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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ㅈㅑㅇ Aug 12. 2024

후크의 품격, 품격의 피터

근엄 단정하게 입고 싶은 날 <피터팬>을 떠올리다


회사에서 실수를 했다. 꼭 내 실수라기보다 상황상 변화였지만 어쨌든 체면이 구겨졌다. 자꾸 생각난다. 약간의 자괴감과 그게 뭐 어때서 하는 뻔뻔함이 동시에 몰려왔다. 자괴감 쪽이 조금 더 무거웠다.


다음날 아침 출근 전. 거울을 보면서 좀 더 정성 들여 머리를 빗었다. 옷도 신경이 쓰였다. 티셔츠와 청바지보다는, 정장 분위기가 나는 셔츠와 바지에 손이 갔다. 오늘은 좀 단정하고 근엄하게 입고 싶었다.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체면이 깎였으니, 외모로라도 최소한의 체면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의 발로였다. 


후크 생각에 쓴웃음이 났다. 그는 비열한 악당이었지만, 왕족처럼 옷을 입었다. 영국 왕 중에서도 비운의 스튜어트 가문 사람처럼. 그러니까 영국에서 왕이 참수되기도 하던 시기의 왕족처럼 입었다. 참 부질없다. 또 야외 활동이 많은 해적이라는 직업을 감안하면 상당히 불편했을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옷을 차려입은 이유는 품격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는 언제나 품격을 추구했다. 피터팬을 만화나 연극을 통해 봤을 때에는 미처 몰랐다. 어렸을 때 봐서 몰랐던 건가. 어른이 되어 읽어 본 제임스 매튜 베리의 책 <피터팬>에는 후크의 품위유지와 고상하고자 하는 성향이 아주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의외로 품격에 목매는 사람이었고, 어딘지 수행자 같은 면모가 있었다.




후크의 내부 깊숙한 곳에서 녹슨 철문이 삐걱거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 중에는 잠 못 이루는 밤, 망치 소리처럼 집요하게 쾅쾅 두드리는 소리도 섞여 있었다. "오늘은 과연 품격을 지킨 하루였는가?" 이것은 그 소리들이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이었다... 중략... 하지만 무엇보다도 혼란스러운 생각은, 품격에 대해 신경 쓰는 거야말로 품격에 어긋나는 짓이 아닐까 하는 거였다.

이러한 문제는 후크를 무던히 괴롭혔다. 손에 단 강철 조각보다 더 날카로운 마음속 쇠갈고리가 그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창백한 얼굴 위로 땀이 뚝뚝 흘러 순식간에 윗옷을 타고 내렸다. 그는 때때로 소매로 얼굴을 훔쳤지만, 끝없이 흐르는 땀을 막을 수는 없었다. (p.242)

제임스 매튜 베리 <피터팬> 비룡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품격과는 거리가 멀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해적이다. 그가 추구하던 품격은 옷차림이나 남들 시선에 의해 구구절절 좌우되는 겉치레. 진짜 자존감 있는 존재가 뿜어내는 아우라로서의 품격과는 거리가 상당했다. 




후크는 멋쟁이 신사였지만 하는 일이 워낙 험하다 보니 옷깃에 때가 묻어 있었는데, 순간 그는 웬디가 그것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당황해서 서둘러 숨기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p.251)



옷은 낯선 타인에게 맞서 자신을 방어하는 갑옷이라고 이디스 워튼이 얘기했던가. 잘 차려입은 옷이 플러스 요인이 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옷은 옷이고 사람은 사람이다. 전에 일하던 회사에서는 옷 제일 잘 입는 선배가 제일 상종하기 싫은 인간이었다. 


그래, 외모는 정말 부차적이다. 깨끗하고 근엄해 보이는 옷가지만으로 품격이 만들어질 리 없지. 




재빨리 후크의 벨트에서 칼을 뽑아내 후크의 배를 찌르려 하는 순간, 피터는 자신이 후크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음을 알았다. 그러면 정정당당한 싸움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피터는 후크가 위로 올라오는 것을 도와주려고 내밀었다. 후크는 대뜸 그의 손을 물어뜯었다.

