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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t n Money in New York Mar 06. 2024

[100 챌린지] 단지의 독서노트_96

Livro do Desassossego

Fernando Pessoa

PORTUGUESE

Publisher: Independently published

Published: 01 JUL, 2017

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저자

배수아 역자

봄날의책 출판

2016.03.27. 종이책 출간

목차

발문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능력 김소연(시인)

서문

텍스트

주석

옮긴이의 글

이름은 하나의 징후다 배수아

Fernando Pessoa, 1888~1935

1888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태어나, 양아버지가 영사로 근무하던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열일곱 살 때 리스본으로 돌아와, 1935년 그곳에서 일생을 마칠 때까지 무역통신문 번역가로 일하며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삶을 살았다. 생전에 그는 몇 편의 시를 발표했을 뿐, 작가로서 거의 활동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사후 발견된 유고는 시와 드라마 초고, 정치적 에세이 등을 포함하여 모두 27,543매나 되었다. 그 중 1982년 출간된 유작산문집은 문학계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오늘날 그는 포르투갈 현대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로 손꼽힌다.

창문으로 들어온 네모난 햇빛이 시간과 함께 조금씩 움직여 나와 나의 테두리를 온전히 가두는 느낌을 아는 누군가가 읽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이 책은 세상의 모든 현혹으로부터 완전하게 비켜서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페르소나인 소아레스가 가장 즐겨 쓰는 말은 ‘피곤하다’는 말이다. ‘피곤하다’는 말만큼이나 ‘잠과 꿈’이란 말도 즐겨 쓴다. “어느 날 내가, 모든 예술을 하나로 합한 것만큼 천재적인 필력을 부여 받는다면, 그때 나는 잠을 위한 찬가를 쓰겠다. 나는 잠보다 더 뛰어난 삶의 쾌락을 알지 못한다. 생명과 영혼의 완전한 소등 상태, 다른 모든 존재와 인간의 완벽한 배제, 기억도 환상도 없는 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는 시간.” 어쩌면 이 책은 “잠을 위한 찬가”가 아닐까. “나는 잠자는 듯이 글을 쓴다.”

현명한 환멸과 치명적 환멸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자기감정을 탈수하고 자기 꿈을 독수리처럼 내려다볼 줄 알아야 한다. 그게 감정이든 꿈이든 나의 그림자이든 간에, 그것들은 나 없이는 나타날 수 없는 하찮은 것이라는 사실, 나 또한 그만큼이나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채야 한다. 한번쯤 욕망한 적은 있었으나 나와 인연이 아닌 사물을 대하듯이.

 “언제나 내 삶은 현실의 조건 때문에 위축되어 있다. 나를 얽매는 제약을 좀 해결해보려고 하면, 어느새 같은 종류의 새로운 제약이 나를 꽁꽁 결박해버리는 상태다. 마치 나에게 적의를 가진 어떤 유령이 모든 사물을 다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나는 내 목을 조르는 누군가의 손아귀를 목덜미에서 힘겹게 떼어낸다. 그런데 방금 다른 이의 손을 내 목에서 떼어낸 내 손이, 그 해방의 몸짓과 동시에, 내 목에 밧줄을 걸어버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밧줄을 벗겨낸다. 그리고 내 손으로 내 목을 단단히 움켜쥐고는 나를 교살한다.”

나는 내가 가둔 자이며, 나는 나를 가둔 자다. 눈앞에서 열쇠를 흔들며 내가 죄수임을 상기시키는 간수이자, 간수의 관심을 얻고자 구석에 웅크린 채 옴짝달싹하지 않는 죄수다. 나는 나의 영원한 숙적이다. 세상의 피곤하고 추악한 모든 것들과 결별하고 싶지만, 죄수이자 간수인, 숙적인 ‘또 다른 나’와 결별을 하는 게 우선일지 모른다. 어설픈 현자들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가는 여정이 곧 삶이라고 우리를 속여왔지만, 실은 내가 누구인지를 망각해야 하는 여정이 곧 삶일지도 모른다. 나를 맴도는 어설프고 주눅 든 나, 나에게 해로운 것만을 달콤하게 권하는 협잡꾼인 나, 나에게 위선 아니면 위악만을 가르치는 감독인 나, 나에게 거짓 눈물과 거짓 한숨과 거짓 웃음을 사탕처럼 던져주는 사육사인 나, 그래서 무엇을 하며 살아도 어딘지 모를 불안과 불쾌감을 그림자처럼 질질 끌고 다녀야 하는 나. 그 모습을 비웃는 구경꾼인 나. 그런 나와 결별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나라는 사실을 포기하는 것만이 방법일지도 모른다. 꽃나무가 더 이상 꽃나무이기를 포기하는 꽃 지는 계절처럼, 장마가 더 이상 장마이기를 포기하는 쨍한 다음날 아침의 맑은 하늘처럼. 포기와 체념의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을 알려면 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더 현명한 환멸에 도착한 이후여야 하리라.

꿈꾸기 혹은 행동하기. 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선택이란 끔찍하다. 내 이성은 꿈꾸기를 혐오하고, 내 감수성은 행동하기를 역겨워한다. 행동이란 내가 부여 받지 못한 천성이며, 꿈꾸기란 그 누구도 부여 받지 못한 운명이다. 나는 이 두 가지를 모두 끔찍하게 싫어하므로 그 중 하나를 선택할 수가 없다. 그런데 나는 종종 꿈을 꾸거나 아니면 행동을 해야만 하는 입장이므로, 한 가지를 다른 한 가지 속에 뒤섞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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