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an Nov 16. 2022

江陵에서의 대화

바다는 잘 있습니다.

J, G 그리고 나는 제법 오랜 시간 한 아르바이트에서 합을 맞춘 사이다.


의학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기 어려웠던 J는 일을 그만둔 지 꽤 되었고 얼마 전, G도 앞으로의 나날을 위해 그간의 알바 생활을 접었다.


타지에서 고생하고 있을 J가 그리워 하루 빌려 J가 있는 강릉으로 G와 훌쩍 떠났다. 많이 웃고 많이 걸으며 그동안 못다 한 안부를 주고받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기 때문에 G와 나는 최대한 편한 옷차림으로 만나기로 전 날 약속했다.


생각 그 이상의 후줄근함 덕분인지

(1) 시외로 떠난다는 그 특유의 설레는 맛은 안 났지만,

(2) 우리의 이야기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또다시 새로운 출발을 앞두고 있는 G와 의학공부와 고군분투하는 J에게, 진심을 담아 적어낸 손 편지를 챙겼고 집을 떠나기 전 편지 봉투에 얼그레이 티백 몇 개를 급하게 담았다.


그러면 봉투를 열었을 때 얼그레이 향이 강하게 날거라고 생각했는데,

향이 생각보다 잘 스며들지 않아 적잖이 당황했다.





보다시피 날은 많이 좋지 못했다.
안개였을까 미세먼지였을까...



J는 강릉에서 소문난 일식 맛집에 우리를 데리고 갔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들어갈 수 있었을만큼 그 인기가 높았다.


 각자 마제소바, 호르몬동 그리고 라멘을 시켰다. 마제소바는 먹다 보면 중간에 양념과 함께 비벼먹을 수 있도록 흰쌀밥을 제공한다. 면으로도 양이 충분했기에 공기밥 한그릇을 완전히 비워내진 못했다. G는 이때 뜨거운 라멘 기름으로 입천장을 다쳤고 늦은 저녁 버스터미널에서까지 아파했다. 우리는 그렇게 점심을 먹었고, 그간 못 전한 안부를 주고받았다.


 

 일식집의 인테리어가 귀여웠다. 주변에 줄로 이어진 종들이 즐비해있었는데, 비 오는 날에 그 쓰임을 보는 듯했다. 지붕 아래로 떨어지는 물줄기를 종들이 받아내 맑고 청아한 소리를 낸다.








위에서 먹었던 마제소바집의 사장님께서 운영하는 카페라고 한다.


^_^


 굽이진 골목길을 따라 들어간 끝자락에 위치했던 1938 슬로우는 한옥을 개조해 만든 카페이다. 찾아오지 않으면 절대 찾을 수 없을 듯한 위치에 있어 강릉에 머무는 J에게 감사했다. 나는 천연바닐라를 넣은 잉글리시 브랙퍼스트 밀크티를 마셨는데, 그 달달한 맛이 무척 좋았다.


 당으로 한껏 올라온 즐거움 속에서,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건 싫지만 나이를 먹어가는 것은 좋다는 이야기도 주고받았다. 묵묵히 나의 조잘거림을 듣던 J는 빨리 할머니가 되어 시끄러운 것들이 다 지나가고 손주 손녀들을 보며 조용히 살고 싶다던 홍진경의 편지가 떠오른다고 했다.


 이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J가 말한 홍진경의 수필을 찾아봤다. 수고스러운 젊음일랑 끝이 나고 정갈하게 늙는 일만 남았으면 좋겠다, 라는 문장이 인상에 남는다.








문학동네는 이번 가을, 북클럽 회원들끼리 펜팔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작은 키트를 보내주었다. 가을 펜팔 키트 속 발견한 큐알 코드를 타고 들어간 노션 페이지에는 그들이 추천하는 독립서점 몇 곳이 적혀 있었다.


독립서점은

(1) 서점 주인의 입맛대로 북 큐레이션이 되어 있어 그 특색이 다 다르다는 점이 설레고

(2) 대부분은 내부 촬영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집중해야 하는 것들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이 좋다.


 그렇게 가게 된 강릉의 작은 독립서점에서 짧지만 차분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책 표지에 클립으로 꽂힌 정성 가득한 손글씨 코멘트도 인상적이었고

매 페이지마다 밑줄 그은 흔적들로 빼곡해

새삼 어떻게 이렇게나 많은 책을 읽고 그 취향을 모아둘 수 있는건지

그 애정이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서점 주인분은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의 문장이 너무 아름다워 이 책이 제일이었다고 한다. J 역시 책을 둘러보던 와중 이 책을 가리키며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받은 책이라고 했다. 책을 아끼는 사람들에게 여럿 지목받은 서적이라니 (심지어 내용도 공연예술 관련!) 나중에 꼭 도전해봐야겠다.