피터가 얼떨떨해진 것은 손의 통증이 아니라 후크의 비겁함 때문이었다. 피터는 잠시 어쩔 줄을 몰랐다. 너무나 놀라서 후크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모든 아이는 그렇게 처음으로 불공평한 대접을 받을 때 상처를 입는다. 아이가 누구에게 다가갈 때 당연히 기대하는 권리는 공평함뿐이다. 그런 아이를 불공평하게 다룰 때 아이는 다시 사랑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절대로 이전과 똑같은 아이가 될 수 없다. 그 누구도 처음 경험한 억울함, 불공평함을 잊지 못한다. 피터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피터는 종종 불공평함을 겪었지만 곧 잊어버렸다. 그것이 보통 사람과 피터의 다른 점인지도 모르겠다. (p.168)



품격은 오히려 후크의 적수에게 있었다. 후크의 시선에 의하면 건방지고 예의도 없고 제멋대로인 피터에게. 피터는 놀이의 원칙을 지켰다. 그게 품격인 줄 모르고 그냥 준수했고, 과거의 부당한 대우는 바로 잊어버렸다. 품격의 필수조건으로 어른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보다. 


그런 피터팬은 무엇을 입었느냐? 

나뭇잎으로 지은 옷을 걸치고 다녔다! 

웬디는 잠옷 차림이었다!! 



위키피디아 피터팬 https://en.wikipedia.org/wiki/Peter_Pan



피터는 어른이 되지 않는다. 그는 종종 '젖니를 뽀드득 갈았다.' 유치가 그대로 남아있는 나이다. 보통 초등 1학년 전후에 앞니가 빠지고 새로 나니까, 그는 학교나 유치원 가기 전 어린아이인 셈이다. 울고 싶을 때 울고 웃고 싶을 때 운다. 행동의 원인과 몇 단계 후의 결과를 신경 쓰기보다는 지금의 즐거움과 감정에 집중하는 아이가 피터팬이다. 그는 언제나 현재를 산다.



아이들은 정말 현재에 거주한다. 전날 있었던 일에 대해 충분히 생각해 본 후 교훈조로 이야기를 꺼낼라치면 순진무구한 얼굴로 '그건 어제 일인데?'하고 되묻는다. 우리 집 아이들이 그러했다. 그 시기 아이들은 처음 보는 누구에게나 웃어주기 쉽고, 누구라도 눈 마주치기가 수월하며, 싸워도 화해하기 쉽다. 나의 감정이 세상의 중심. 조금 더 마음을 쓰면 엄마의 감정도 포함시키려나? 지금 돌이켜보면 너무나 아득한 시간이다.



피터는 시간개념도 불분명하다. 웬디를 매년 만나기로 해놓고선, 몇 해씩 약속을 거르고도 인지하지 못한다. 오히려 어른이 된 웬디를 보고 깜짝 놀란다. 훗날 웬디가 팅커벨과 후크 얘기를 하자, 피터팬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팅커벨? 그게 누군데? 흠칫했다. 과거나 시간 따위 바로바로 내버리는 인물이다. 



많은 현인들이 과거와 미래에 연연하지 않고 현재에 충실한 것이 행복의 열쇠라고 말한다. 그래서 Present 현재가 곧 Present 선물이라느니, 순간을 잡으라니 Seize the moment 하는 말도 있잖은가. 푸른 눈의 스님 나티코가 쓴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I may be wrong>이란 책에서도 현재에 집중하는 것은 분명한 메시지 중 하나였다. 충만한 현재를 사는 열망, 혹은 열반을 위한 필수 조건은 아이가 되는 것이었나. 



피터팬이 현자였나. 



후크는 죽는 순간까지 품격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했다. 품격에 대해 강요받았던 영국 명문 사립학교인 이튼학교 시절을 떠올리며, 이튼학교라니 후크는 조지오웰과 올더스 헉슬리와 동문이다, 맞수 피터의 품격을 내리 깎을 궁리를 했다. 그가 품격에 대해 고민하면 할수록, 품격으로부터 멀어졌다. 시계 소리에 쫓겨 다니는 것도 불쌍한데, 후크가 더 안쓰럽게 느껴진다.




