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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랜도? 에블린!

책 보다 생각난 그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by ㅈㅑㅇ


올랜도 Orlando.


때는 1500년대 후반, 이야기는 귀족 집안의 잘생긴 남자아이 올랜도로부터 시작됩니다. 다리가 아주 예뻤다고 해요. 그런데 중간에 올랜도가 여자로 바뀌어요. 당사자도 주변 사람들도 그다지 놀라지 않아요.


성별 전환으로 인한 법적인 문제는 엄청나게 오랜 소송 끝에, 올랜도 자산을 거의 다 까먹은 후에, 마무리됩니다. 법적으로 여자로 인정받은 때가 1800년대 빅토리아 여왕 시대. 올랜도에게 허락된 시간은 거의 '참나무' 수명만큼 길어요. (참나무는 올랜도의 주요 모티브입니다.)


올랜도는 책의 뒷부분에서 불현듯 현재를 자각합니다. 당시의 현재는 1928년, <올랜도> 출간 연도입니다.


그녀는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었어요. 저택의 침대보를 사러 런던 시내의 백화점에 가는 길이었거든요. 운전하는 도로에서 급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봅니다. 수많은 시간대의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수많은 나. 영화 인터스텔라급 시간대가 이야기 속에 나옵니다. 올랜도는 혼란스러워해요. 물론 그 모든 시간대와 다양한 자아를 통합하며 책은 '황홀하게' 마무리됩니다.


올랜도의 시간은 언뜻 우리의 시간과 많이 달라 보입니다. 하지만 어찌 보면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로부터 온 우리 자신 같기도 해요. 물리적으로 나 혼자 여러 세대를 살기는 어렵지만. 유구한 시간이 내 안 어딘가에 분명 있다고 상상하면, 너무 비약이 심한 걸까요. 4차원급 시간 이야기는 접어두고.


책 곳곳, 특히 뒷부분은 감각적이고 장면 전환이 빠른 요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습니다. 올랜도가 '수많은 자아', '2,052명'을 말할 때에는 여러 차원에 존재하는 여러 형태의 에블린이 몹시 생각났더랬죠. 양자경이 연기한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주인공, 에블린 왕이요.



그러고는 주저하듯이, 마치 그녀가 원하는 사람이 거기 없을지도 모른다는 듯이, <올랜도?>라고 불렀다. 만일 마음속에 76개의 서로 다른 시간대가 동시에 째깍거리고 있다면, 인간의 영혼에는 이 시간대나 다른 시간대에 머물렀던 사람들이 수없이 존재하지 않을까? 누군가는 2,052명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누군가 혼자 있을 때 <올랜도?>(그것이 그의 이름이라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세상에 흔하디 흔한 일이다. 그 부름의 의미는 이런 것이다. 어서 오라, 어서 오라! 나는 이 특정한 자아가 싫증 나서 죽을 지경이니까. 나는 다른 자아를 원해.

그런 연유로 우리는 친구들에게서 놀라운 변화를 보게 된다.

p.317 버지니아 울프 <올랜도> 열린책들


다른 시간대, 다른 차원의, 다른 멀티버스 속 나를 부르는 게 비슷하지 않나요? 다른 '나'가 소환된 후 보여주는 놀라운 변화도 비슷하다 생각했습니다. 영화 속에서 에블린은 무술을 하게 되기도 하고, 손가락이 길어지기도 하며, 돌이 되기도 했죠. 허무와 혼란을 마주하고 있는 것도 비슷하네요. (지키고자 하는 것은 문학적 자아이냐, 가족이냐에서 좀 차이가 나긴 합니다.)


올랜도? 대신 에블린?



누군가 <올랜도?>라고 부르더라도, 그녀가 원하는 그 올랜도는 그래도 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웨이터의 손에 쌓인 접시처럼 차곡차곡 쌓여 우리를 형성하는 그 자아들은 다른 곳에 애착과 공감을 느끼고 있고, 여러분이 그 자아들을 뭐라 부르든 간에 자기들 나름의 소소한 기질과 권리를 갖고 있다.

그래서 어떤 자아는 비가 내려야만 올 테고,
다른 자아는 녹색 커튼이 드리워진 방에만 올 것이며,
또 다른 자아는 존스 부인이 옆에 없어야 올 테고,
또 다른 자아는 포도주 한 잔을 주겠다고 약속해야 올 것이며,
이런 식으로 기타 등등 조건이 맞아야 할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상이한 자아들과 맺은 상이한 조건을 자기 경험을 토대로 대폭 확대시킬 수 있기 때문에 - 어떤 조건들은 너무나 황당하고 우스꽝스러워서 활자로 기록할 수도 없다.

p.318 버지니아 울프 <올랜도> 열린책들



다른 자아를 부르는 '어떤 조건들은 너무나 황당하고 우스꽝'스럽다니.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다른 우주의 에블린을 부르기 위해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기상천외한 행동을 해야 하잖아요. 이를테면 책상 밑에 붙어있는 껌을 씹거나, 트로피를... 차마 활자로 기록할 수가 없네요.


물론 버지니아 울프는 훨씬 고상한 차원으로 이야기했었겠지만, 저는 이 영화를 생각하면서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엊그제 퇴근시간 대에 지하철을 타면서 또 한 번 올랜도와 에블린을 떠올렸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핸드폰을 보고 있었거든요. 대부분이 일제히 핸드폰을 보고 서고 걷고 앉아 있었어요. 그게 꼭 사람들이 지금 지하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기 핸드폰 속 여러 세상을 점프하고 다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핸드폰 속. 주말에 누군가 만날 장소에 가 있거나. 저녁 식당에 미리 가 있거나. 고 김새론이 되어있거나. 김수현이 되어 있거나. 헌법재판관이 되어 있거나. 고양이가 되어 있거나. 마인크래프트 게임을 하는 사람이 되어 있거나...


여러 세상에 존재하고 있긴 한데. 올랜도가 성취한 '황홀함', 에블린이 성취한 만족감 또는 안정감이 느껴지진 않았습니다. 진짜 내 이야기가 아니라 그런 걸까요. 역시 그런 이야기는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걸까요. 혹시 우리에게 '아무것도 통과시키지 않는 현재라는 차단막'이 있기 때문인 걸까요.


어딘지 몰라도 매장을 제대로 찾아가야 하는데 그녀는 핸드백들 사이에 넋을 잃고 서 있었고, 공손하고 가무스레하며 머리칼을 단정하게 빗은 팔팔한 점원들의 권유를 하나도 듣지 못했다. 그들은 그녀와 똑같이, 어쩌면 그들 중 몇몇은 그녀 못지않게 자랑스러운, 유구한 혈통을 이어받았겠지만,

아무것도 통과시키지 않는 현재라는 차단막을 치고는 오늘날 한낱 마셜 앤드 스넬그로브 백화점의 점원으로 나타난 것이다.

p.313 버지니아 울프 <올랜도> 열린책들



의식의 흐름대로 썼다는 버지니아 울프 책을 보고 나서 그런가. 제 생각도 이렇게 저렇게 흘러 다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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