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 8년 차, 일 년에 두 번의 밤호박 재배를 한다.
봄에는 하우스 세 동에 4열로 재배하고, 가을에는 하우스 두 동에만 4열로 밤호박을 심는다. 한여름의 봄 재배 갈무리는 힘든 일이지만, 가을 재배의 갈무리는 12월에 시작된다. 추운 겨울, 이불 밖으로 나가기 싫어 제대로 굳어진 몸에 열기와 유연성을 더해주기 때문에 일이 있음에 감사하게 생각한다. 겨울 갈무리는 하우스 두 동만 정리하면 되니 일하는 것도 수월하다.
뿌리뽑기
올해도 어김없이 내년 농사를 시작하기 위해 가을 재배 밤호박 갈무리의 시동을 12월 10일에 걸었다. 물을 주지 않아서 가을의 싱그러웠던 터널이 상상되지 않을 정도로 줄기가 말라가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연둣빛을 보여주고 있는 밤호박 터널이다.
그물을 타고 올라간 줄기를 쉽게 걷어내기 위해선 바짝 말려야 한다. 그래서 맨 처음 해야 할 일은 뿌리뽑기이다. 귀농 초반에 부정근(뿌리가 아닌 조직에서 발생하는 뿌리)을 활용해서 재배해 보려고 했으나 요령이 없어 제대로 되지 않았었다. 몇 년 동안 이런저런 방법으로 키우다가 올해 선도농가 어르신의 가르침을 받아 부정근을 키울 수 있게 되었다. 하나의 뿌리에서 양분을 흡수하는 것보다 넓게 퍼지고, 여러 개의 뿌리가 있으면 줄기와 잎이 건강해 밤호박을 실하게 키울 수 있다. 즉, 올해부터는 본뿌리 외에 부정근도 뽑아야 한다는 말이다. 일이 늘었다. 밤호박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면야 이 정도는 껌이다.
허리를 굽히고 게걸음을 걸으며 양손으로 뿌리 쪽 줄기를 잡고 잡아당겨 부정근까지 뽑는다. 뿌리를 뽑는다는 것은 곪은 여드름을 꾸욱 눌러 짰을 때 엄청난 것이 튀어나올 때의 쾌감과 흡사하다. 시원하게 뽑히는 느낌이 좋다. 농부님에게 양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내가 하고 있다. 정신건강에도 좋지만, 스쿼트 자세가 계속 나오기 때문에 엉덩이와 허벅지 근육 생성에도 도움이 된다. 단지 일 년에 딱 두 번밖에 하지 않기 때문에 금방 사라져 버릴 근육이긴 하다. 작업이 끝나고 며칠간은 앉았다 일어날 때마다 곡소리가 자동생성되는 후유증이 남는다.
뫼비우스의 띠, 농사 갈무리
2020년부터 재배일지를 남기고 있다. 재배기록을 남길 때마다 농사의 갈무리가 시작인지 끝인지 결정짓기가 어렵다. "갈무리"라는 말을 보자면 끝인 것 같지만, 다음 해 농사를 시작하는 첫 행위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농사 갈무리는 안팎의 구분이 없고, 보는 위치에 따라서 기준이 달라질 수 있는 뫼비우스의 띠와 비슷하다.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과 깔끔하게 마무리 짓겠다는 마음이 만나 작업복을 입고 모자를 눌러쓴 내 마음속에 띠를 만들었다. "농사 갈무리"라고 표현하는 걸 보니 내 마음은 "마지막"에 더 기울어져 있나 보다.
사라져 가는 근육을 아쉬워하며 오늘도 곡소리와 함께 컴퓨터 앞에 앉아 기록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