후크는 지금 희망 없이 싸우고 있었다. 이 흥분한 야수는 더 이상 목숨을 아끼려 들지 않았다. 대신 한 가지 간절한 소원이 있었으니, 바로 죽어 싸늘한 시체가 되기 전에 피터가 품격에 어긋나게 행동하는 꼴을 보는 것이었다.
후크는 싸움을 포기하고, 탄약 창고로 달려가 창고에 불을 붙였다.
"이 분 뒤면, 이 배는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그는 소리쳤다. 이제야말로 피터의 본색이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피터는 탄약 창고에서 불붙은 포탄을 갖고 나와서는 침착하게 그것을 물속으로 던져 버렸다.
후크의 품격은 대체 어떠할까? 비록 후크가 삐뚤어진 길을 걸어왔지만, 그가 최후에는 자신의 신분 전통에 걸맞게 행동한다면 그나마 기쁠 텐데 말이다.
다른 소년들은 지금 그의 주위를 비웃고 조롱하면서 날아다니고 있었다. 후크는 갑판 위에서 비틀거리며 무력하게 그들을 향해 주먹질을 하고 있었지만 이제 그의 생각은 소년들에게서 떠나 있었다. 그의 생각은 오래전 학교 운동장에 가 있었다. 숙소에서 근신하라고 얘기를 들었을 때나, 이튼 학교의 유명한 관람석에서 운동 경기를 보고 있을 때를 생각했다. 그때에는 신발도 제대로 신었고, 외투와 타이와 양말, 모든 것을 격식대로 차려입고 단정했다. (p.273)



출근길 후크와 피터를 떠올린다. 나도 피터처럼 매 순간 충만하게 살고 싶다. 시계에, 시간에, 스케줄에 쫓기거나. 김치국물이 치명적인 근엄한 옷차림보단. 나의 즐거움을 최우선으로 살아보고 싶다. 남의 시선보다도, 남의 감정보다도, 나의 순수한 즐거움 그 자체를 우선으로 하자. 그게 주인공으로 사는 길. 현재를 사는 길이다. 



이렇게 마무리하고 싶었지만. 역시나. 도무지. 마흔이 넘어서 품격의 피터가 되는 것이 어렵다. 유치는 진작에 사라져 없고, 영구치 중 일부는 대체품으로 바꿔야 한다. 후크의 오른손처럼, 그래, 후크가 쉽지. 피터는 동경의 대상. 셔츠와 정장바지는 입고 나왔지만 쪼그라든 마음이 잘 펴지지 않는다. 피터가 어쩐지 얄밉다. 



마음을 조금 넓혀야겠다. 순진무구한 아이를 바라보는 너그러운 어른의 마음으로. 이건 가능할 것 같다. 아득한 시절 유치가 귀여운 아이들을 바라보던 나를 기억해 낸다. 그리고 내 안의 아이를 바라본다. 아이에게 물었다. 나의 순수한 즐거움 뭐가 있을까. 



출퇴근길 음악의 감동? 회사 영업 수주? 원만한 자금결제? 사무실 청소 후 흐르는 땀방울과 다소 정돈된 주변을 둘러볼 때의 마음? 주말에 핸드폰을 끄고 한두 시간 숲길을 걸을 때의 상쾌함? 아이와 웃음? 아이의 심리적 성장을 이끌었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의 기쁨? 운전 중 창문 저 편 숲 속 자작나무 잎이 바람에 흔들리며 반짝거리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 구름 사이로 신의 손가락 같은 햇빛 몇 줄기가 쏟아져 내려오는 장관을 볼 때? 오래 읽혀온 이야기들이 나에게 말을 걸 때? 


기분이 좀 나아진다. 

오늘 하루 즐거워할 에너지가 생긴다.

피터팬 덕이다.




Unsplash의 Ruthson Zimmer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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