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상진론 「매수당한 피」

by 김지숙 작가의 집

「매수당한 피」일부



하마터면 현관문을 열 뻔 했다

문 앞에 서 있는 그 눈은

불거진 사진관에서 파란 불을 내뿜는

오래된 눈빛 같았다

나는 내 꿈에 매수당한 채

간신히 돌아누웠다

내 곁을 기어온 전갈 같은 어둠은

손끝에 놓인 중고책 속으로 기어들었다

책갈피에서 누군가의 엽서가 떨어진다

그러나 네 노래 속에 나는 없고

내혈관엔 너의 피가 흐르고 있어

어떤 말이 나를 이해받을 수 있을까

밤은 가죽장갑을 물어뜯으며

창이 녹는 소리 뒤에 서 있다



환영이란 사물 간의 연계를 긴밀히 환기시키며 광적 자아가 외계 이미지와 현실을 자기 내적 필요와 욕망에 일치하도록 구성하는 착란의 일종이다 이는 공상 환상의 영역을 주의 깊고 비교적 정확하게 묘사한다 시「매수당한 피」에서 화자는 섬세하게 관찰된 가사상태의 현실을 너와 나라는 인물의 동일시로 기록하는 과정에서 환상성을 불러들인다 내면 감정에 충실한 눈으로 독특한 심리적 정황을 들여다보면서 감정을 다시 내부로 투사하여 욕망을 관철시키려 한다

이러한 무의식이 만들어내는 환상성은 낯익었던 것들이 낯선 것으로 변형되어 기록된다 시에서는 하마터면 현관문을 열 뻔 했다에서와 같이 익숙한 경험이 전혀 낯선 일상이 되어 되돌아보는 가운데 새로움과 낯설음을 환기하는 부분이 나타난다 너와 나의 낯선 결합은 가죽장갑을 물어뜯는 암울한 환영을 불러낸다 중고책을 매개로 너와 화자가 동일시된 환상의 산물은 내 혈관엔 너의 피가 흐르는 과정을 함축한다

또한 책갈피 속에서 나온 노래는 지극히 비현실적이며 비현존적 사물로 이와 교류하는 환상성은 실재와의 간극이 큰 만큼 자신만의 세계로 더 깊이 침잠하는 상황이 가능하다 환상이란 현실의 반대편에 있는 상상계인 만큼 욕망의 충족은 불가능하며 부재하는 세계에 힘을 싣는다

하지만 환상성은 자연스러운 계기로 새로운 현실을 구현하는 매개가 되는데 그것은 환상의 세계에 자연스럽게 현실성이 부여될 경우이다 이 시에 나타나는 그로테스크기법은 사실적 관점에서 삶을 새로운 시각으로 들여다보는데 있다. 현대의 삶 가운데 세상과의 원만한 관계가 멀어진 이유를 현재 상황이 만들어낸 부조리성에 두고 상호 관계의 분열 양상으로 드러나는 부정적 분위기를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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