펠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을 일찍 닫는 마르딘의 마을 특성상 첫 번째 비건집의 문은 굳세게 잠겨 있었다. 대체지로 떠난 두 번째 비건집은 시리아인이 운영하는 작은 가게였다. 그곳에서 밥을 먹고 있던 시리아 손님을 만났다. 그는 마르딘 호텔의 직원이었다. 동양인이라곤 한 명도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내가 신기했던 모양인지 만약 언어가 안된다면 자신이 도와주겠다는 말과 함께 시리아 전통 음식이라며 팔라펠과 후무스를 권했다. 그의 깊은 눈에서 선함이 묻어났다. 북시리아의 전쟁을 피해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는 그는 본인도 이방인인지라 많은 도움을 주고 싶다고 했다. “물론, 다연 씨가 원한다면요.”라는 말을 덧붙이며 말이다. 덕분에 다양한 시리아 음식을 무료로 맛볼 수 있었고,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팔라펠 샌드위치를 포장해 깔끔히 돌아올 수 있었다.


비주얼은 이래도 정말 맛있었다 - !

두 번째 날 다시 찾은 비건집은 정말 최고의 맛을 선보였고 여행하는 동안 두 번 갔다. 올리브유에 볶아낸 밥을 포도잎에 싼 튀르키예의 전통 음식 Yaprak Sarma는 짭조름한 맛이 일품이었고 단돈 2000원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면 보였던 끝도 없이 펼쳐진 메소포타미아 고원은 마치 망망대해를 연상케 했다. 나는 사장님께 너무 그동안 먹어본 음식 중에 최고라는 말을 연신 되뇌었다. 그는 자신의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레시피라며 굉장히 고마워했다. 아주 만족스러운 식사였는데 그들은 오히려 내게 이 음식값을 무료로, 그러니까 선물로 보답하고 싶다고 전했다. 말도 안 된다고 마음만 받겠다며 냉큼 현금을 꺼내 그들 손에 쥐어주고 나왔다. 그리고 저녁 즈음까지 계속 생각나던 탓에 다시 슬그머니 들어가 한 끼 또다시 배불리 했다. 그들의 입가에 피어나던 미소가 오래오래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이 날은 슈퍼문이 떴다. 카페 테라스에서 찍은 사진.
차이와 함께 - !
인류의 첫 시작을 함께한 메소포타미아 문명, 그 고원이 여기있습니다. 바다 같지 않나요?
골목 골목마다 만났던 귀여운 아기들.

 나는 사실 모로코에서 튀르키예로 돌아와 ‘지나친 관심’에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한 터였다. 어느 순간부터 지나친 관심이 나를 ‘그저 다른 존재’로 아주 가볍게 취급하는 것 같았고 그 호의가 어떤 의도를 품고 있는지 분간하기 어려워졌다. 분명 좋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 나라 사람들의 호의와 친절은 분명 시민의식과 연결되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일 텐데도 염세적인 마인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니 그들의 친절로 많은 것들을 덮어내기가 어려웠다. 다정과 허무의 균형이 무너지자 여행뿐만이 아니라 일상의 재미를 점점 잃는 느낌이었는데, 마르딘의 골목골목에서 관찰한 사소한 것들이 그 속에서 날 다시 끄집어내 줬다. 내가 독특한 여행지를 찾는 이유도 결국 두 가지인데 - 첫 번째는 하나는 그 지역에만 있는 이색적인 자연경관이고 두 번째는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분위기를 느끼기 위함이다. 두 번째를 놓쳐버리면 그저 제주도 앞바다를 가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행의 루트를 다시 정비했다. ‘불확실성이야말로 인간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원동력이며, 만약 모든 것을 의심하려 들면 결국 아무것도 의심하지 못한다.’라는 구절을 꼭꼭 씹어 삼켰다. 마르딘에선 그 신념을 잘 지켜낸 것 같다. 이전처럼 사소한 호의 하나하나에 홀라당 넘어가지 않되, 그들과 적당히 좋은 대화를 하는 방법을 찾고 적당한 선에서 정중하게 끊어내는 방법을 잘 실천했다고 생각한다. 나의 노력도 어느 정도 있었겠지만, 그래서 그런지 마르딘 사람들은 오래오래 또렷이 내 기억 속에 남을 것 같다. 그들의 호의에는 별다른 이상한 의도가 없었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만의 민족성을 지켜나가고 있었다.


마르딘 성, 디즈니월드에서 얼핏 이런 어트랙션을 봤던 기억이 있다. 시리아를 맞대고 있어 이곳은 군대가 주둔한다. 따라서 입장이 불가하다.
진지리예 마드라사와 군사학교 / 마드라사는 다양한 학문을 가르치는 신학교라는 뜻의 아랍어다.

 3월 초였나, 어학당 수업이 끝나고 앙카라 시내를 걸어 다니다가 터키인들의 넘치는 여유에 당황했던 적이 있다. 도대체 이 도시의 남자들은 일을 안 하나 싶을 정도로 번화가에 앉아 한낮부터 모여 보드 게임과 담배를 즐기고 있었다. 우리나라였다면 그 시간대에 번화가에선 정장 입고 사원증을 목에 걸고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다음 업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을 텐데, 새삼 해외에 있구나 싶은 순간들이었다. 우리나라 ‘빨리빨리’식 문화와는 전혀 달라 어떨 땐 갑갑한 느낌을 안겨주던 튀르키예식 행정 처리는 이런 여유로움에서 나왔다고 생각했다. 그땐 그게 이 나라를 더디게 하는 거라고 확신했다. 물론 아직도 답은 잘 모른다. 그냥 내가 고작 몇 개월 산 걸로 평가한 일종의 작은 회의감이었다. 그런데 마르딘을 여행하며 다시 또 뒤바뀐 생각은 - 그들의 시민 의식에서 우러나오는 친절과 환대 정신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무언가라는 점이었다. 우리나라보다 삶의 만족도와 행복 순위가 낮은 게 튀르키예다. (뉴스에 실제로 나왔던 통계다.) 어제 가격과 오늘 가격이 다를 정도로 경제가 불안정한 이곳에 머물고 있으면 그 혼란스러움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대선을 앞두고 정치적으로 예민해질 법한 이 시기에, 타인에게 순수한 친절함을 베푸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들만의 방식대로 베푸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고, 나는 이방인으로서 그 선량함에 구차한 이유들을 덧붙일 자격이 없다.


내 첫 히치하이킹 / 비록 다정한 관심에 예상치도 못한 터키어를 쏟아내야했지만, 쿠르드인들은 쿨 - 하게 나를 공항 앞까지 데려다주고 가던 길을 마저 갔다. 얼떨떨했다.

 내 주관으로 감히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아가는 그들을 단언할 수 있나? 그렇다면 나는 한국에서 한국만의 문화에 잘 적응해 사람들과 잘 부대 끼며 살아왔나? 그것도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한참 돈두르마 아이스크림으로 어린아이들과 장난치는 아저씨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저씨는 까르르 웃는 아이들의 시선에 맞추어 허리를 푹 숙여 현란한 솜씨를 뽐내고 있었고, 어머니는 그 옆에서 유모차 손잡이를 잡은 채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이곳만의 다정함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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