 이 날은 영화 <헤어질 결심>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를 정도로 파도가 높았다.


 우중충한 날씨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멀리서 높은 파도를 보고 있으니 제법 분위기는 있었다. 우산을 챙기지 못해 G 곁에 꼭 붙어 있을 핑계가 생긴 것이 좋았다. 평소 같았으면 운동화 틈새로 들어올 모래알들이, 푹 젖어 단단해진 덕에 걷는 일에 문제가 없다는 점도 좋았다.


 

남의 연인 인생샷 찍어준 것 같다며 보여준, J가 찍은 사진



바다를 바라보며 또 한참 우리의 공통분모였던 일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르바이트는 21년 중순 큰 과도기를 겪었는데, 그 과도기에 나와 J, G는 모두 함께 있었다.

 

상사와 라포를 쌓게 되면 곤란한 일들이 많이 생길 거라고 생각했지만,

과도기 후 개인주의로 거듭나던 일터를 경험하고선

많이 혼나기도 혼나고 웃기도 많이 웃었던 과거의 가족같던 옛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J와 나는 6년 지기로, 고등학교에서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지하철에서 맺어진 인연이다. J는 6년 전 4호선 지하철에서 같은 학교이니 친해지자며 손을 건넸다. 아르바이트는 나의 소개로 들어온 것이었다.


강릉 조개구이집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J와 나는

 또 추억을 꺼내먹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왜 그렇게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을 싫어했을까? 고등학교 시절 그는,


(1) 언행에 대한 실수로 생각보다 많은 학생들의 신뢰를 잃었고

(2) 잃은 신뢰 이후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이 몇몇 학생들에게 비웃음을 샀다.


  교원능력평가에서 처참한 결과를 맞이한 후 한동안 수업에서 언행에 대한 해명과 반성을 반복하셨다. 어린 학생들에게 잘 통하지 않았고 나 역시,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지 못했다.


 왜 그렇게까지 싫어했을까? 안그래도 신경쓸게 많았을 수험시절, 왜 그렇게 피곤하게시리 잔뜩 혐오를 품고 살았을까? 잘못을 인지하고 50분동안 언행의 의도를 풀고 용서를 구한다는 건 엄청난 용기셨을텐데, 심지어 나조차도 매 순간 실수를 하며 살아가는데...


 결론은 우리가 너무 박하고 어렸다는 생각이다. 이 자리를 빌려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G : 나의 아저씨 찍냐?


 우리의 바람대로 많이 웃었다. 일단 일차적으로 조개가 맛이 좋아 웃었고 그 자리에서 나눈 즐거운 이야기들로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한 무리로 오래 이어지는 인연에는 비슷한 결이 있구나 싶은 것은, 우리가 서로의 대화 속에서 함의를 곧장 알아차리기 때문이었다.


 J에 의하면 나는 남들보다 납득이 정말 빠르다. 고등학생 시절 과거의 나를 보면 쉽게 납득하지 못했던 성격이었던 것 같은데, 어떤 일련의 일들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가끔 J는 타인이 나에게 하는 대화에서, ‘어떻게 저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지’ 하는 순간들이 있다고 했다.


 이에 G는 그냥 내가 너무나도 모든 이야기를 거부감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란다. 생각해보니 이해가 안되는 것들도 별 생각 없이 다 수용하며 살아왔다. 상대의 주장이 납득이 된다면 쉽게 인정하고 아니라면 그저 흥미롭게 받아들인 뒤 홀로 머릿속에서 토론의 장을 열었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뿐인데 특정 인간군상은 이에 당연하게 더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꺼냈다. 이상함을 감지하면서도 타인의 언행을 거리낌없이 전부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은 좋은 걸까 나쁜 걸까? 좋고 나쁨으로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일까?








타지에서 그동안 못다한 이야기를 매듭짓고,

과거를 그리워하고 앞으로 다가올 우리의 미래를 그리다보니

새삼 힘들었던 일터에서 얼마나 감사한 인연을 맺었는지 모른다.


앞으로도 종종 이렇게 훌쩍 떠나야겠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