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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자식농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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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농부아내 Dec 30. 2024

엄마는 파괴왕


크리스마스이브.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아이들 등교 후 컴퓨터를 켰다. 전원 버튼을 누르니 윙~ 본체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오래된 컴퓨터인지라 소리도 요란하다. 커피를 마시며 모니터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어??

어??????


검은색이 부팅화면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계속 검은색이다. 기다려도 계속 그 상태다. 강제 종료 후 재부팅을 했지만 여전히 검은색을 보여준다. 기계만 만지면 고장 내는 마이너스의 손이 또 일을 저질렀다.


"여보~~~~~!!!"


방에서 쉬고 있던 남편을 소환했다. 효리네 민박에서 이효리 씨가 무슨 일만 생기면 "오빠"를 부르며 오빠폭탄을 날리듯, 나도 자주 남편을 소환하는 편이다. 특히 마이너스의 손 덕분에 기계가 고장 날 때는 필수로 여보폭탄을 날린다.





몇 번 전원버튼을 눌러보더니 수술실 들어가는 의사처럼 니트릴 장갑까지 끼고 와서 자리를 잡았다. 거실에서 아이들 영화 볼 때 쓰는 컴퓨터 본체까지 가져와 부품을 서로 바꿔가며 고장원인을 찾아가는 남편. 나는 미안해서 쭈뼛거리며 옆에서 지켜보기만 할 뿐 도움이 되지 못한다.


"크리스마스 이브라 산타가 새 컴퓨터 사 주려고 고장을 냈나 봐~"


웃으라고 던진 말은 허공에 흩어지면서 남편의 흘긴 눈을 마주했다. 마이너스의 손에게 컴퓨터 고장이야 자주 있는 일이고 남편도 익숙한 상황이다. 수리에 진심이라 장갑을 낀 줄 알았는데 쉽게 끝나지 않을 수리라 장갑을 착용했었나 보다.





이튿날 대수술을 거친 뒤에야 컴퓨터 본체는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새 컴퓨터를 향한 나의 원대한 꿈이 무너졌다). 하루 만에 수리가 끝나지 않아 미안함은 더 커졌다. 미안하다고 하니, 오래된 컴퓨터라 고장 날 때가 되었단다. 알지. 나도 그건 안다. 내가 미안한 건 손만 대면 고장을 내거나 부수니 잦은 수리와 수선을 하는 상황이 미안한 거였다. 두 딸이 있지만, 손 많이 가는 큰 딸을 한 명 더 키우는 것 같은 기분이지 않을까.


크리스마스.

둘째가 산타에게 다이어리 꾸미기 세트를 선물 받았다. 손안에 들어가는 미니미한 사이즈의 연필깎이가 가득 차면 어떻게 비워야 하냐며 내게 물었다. 내가 손에 쥐고 이리저리 만지작 거리니 둘째가 외쳤다.


"엄마, 오늘 받은 거예요. 새 거예요~ 부수면 안돼요~"


아이들마저 인정하는 파괴왕. 그것이 우리 집에서 나의 위치다. 크리스마스이브의 오래된 컴퓨터처럼 타이밍이 오묘하게 맞아서 고장이 나는 것일 수도 있다. 설명서를 읽지 않고 힘만으로 억지로 하려다 보니 부수는 것일 수도 있다. 마이너스의 손이든 파괴왕이든 우리 집에는 맥가이버 아빠가 있으니 웬만한 건 수리가 가능하다. 그래서 마음 놓고 이것저것 고장내고 부수고 다니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맥가이버가 수리가 힘든 것이 가전이다. 세탁기도 잘 사용하다가 고장이 나서 교체를 했고(이건 수리 불가), 청소기는 남편이 수리를 했지만 결국 몇 번이나 새로 구입을 했다. 우리와 함께 한 지 10년이 넘은 냉장고를 바꾸고 싶으니, 오늘은 냉장고를 만져볼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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