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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라이 Mar 25. 2023

폐경이 아니라 완경이라지만


산부인과에 다녀왔다. 


며칠 전 친구가 산부인과에서 완경 판정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도 미루고 미루던 산부인과 진료를 받고 온 것이다.


몇 달 전부터 부정출혈이 계속돼 왔다.  

처음 시작이 코로나 백신을 맞고 난 다음날부터였기에 

일시적인 백신 후유증 일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증상이 점점 심해지더니, 생리 날짜가 언제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잦아졌다. 

슬슬 걱정도 되고, 

무엇보다 일상이 너무 힘들었다. 

불규칙적인 출혈로 밝은 색 옷을 입는 건 엄두도 내지 못했고, 

행동에는 늘 주의가 필요했다. 

찝찝하고 불편하고 조심스러운 일상이 반복되다 보니 

나중엔 만사가 귀찮고 우울해졌다. 


그럼에도 선뜻 병원을 가지 못한 건 진심으로 가기 싫어서였다. 

산부인과가 정말 가기 싫었다. 


5년 전 자궁근종 제거 수술을 한 후로, 

한 동안은 숙제 잘하는 모범생처럼 병원에서 정해주는 날짜마다 

거르는 법 없이 산부인과를 찾았었다. 

그러다 코로나를 핑계로 한번 건너뛴 병원은 두 번 건너뛰게 되고 세 번 건너뛰게 되고... 

결국 3년을 미루는 일이 되었다. 


여전히 남아있는 자궁 속 근종이 어떤 지경이 되었을지 걱정도 되고 

내 일상을 갉아먹는 부정출혈의 원인도 궁금하고. 

혹시 완경의 신호는 아닐까, 다른 여성질환이 찾아온 건 아닐까. 혹시 암?... 등 

각종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도

혹시나... 했던 게 역시나가 될까 봐 무서워 

병원에 전화 한 통 해서 예약 잡는 일을 내일로, 또 내일로 미루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친구의 완경 소식이 들려왔다. 

예상치 못한 의사 이야기에 충격이 큰 듯했다. 


‘설마 벌써?’ 

‘설마 내가?’ 


나도 머지않아 닥칠 일이라는 걸 잘 알기에 누구보다 친구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 충격을 위로해 줄 마땅한 말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순간 어디선가 주워들은 말이 떠올랐다. 


“폐경이 아니고 완경이라잖아” 


같은 상황을 놓고 하는 말이라도 이제 끝났다는 느낌의 ‘폐경’보다 

마무리되었다! 완성되었다! 는 느낌의 ‘완경’이라는 말이 위로가 되기를 기대했다. 

며칠 후, 어설픈 위로를 받은 친구는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정말 받아들여지는 걸까? 


여성으로서의 역할이 사라지게 되면 

여성으로서의 매력도 다 사라지는 건 아닐까.... 

제 아무리 폐경이 아니라 완경이라고 하지만, 

나도 머지않아 닥칠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게 폐경이든 완경이든 무슨 상관이랴 싶어 진다. 


언젠가부터, 

폐경을 맞고 나면 나는 더 이상 여자가 아닌 걸까....라는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특별히 여성스러움을 타고나진 않았지만

이 세상에 딸로 태어나 커가면서 2차 성징이라는 걸 겪었고, 

자연스레 여성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알게 되었다. 

딱 배운 대로 여성성을 관리하며 살아왔고, 

영광스럽게도 여성의 특권인 임신과 출산도 경험해 보았다. 

그런 내가 나이를 먹고, 완경 판정을 받는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니... 

서글프다. 


부랴부랴 완경의 의미부터 제대로 알아보기로 했다. 

폐경 대신 완경이라는 말을 제안한 한의사 이유명호 선생님에 따르면, 

완경은 여성이 재생산의 임무를 잘 마치고 자기의 삶을 준비하는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생명 창조의 임무를 잘 완수했으니 이제 한 사람으로 자기의 생을 개척하고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이 완경 이후라는 이야기다. 

폐경이든 완경이든, 어쩌면 서글픈 일이 아니고 자유로운 시작이 될 수도 있다는 거다. 

단어 하나로, 끝난 것 같은 인생을 새로 시작을 할 수 있다니! 

마음이 조금 놓인다. 


산부인과 진료 결과가 나왔다. 

다행히.... 완경의 징후는 아니었다. 

자궁경부에 꽤나 크게 자란 폴립이 있었고, 

그로 인해 잦은 출혈이 있었던 것이다. 

폴립을 제거한 지 삼일째. 

다행히 더 이상의 출혈은 없다. 

그것만으로도 삶의 질이 달라졌다. 

언제나 불안하고, 짜증 나던 내 몸이 안정감을 찾았다. 


지금부터 찾아 배워야겠다. 

내가 나를 제대로 알아야 나를 사랑할 수 있다는 뻔한 말 같은 진리를 온몸으로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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